불교는 사실 인간의 영혼은 없다고 말한다 - 불교의 모든 역사
1. 인도의 종교문화와 불교, 정병조
2. 서울, 저 멀리 인도에서 왔다 | 불교의 모든 역사 | 2 초기 승가와 불교적 특징 정병조
3.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삶과 죽음의 비밀이 된다 | 불교의 모든 역사 | 3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정병조
4. 윤회는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 불교의 모든 역사 | 4 초기불교의 윤회관 정병조 | 불교 자아 존재 평등 생사 인생 불안 인도 극락
5. 영원한 생명 부처님, 돌아가셨지만 영혼은 함께하는 이유 | 불교의 모든 역사 | 5 부처님 최후의 여정 정병조 | 불교 자아 존재 평등 인생 열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병조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 인도의 종교 문화와 불교라고 하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과연 인도라고 하는 대륙의 부처님 당시 혹은 그 이전에는 어떤 종교사상과 철학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와 같은 고대 인도의 종교들이 불교의 탄생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런 점들을 좀 더 심도 있게 논의해 보려고 하는 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입니다. 이런 모든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우선 인도 대륙의 문화적인 특수성을 이해하셔야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선 이 인도라고 하는 나라는 여러분들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대륙의 넓이가 광막합니다. 넓어요. 우리나라로 따져서 말씀드리면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한 넓이의 23배 정도 됩니다. 이 땅의 넓이가 그러다가 보니까 광막한 대륙적인 특수성을 이 나라 민족이 가질 수 밖에는 없겠죠. 또 이 인도라고 하는 나라는 아열대성의 기후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상하의 나라죠. 늘 덥고 습하고 이제 이런 기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살던 분들이 다 그런 건 물론 아니겠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은둔적이고 명상적인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기후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 나라는 5천여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아오면서 많은 문화를 축적해 왔는데 이 넓은 지역에 사는 인종이 굉장히 다양합니다. 참 그 이쪽과 저쪽의 거리도 멀지만은 살고 있는 인종 자체가 아주 다릅니다. 저도 인도에서 잠시 교수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인도에 살면서 제일 고통스러운 일은 제가 만약에 켈카타 쪽으로 출장을 가게 되면은 그쪽에서 쓰는 언어 그러니까 이제 칼카타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인도에서 사용되는 뱅고리라고 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불편하죠. 또 반대편의 서편에 있는 요즘에는 문바이라고 부릅니다마는 원래 본베이라고 부르던 서부 인도 최대의 무역항이죠. 그곳에 가면은 마라슈트리라고 하는 말을 써야 됩니다. 그리고 제가 살던 넬리에서는 힌디라고 하는 말을 쓰니까 참 그 언어의 복합성 때문에 굉장히 곤경에 처했던 일도 많이 기억이 납니다. 언어가 많다는 것은 인종이 많다는 뜻이죠. 그러다가 보니까 인도의 문화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게 되겠죠. 이 인도 대륙이 이룩했던 최초의 문명을 아마 여러분들 중학교 시간에 배우셨을 텐데 세계의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인더스스블라이제이션이라고 하는 것을 잉태시킨 나라가 바로 인도죠. 이에 지금 말씀드린 인더스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인도의 영토가 아니라 파키스탄 영토의 중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흔히 그 지명의 이름으로 말씀드리면 모헨조다로 하라바 이렇게 부르는 두 지역에 고대 인도의 인더스 문명의 흔적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할라바 지역보다는 모헨조다로 지역이 훨씬 더 보존 상태가 양호한데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모즈다로 일대가 사막 지역이거든요. 그러다가 보니까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인더스 문명이 몰락하면서 이 일대가 사막의 모래바람에 덮여가지고 영국 식민시대의 후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몰랐어요. 그냥 기록으로 인더스 문명이라는 게 있었다 이렇게만 배웠었는데 이게 아주 우연하게 밖으로 그 당시의 유구 유적들이 발견됨으로 말미암아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서 오늘날 우리들 앞에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된 것이죠. 이 인더스 문명의 흔적들을 살펴보면은 도저히 오천 년 전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그런 아주 훌륭한 문명의 이런 그 흔적들을 발견하는데 우선 아주 정연한 도시계획에 의해서 건설이 됐어요. 그러니까 골목이라든지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조 넓은 길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아주 선명하게 구획돼 있고 또 이 일대에 보면은 지금 말씀드린 그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에포도에 아주 교묘하게 데코레이션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꽃무늬를 이렇게 새겨놓든지 아주 아름다운 집체를 그려놓든지 해서 아주 선명한 그런 데코레이션의 흔적이 있고 하수도 시설까지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이 인덱스 문명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인더스 문명의 종교가 무엇이었겠는가 그 실체는 물론 지금 밝히기가 어려운데 거기 발굴된 여러 가지의 자료들을 보면 우선 토라고 저희가 부르죠. 흙으로 만든 흙으로 빚은 동물상이 굉장히 많이 발견이 됐어요. 코끼리라든지 사자라든지 또는 말 양 뭐 이런 것이 굉장히 많이 있어서 혹시 토테미즘적인 그런 어떤 종교가 아니었겠나 짐작을 하고 또 사람의 얼굴 모습인데 아주 근엄하고 수염을 길게 기른 이런 신상들이 여러 개가 발굴이 됐는데 이건 아마도 당시 종교 의뢰를 집행하던 제사장의 모습 아니면은 당시의 통치자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저희들이 짐작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모헨조다로에 종교가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이 일대의 여러 시가 가운데서 아주 독특한 그 시가가 발견이 됐어요. 그건 뭐냐 하면은 거대한 목욕탕 시설이 이곳에서 발견된 거예요. 목욕탕이라고 우리가 확정 지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집이 이단으로 구성이 돼 있어요. 그래서 조금 위에 있는 그 첫 번째 탕은 사람들이 옷을 벗고 입도록 설계가 됐던 거고 그 밑에 한 단 더 내려오게 되면은 양쪽에 큰 홈이 뚫려 있어서 물이 나오도록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일종의 사우나 시설 같은 그런 걸 갖췄던 거예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종교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깨끗하게 몸을 씻고 그리고 종교 집회에 참석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비록 정확한 실체는 모르지만 이 인더스 문명에도 아주 발달된 그런 종교 문화가 남아있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자 이 인더스 문명이 지금부터 약 한 4,500년 전에 멸망하고 난 다음에 인도 대륙의 또 다른 하나의 거대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아리안이라고 부르는 외래 민족이 인도에 침입하게 된 겁니다. 원래 이 아리안이라고 부르는 민족은 코카서스의 북부 지역을 무대로 삼고 있었던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소나 말 양들을 초원에 풀어놓고 그 풀들을 따라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런 유목의 생활을 하고 있다가 이 사람들이 최초로 이제 그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기원전 178세기경인데 기원전 13세기경에 이들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군하다가 드디어 히말라야 산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 아리안이라고 부르는 종족의 파들이 둘로 갈려지게 되는 거죠. 일파는 히말라야를 넘어서 인도 대륙으로 침입하고 일파는 히말라야 대륙을 비껴서 중근동 지역 터키 지중해를 넘어서 유럽으로 건너가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럽의 조상이 되고 인도로 침입한 사람들은 원주민을 정착시키고 그 원주민을 이제 자신들의 영향 하에 두는 정복자로서 인도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인도 아리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유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인도 유로피안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인도 대륙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이분들이 인도 대륙에 정착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고대의 인더스 문명이나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아리안데로의 문명이나 간에 어떤 것이든 이 세계의 다른 문명 발상지의 것과 비교를 해봤을 때 특히 인도의 것이 더 우월하고 훌륭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합니다. 뭐 물질문명의 면에서는 서로 비슷비슷한데 다만 정신문화의 면으로만 말씀을 드린다면 참 고대 인도의 정신문화가 뛰어났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고대의 인도 아리안들은 인도 대륙에 정착하게 되면서 그 이전까지 인도 대륙의 중심지였던 인더스강 유역에서 간지스강 유역으로 서서히 영토를 넓혀갑니다. 그 간지스강 유역에서 일부는 농사를 짓는 정착민의 생활을 하고 또 일부는 모여 살면서 도시국가를 발달시키기 때문에 도시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상업과 공업과 이런 일들을 많이 일으키게 되어서 부처님 당시쯤 되면 이 거대한 도시국가들이 상당히 큰 세력을 얻고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들이 간디스카 유역에 정착하면서 이룩한 고대 신화시대의 인도적인 어떤 세계관을 말해주는 것으로서는 베다나 우파니샤드와 같은 철학 사조들이 있습니다. 우선 베다니 바니시아드니 하는 이런 것들은 거의 고대 인도의 어떤 종교서사적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고전에 해당하는 건데 베다 같은 종교는 주로 어떤 것을 에테마로 삼고 있느냐 하면은 굉장히 많은 신들을 상정을 하고 또 그 신들에게 예배드리고 제사드림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행복이 믿어지고 보장된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을 가졌죠. 그러니까 베단은 말 그대로 신화적인 우주관을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고대 인도의 문헌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신들을 보면 초창기는 명백하게 다신교입니다. 자연계의 여러 현상들을 신격화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태풍 폭풍이 불 때는 태풍의 신이 있고 또 태양처럼 이렇게 늘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 태양의 신이 있고 그러다가 보니까 신들이 뭐 무한한 숫자로 많이 생겨나게 되죠. 그런데 이 신들은 베다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신에게 예배 드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이 베다의 후반부에 들어가게 되면 이 여러 신들에 대한 깊은 회의가 눈에 띄어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베다에 나오는 노래 가운데에서 무유찬가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무와 유에 대한 참가 대개 제가 압축해서 번역 말씀을 드리면 이런 내용입니다. 태초에는 무도 없고 유도 없었다. 무엇이 이 허공을 뒤덮었을까 저 믿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는 물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는 알리라. 이 모든 것을 창조한 그 유일자는 알리라. 그러나 어쩌면 그도 또한 모르리라. 이 마지막에 퀘스천마크가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일단 대신교에서 신들의 성격이 바뀌는 교체 신교를 거쳐서 유일신교까지 이르는데 나중에는 이 유일신을 의심하는 거예요. 과연 이 유일신이 모든 걸 창조했다면 그 창조자의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 이런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 베다의 신관에서 보이는 고대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은 상당히 어떤 진전된 그런 형이상학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동시에 이비다에는 여러 신들에 대한 찬양과 이들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 줄까라고 하는 그런 복잡한 의례 제사의식들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기술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기룡 화복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인데 훨씬 후대의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불교가 출연하면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베다의 신 중심적인 사고를 정면으로 부정한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분은 이런 표현을 합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신에게 다 달려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아무런 할 일이 없지 않은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신들이 다 모든 것을 결정해 주니까 그러나 이것은 불합리한 사고 방식이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또 이와 같은 여러 제사의식이 일반화되고 모든 사람들이 꼭 들어와야 할 일로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사성제 계급 가운데에서도 제일 상위의 계급이 브라흐만 사제족이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신에게 제사 드려야 된다. 그런데 보통의 우리가 그냥 앉아서 여럿이 모여가지고 신에게 예배드린다고 해서 신이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들의 소원을 대신해서 신에게 빌어주는 사람 이 사람이 사제족이에요. 요즘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종교의 성직자들이에요. 이분들에 의해서 우리들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는 사제족은 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살아있는 신이 되어버린 거죠. 이렇게 되다가 보니까 제사 의뢰의 만연이 문제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은 사제족들의 횡포가 아주 인도의 여러 백성들을 괴롭히는 그런 어떤 하나의 상위 계급을 형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은 이와 같은 제사의례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천명합니다. 이렇게 되다가 보니까 베다가 가지고 있는 권위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사선제라고 부르는 그런 철저한 어떤 그 계급제도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이분은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게 되니까 참 그런 면에서는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상당히 급진적이고 혁 진적인 그런 가르침을 담고 있는 종교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자 이 베다의 신화 시대가 이런 과정을 겪은 이후에 고대 인도는 철학적으로 봤을 때 우파니샤드라고 하는 시대 속에 접어들게 됩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인도 민족이 사실 어떤 명상적이고 은둔적인 그런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는 기후를 애타고 태어났다 말씀드렸는데 이 우파니샤드라고 하는 인도의 고전은 그 자체로서 이 우리가 해석과 번역이 가능한 것이 우바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제 그 근처에 곁에 이런 의미이고 니라고 하는 것은 영어에 니어 가까이 이런 말이고 s트라고 하는 말은 영어의 시트하고 똑같습니다. 그 안다 그러니까 오빠니 예 그러면 전체적인 의미가 좀 더 내 곁으로 가까이 오세요 이런 의미가 되잖아요. 그런 것이 이제 인도 고대의 철학 서적의 이름이 되어 있는데 우파니샤드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삶의 비밀스러운 의미 우주의 절대적인 질서 그리고 내 삶과 죽음의 문제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히말라야에서 은둔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한테 찾아갑니다. 아 저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과연 내 삶의 목적과 내 삶의 당위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을까요?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게 좋을까요? 돈을 열심히 벌어서 좋은 데 쓰는 게 좋을까요? 무조건 내가 좀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게 좋을까요? 뭐가 좋을까요? 그랬을 때 이 히말라야의 현인들은 저희들에게 말합니다. 우파니샤드 좀 더 가까이 내게 오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지금 그대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리라 이래서 아마 이제 이런 것들이 형성이 됐을 텐데 이웃 바니샤드에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을 하지만은 그 철학의 중심 테마만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세 분이 제일 주목을 모으는데 제일 첫 번째의 철학자는 샹들리아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분은 어떤 주장을 했느냐 하면은 우주를 움직이는 어떤 질서의 주체가 있다. 우리가 흔히 섭리라고도 얘기하고 또는 뭐 유일신적인 종교를 갖고 계신 분이라면 뭐 하느님 하나님 뭐 이렇게 부를 수도 있는 그런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이 우주를 에 좌지우지하는 그런 존재다 이렇게 생각들을 하는데 이 우주를 움직이는 실체 그 주제자를 이분은 브라흐만 범이라고 불렀어요. 우리 말로는 범 브라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우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대로 신 뭐 이렇게 해서 어떤 인격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아요. 그냥 막연하게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주제자가 우주를 관장한다 이렇게 말했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내면 속에 인간의 모든 것들을 다 관장하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그 근본이 되는 것이 있어요. 그걸 뭐라고 불렀느냐 하면 아트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마 자 뭐 이런 정도의 말이 되겠죠. 그러니까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이 브라흐만이고 인격 속에 내재돼 있는 진실한 나가 아트만이고 그런데 이 범과 안은 두 개의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둘이 하나이다. 이 하나인 것이 자연 속에 들어가게 되면 브라흐만 범이라고 불리게 되고 인간 내부에 잠재하게 되면 아트만 자아라고 부르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범과 아가 하나라고 하는 것을 깨우치게 되면 오랜 수행 끝에 그대는 즉시 해탈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 그대가 품고 있는 그런 만 가지의 의무는 마치 구름에 가리운 달이 드러나듯이 선명하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샹들리아의 우리가 범아 이어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두 번째의 사상가로는 저희들이 우달라과라고 하는 사람을 들 수 있는데요. 이 우달라카의 철학은 흔히 사뜨론이라고 저희가 부릅니다. 우달라카라고 하는 사람은 사뜨에 대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이 앞에 나오는 이제 그 사트론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달라카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아들을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베다의 공부를 비롯해서 자연의 질서에 대한 것을 공부하려면은 깊은 산에 가야 된다 해서 히말라야에 있는 어떤 아주 훌륭한 선지식한테 어렸을 때 아이를 맡겼어요. 그러다가 이제 애가 다 커서 장성에서 청년이 되고 난 다음에 집에 들어와서 아버지와 이제 만나는 것부터 첫 장면이 시작이 됩니다. 새 제일 먼저 아버지가 아들한테 묻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스베타케투요. 그대는 참 얼굴이 밝고 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자신만만하구나. 내 이제 너에게 물어볼 테니 네가 아는 대로 대답을 좀 해주렴. 예 아버지 뭐든지 좋습니다. 저는 십수 년 동안을 히말라야에서 열심히 요가를 닦고 열심히 공부를 배우면서 나름대로 이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법을 알고 있는가 아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말이 좀 어불성설이에요. 아니 안 보이는데 어떻게 봐요? 안 들리는데 어떻게 듣느냐고 그러니까 이거는 조금 좀 질문이 너무 어렵고 저는 그런 공부까지는 못 배웠습니다. 만약에 우리 선생님이 그걸 알았다면 저한테 다 가르쳐 주셨을 텐데 그거는 제가 금시초문입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그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해볼게. 여기 여러 가지 변형된 물체들이 있다고 하자. 밥을 먹는 밥 그릇 그리고 물을 마시는 어떤 그런 이 잔 같은 것들, 찻잔이나 뭐 이런 것들 이 모든 것들은 변형된 모습이기 때문에 다 생긴 게 달라요. 색깔도 다 다르고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모든 것의 본질은 뭐냐 흙이에요. 흙을 빚어 가지고 도자기도 만들고 밥그릇도 만들고 술잔도 만들고 모든 걸 만들지 않습니까? 만약 그대가 흙이라고 하는 그 본성을 깨달아서 알게 되면 변형된 이름은 저절로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무언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좀 설명을 더 해 주시죠. 그래 이 우주에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 최초에 있었는데 그 최초에 있었던 근본을 뭐라고 부르느냐 싸뜨라고 부른다. 사트라고 하는 말은 참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말인데 사드라는 말 자체는 존재 유 뭐 이런 거를 가리키는 철학 용어이기는 하지만 나라는 말 참 번역하기가 좀 난해한 그런 말인데 이 사드라고 하는 것이 태초에 우주에 태어나면서 이 싸뜨가 모든 만물을 창조하는데 사뜨가 모든 것을 창조하는 과정을 보면 제일 먼저 만드는 것이 아파스 물입니다. 싸뜨는 아파스를 창조한다. 그 물로 말미암아 아파스에서부터 생겨난 것이 안나 영양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물질적인 거죠. 그러니까 사트가 아파스를 낳고 아파스가 안나를 낳는 이런 과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만약 내가 여태까지 한 공부보다 사트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면 언젠가는 그대는 사떼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으리라. 만약에 그렇게만 된다고 하면 그대는 앞서 얘기했던 대로 만유에 감추어진 진실을 하나로 통찰할 수 있다. 이걸 저희들이 우달라카의 사트론이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의 마지막 분은 야수나 발키아라고 하는 분인데, 이분은 이제 자신의 제자가 자신의 아내로 묘사가 됩니다. 그래서 이 야두나발키아의 아내와 이제 바깥 양반 둘이 이제 대화를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데, 아내한테 야두나 발키아가 먼저 묻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이 금은보화로 가득 찬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아내의 대답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아니 결코 그렇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럼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까? 글쎄요. 뭐 당장은 오래 사니까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은 죽지 않는 형벌 희랍신화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 죽지 않는 고통을 겪어야 되는 그런 신들의 애환을 그린 그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사람은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하는 이런 어떤 하나의 윤회 속에서 아름다움들 느끼고 생존의 어떤 의미를 느끼는 거지. 한 번 태어나면 영원히 죽지 않는데 그게 행복할 리가 없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이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걸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인간의 내면 속에 감추어진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아트만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 아트만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자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예수나 발키아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모든 사람들은 아트만의 존재이면서도 아트만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그 진실한 자아를 외면할 수밖에 없죠. 그러다가 보니까 그것이 아닌 감각적인 존재가 되어서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이런 삶이 자신의 본래 모습인 줄 착각을 한다는 거죠. 그러나 아트만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사는 의미들이 확실히 다른 것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아마 이와 같은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우바네슈와드 철학의 핵심일 거예요. 그러니까 뭐 지금 말씀드린 것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런 정도의 가르침인데 이러한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앞서 말씀드렸던 메다와 비교해서 말할 때 인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베다의 가치관은 신화적인 우주관의 시대다. 모든 것을 신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신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파니샤드라고 부르는 것은 신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부터 인간 위주의 삶의 태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아트만이니 뭐 이런 것들의 설명이 전부 다 따지고 보면 나라고 부르는 모든 존재의 근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다와 우바네슈와드는 물론 시대적인 차이는 조금 있습니다. 베다가 조금 앞서고 우바네슈와드가 조금 후대지만 거의 두 사상이 같이 혼재해 있었는데 이들 사상은 이런 지금 말씀드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를 합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요 우리가 서양철학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배웁니다. 흔히 여러분들이 서양 철학을 배울 때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을 철학사상의 비조 가장 그 원조라고 우리가 배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이전에도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많았어요. 여러분들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만 해도 탈레스니 피다고라스니 뭐 그 모든 분들이 전부 그리스 철학자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중심적인 과제는 뭐였느냐 하면 자연입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 자연 현상이라고 하는 것을 연구하고 자연 현상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것들에 대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 그들 철학의 큰 과제였는데 소크라테스는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이어 스 그대 자신을 알아라. 사실은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은 아니라고 보고 있어요. 아마 탈레스가 한 말이 아닐까 이렇게 이제 짐작은 하는데 그걸 처음으로 우리들한테 외치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정형화시킨 인물은 소크라테스겠죠. 이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던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잘 아시는 일화 히랍의 어떤 그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하나는 해마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5월 30일이 되면은 그 해의 인물을 선정하는 그런 모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문화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 아데나이 같은 데에서 이제 마지막 날에는 온 시민들이 그 자리에 모여서 술과 음식을 각자 싸와서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하고 같이 그것을 즐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읽고 하는 이런 아름다운 시민 대축제 기간이죠. 이런 걸 여는데 그 축제 기간의 마지막 날에는 뭘 하느냐 하면 올해의 인물을 선출합니다. 그 올해의 인물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많은 아데나이 시민들의 투표로 결정이 됩니다. 투표로 결정하는 과정을 이렇게 보면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존경받는 인물들이라기보다는 아주 그냥 핫한 평범한 시민들 이런 분들이 그 해의 인물로 뽑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이를테면 저쪽 그 길모퉁에 있는 빵집 아저씨 또 그다음에는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골방 같은 데에 있는 그 구두 고치는 아저씨 이런 분이 뽑히기도 하고 그래서 그건 정말로 굉장히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서 뽑혀지는 분이니까 아주 영예스러운 대상이기는 한데 어느 해인가 소크라테스가 그 해의 인물로 선정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뽑힐 이유가 없어요. 자기가 뭘 잘한 게 있어야죠 선행도 별로 한 것이 없고 인물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뭐 그 그 부인은 악처였다면서요. 그러니까 장가를 잘못 간 것도 아니고 아 근데 내가 왜 뽑히냐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분은 그 상을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해의 인물에 소크라테스가 선정됐으니까 거기에서 이제 그 많은 시민들이 그 딜보이 신전의 그 아름다운 돌기둥 위에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새기고 이제 거기에 그분을 예찬하는 그런 시를 바칩니다. 그날 밤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소크라테스가 그 현장을 가봅니다. 그리고 참 민망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그 도로를 어루만지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왜 이해의 인물로 선정되었을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난 뭐 별로 뛰어난 것이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 나는 나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뭐냐 하면 자기가 뭘 많이 알고 지식이 출중하기 때문에 현명한 게 아니라 자기의 어리석음을 아는 것은 현명한 것이고 스스로 어리석으면서도 어리석은 줄 모르는 그것은 참 불행한 일이 아닌가. 그 다음 날부터 소크라테스는 아데나이의 시가지에서 젊은이들을 모아서 자유에 대해서 강의하고 평화와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그리고 그들과 질의와 응답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전달하고 그렇게 하면서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가 자기와 대담한 그 똑똑한 젊은이들한테 유도해내는 답변은 뭐냐 하면 예 선생님 저는 아무것도 모르네요. 제가 여태까지 굉장히 많은 것을 공부하고 아는 줄 알았는데 별로 제가 많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이걸 우리가 어려운 말로 뭐라고 부르느냐 소크라틱 아이러니라고 부릅니다. 소위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이죠. 소크라테스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무지를 자각하는 거죠. 바로 이런 면에서 모든 철학에서 가장 소크라테스가 중요했던 이유는 뭘 많이 안 게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철학의 태도를 인간 위주로 바꾼 것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위대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자 그러면 이 베다나 우파니샤드가 과연 우리 불교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라고 하는 점인데, 우선 이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범마이리어 사상 같은 것은 우리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불이사상 있죠. 이것과 저것이 둘 아닌 하나이다라고 보는 이런 사고방식을 이루는 데 많은 시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여태까지 사물을 볼 때 이 사물은 서로 연관 없는 별개의 존재로 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본질의 면에서 보면 이 둘은 하나이다. 우리 불교는 그 둘이 하나인 이유를 연기라고 하는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것과 저것 여러분 다 잘 아시는 그 유명한 부처님의 계송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 왜 이것과 저것이 하나일까 이 이것과 저것 둘 중에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는 다 없어지는 거고 이것이 있게 되기 위해서는 저것이 있어야 되고 그러므로 둘인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은 하나일 뿐이다. 이게 그 위대한 우리 불교의 불의 사상이거든요. 두라닌 사상 이 불이 아드바이타라고 부릅니다마는 인도에서는 이런 것들은 특히 중국의 선종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지 않습니까? 생과 사가 하나이다. 대승불교에서 흔히 그런 얘기들 많이 하지 않습니까? 나고 죽는 것이 어떻게 똑같습니까? 근데 나고 죽는 것이 똑같다는 거죠. 이것은 마치 낮과 밤이 똑같다는 거하고 똑같은 의미 아니겠어요? 번뇌와 보리가 둘인 것 같지만은 아니다. 번뇌와 보리가 하나다. 번뇌와 보리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이 둘이 사실은 하나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런 불의 사상의 토대를 이룬 것은 바로 고대 인도의 우프니슈아드 철학의 영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저희들은 사실 이 아트만이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 혹은 진심 보조국사 진우 같은 분은 진심이라고 불렀고 원효 대사 같은 어른은 1심이라고 불렀고 이런 것들이 사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우파니샤드의 철학과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다른 것 같지 않은데 결정적으로 이 두 사상 자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 인도의 철학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하는 실체라고 본 거죠. 분명히 우리들 마음속에는 영원한 그 무엇이 있다고 그랬죠. 근데 부처님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는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은 없는 거다. 바로 이웃 바네시아트에서 말한 아트만을 정면으로 부정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결국 차이점은 뭐냐 하면은 자아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자아라고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은 같지만은 그 자아가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인도 종교의 입장이었다고 한다면 우리 불교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는 분명히 있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가 흩어지는 그런 것일 뿐이다라고 보았다고 하는 것이죠. 아마 이러한 모든 것들을 종합을 해서 고대의 어떤 그 인도 철학 종교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 우파니샤드 같은 그런 위대한 철학 사조는 불교라고 하는 종교를 탄생시키는 총매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보여지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오랫동안 불교를 중국이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해서 봐왔기 때문에 인도의 종교가 가지고 있었던 이런 철학적인 것들이 불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라고 하는 것에 대한 논구, 또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일들은 많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인식하셔야 되는 것은 부처님은 인도 사람입니다. 인도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인도적인 문화 배경 속에서 성장하셨고 인도적인 종교 문화의 풍토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 아닙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것은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도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해 오던 신에 대한 관련 제사 의뢰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 그리고 사성제 계급이 가지고 있는 당위성 이런 것들을 전면으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또 앞서 말씀드린 그런 가장 위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어떤 존재들을 전부 다 불교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이런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불교의 여러 모습들은 인도적인 종교의 특징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런 것들 속에 불합리하고 옳지 못한 것을 과감히 배격하고 또 불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독창성으로 그런 것들을 좀 더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그런 계기를 이루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께 인도의 종교 문화와 불교라고 하는 주제로 말씀드렸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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