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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서재

한강 '소년이 온다'의 실제 인물인 문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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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최용주 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에서 5시반 경에 전남도청 구내 전라남도 경찰국 본관 2층 복도 중앙 로비에서 15살의 소년이 4-5발의 총상을 입고 죽었다. 이 소년은 교련복을 입고 있었으며, 죽기 직전에 무장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시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을 보면 시신 옆에 삼립 보름빵이 있는 것으로 봐서 죽기 전에 배가 고팠던 것 같다. 이 소년의 이름은 문재학이고 광주항쟁 마지막 날에 도청을 지키다 죽은 18명 중 한 사람이다. 당시 이 소년은 광주상고 1학년생이었다. 이 문재학 군이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품 “소년이 온다“(영어 제목 Human acts)의 실제 모델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진상규명 조사보고서는 문재학 열사의 사망 경위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143. 문재학(文在學) (남, 15세, 고등학생)
* 사망경위 : 5월 27일 새벽 도청 안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
* 주요사인 : 다발성 총상
* 사망일시 : 1980. 5. 27. 04:00~06:00경
* 사망장소 : 전남도청 구내(전라남도 경찰국 본관 2층 복도 중앙 로비)
* 관련부대 : 제3공수여단 전남도청 진압 특공조

 

* 위원회 조사 내용

 

- 문재학의 시신은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종료된 후 전남도청 구내에서 수습되어 같은 날 16:30~17:00경 도청 뒤뜰에서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에 의해 검시가 이루어졌으며, 시체검안서에 따르면 사망원인은 좌전경부 총상 등으로 인한 실혈사이다.

 

- 사망 경위와 관련, 시체검안서에 기록된 추정 사망 시간이 검시일(1980.5.27. 16:30)로부터 12~24시간 이내이고, 시신의 수습 시점과 장소, 사망원인, 도청 진압 작전 직후 기자가 촬영한 현장 사진 등을 종합하면, 문재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 당시 5·18민주화운동의 최후 항쟁 장소인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격에 다발성 총상을 입고 전라남도경찰국 본관 2층 복도 중앙 로비에서 사망했다.

 

- 광주상업고등학교 1학년이던 문재학은 5월 22일 이후 전남도청에서 시신 수습, 유족 안내 등의 활동을 했다. 5월 25일 어머니가 도청에 찾아와 귀가를 권유하였으나 초등학교 친구인 양창근이 죽은 것 같다며 계속 남아있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문재학은 같은 학교 동급생인 안종필과 같은 장소에서 희생되었다. 

 

++++++

 

5.18 유가족 김길자님이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아들(당시 고1)에게 쓴 편지입니다. ‘민중의소리’에서 옮깁니다.

 

보고 싶은 내 아들 재학이에게

 

재학아,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였는데, 엄마는 이제 팔순을 바라본 할머니가 되었단다. 엄마는 네가 생각날 때마다 천국에서 잘 지내리라 생각하고 혼자 위안을 하곤 한다.

 

하필이면 한창 예민한 사춘기 때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고 남의 집에서 살았었지.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먹고 싶은 것 먹이지 못하고, 입고 싶은 것 입히지 못할 때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니. 그렇게 너를 보냈으니 지금도 그 짠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구나.

 

이름만 불어도 눈물이 나는 우리 아들 재학아, 불러도 불러도 이제는 볼 수가 없어 노래를 부른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눈물로 밤을 지새운 지 어느덧 38년이 흘렀구나, 누가 그러더라. 세월이 약이라고,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고, 하지만 세월이 흘렀다고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김치찌개를 유난히 좋아했던 우리 아들, 그래서 김치찌개를 만들 때마다 많이도 울었단다.

 

석양이 질 때 옥상에 올라가 노을을 바라보면서 돌아오지 않은 너를 애타게 부르며 울던 기억이 나는구나. 동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다들 실성했다고 했단다.

 

그때 너를 데리러 도청에 갔을 때, 나만 살자고 돌아가기 싫다며 선배들과 같이 도청을 지키고 싶다는 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구나. 그날 5월 27일 새벽 총소리가 빗발쳤을 때 엄마의 가슴이 찢어지고 또 찢어졌단다. 우리 재학이가 저기 있는데···

 

그리고 총소리가 멈췄고, 한동안 너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단다.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망월동에 묻힌 너를 찾을 수 있었지. 그때 엄마는 억장이 무너졌단다. 왜 그때 너를 더 강하게 붙잡고 집에 데려오지 못했는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전두환 정권이 너를 폭도라고 했을 때 엄마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단다. 폭도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엄마는 아주 큰 용기를 냈다. 며칠씩 굶어도 쓰러지지 않았고, 경찰에 끌려가고 두들겨 맞고 박이 터져도 포기하지 않았단다. 그랬더니 폭도 누명을 벗겨지더라.

 

사랑하는 우리 아들 재학아. 37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 기억 속에는 잊혀 가고 있지만, 엄마는 단 한 순간도 너를 잊을 수가 없구나. 그러나 지금은 끝까지 도청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우리 아들이 정말 자랑스럽단다. 누가 죽음이 무섭지 않겠냐. 하지만 17세 나이에 훌륭한 결단을 한 우리 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너의 훌륭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그때 일어났던 그 무서웠던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할게.

 

사랑한다. 우리 아들 재학아

 

(사진 :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피 흘리는 김길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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