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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고단한 날,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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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단독 인터뷰] “고단한 날,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전문] 

 

김유태 기자, 2024-10-11 07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단독 인터뷰: 수상은 부담스런 일이지만 소설 쓰다보면 부담 사라져 내 소설은 질문에 대한 소설 질문의 끝 다다르는 그 순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돼 생명의 감각 주제로 집필중” 

 

“심장 속, 아주 작은 불꽃이 타고 있는 곳…그게 나의 소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와의 인터뷰 질의서는 9월 29일 발송됐으며, 첫 번째 답변은 일주일 뒤인 6일 이메일로 도착했다. 추가 질의서를 보내고 10일 오전 두 번째 이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을 열어본 뒤 약 10시간 뒤 한강의 이름은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호명됐다. 한강이 보내온 인터뷰 답변을 한강 작가의 목소리 그대로 전한다.

 

 

 

 

- 지금 선생님이 위치하신 장소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창문 바깥의 풍경엔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고 탁자엔 어떤 사물이 있는지, 또 어떤 책이 펼쳐져 있는지.

 

= 지금은 일요일 새벽(6일)이라 창 밖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고요합니다. 최근까지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었고 지금은 유디트 샬란스키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과 루소의 ‘식물학 강의’를 번갈아 읽고 있습니다. 사이사이 문예지들도 손 가는 대로 읽고요. 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 메디치상에 이어 포니정혁신상, 호암상을 연이어 받으셨습니다. ‘골방의 글쓰기’와 ‘세상의 찬사’ 사이에서 느끼시는 소감을 가볍게 말씀주신다면. =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부담도 됩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설을 쓰고 있다 보면 부담을 잊게 됩니다. 짧든 길든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일이 늘 어렵다 보니 아마 부담이 들어올 자리가 남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선생님 소설의 시원(始原)은 ‘붉은 닻’일 겁니다. 갯벌에 점점 잠기던 녹슨 붉은 닻들의 풍경은, 훗날 선생님 소설에 등장할 인물들을 전부 예고하는 하나의 선언적인 메타포로 남게 됐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효용을 다하고 방치된 것들, 변색되다 침잠하는 가련한 생들에 대한 기억이랄까요.

 

= 대학을 졸업하고 ‘샘터’에 입사해 일하던 때 영종도로 직원 수련회를 갔는데, 해질 무렵 썰물이 빠져나간 모래펄에 녹슨 닻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그 풍경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단편집 ‘여수의 사랑’에 묶인 소설들을 쓰던 시기에는 고단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떠나기를 몰래 꿈꾸고, 저마다 홀로 피로와 시련을 감당해내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나를 흔드는 의문들, 감정들 …그것들을 문학이 다룬다면 읽는 사람들은 자신을 재발견

 

- ‘채식주의자’에 관한 질문은 너무나도 많이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질문의 곁에서 질문 드리건대 ‘채식주의자’는 ‘내 여자의 열매’에서 시작되어 ‘그대의 차가운 손’을 거친 뒤에 나온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들은 아픔을 인식하거나 아픔을 드러내거나(드러내게 되거나) 아픔을 감추려는 사람들입니다.

 

= 저에게 소설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어진다기보다는 질문들이 이어지는데요. 어느 시기에든 골몰하는 질문이 있고, 그 질문을 진척시켜보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됩니다.

 

- 소설은 각 권, 각 작품이 하나의 시공간을 이루는 닫힌 공간이지만 선생님 소설은 상호 연결되는 ‘선형 공간’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설로 진입하실 때, 옛 소설의 환영과 목소리가 틈입하는 순간이 잦으신지도 궁금합니다.

 

= 대답을 찾았다기보다는 그 질문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되고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채식주의자’는 ‘내 여자의 열매’를 변주한 소설이지만, 보통은 새로운 소설을 쓸 때 옛 소설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써놓고 나서 예전의 소설과 연결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쓰고 나서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소설의 사이를 이루는 20여 년 동안 저는 자연인으로서 무척 많이 변했고 소설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점은 변하지 않았고 그것이 저 자신의 핵심에 속하는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선생님 소설은 그동안 변화해 왔고 동시에 변화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초기작과 달리 중기작(이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에선 역사성과 지역성이 두드러지는 선생님의 소설이 독자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요. 변화의 중심에는 과거 선생님의 폴란드 바르샤바 체류 경험이 자리한다고 이해되는데, 당시 경험이 작품 세계의 변곡점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계실지요.

 

= 도시 바르샤바에서 살았던 경험은 ‘흰’을 쓰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며 밤마다 ‘흰’을 조금씩 써간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한편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짝과 같은 소설입니다. 실제로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프롤로그 격인 1부 1장은 연결되어 있고, 비슷한 기능을(현재와 과거, 소설과 현실을 잇는 다리 같은 것으로서) 하기를 바라며 썼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꾼 꿈에서 시작된 소설입니다. 우듬지가 잘린 검은 통나무들이 수천 수만 그루 들판에 심겨 있고, 그 나무들 뒤편마다 무덤이 있고, 멀리서부터 밀려온 바다가 무덤들을 쓸어가는 꿈이었습니다. 어떤 꿈은 현실에서 경험한 것보다 강한 영향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 두 소설을 모두 쓰는 데 약 9년이 걸렸는데, 중간에 꾼 그 꿈이 결국 이 두 편의 소설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즘 생명에 대한 생각 자주해…겨울 오기 전 새작품 끝낼 계획

 

- 한강의 소설을 결국 관통하는 주제는 ‘기억과 상처’일까요. 한때 ‘몽고반점’이 탐미주의 소설로 오독되기도 했는데 당시의 인물들과 최근작의 인물들은 사실 서로 ‘기억과 상처’라는 심리적인 그물로 연결돼 있습니다. ‘상처를 복원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꿰어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 그렇게 집필된 소설을 독자가 읽는 것’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 결국 소설의 쓸모와 효용에 관한 질문이 되었는데, 이에 대한 견해를 여쭙고자 합니다.

 

= 저는 언제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고민을 매번 다른 방식의 소설들로 다루고 싶어했고요. 제 소설들을 읽어주신 분들과 그 암중모색을 나눌 수 있었던 것에 작은 의미가 있었기를 빕니다. 요즈음의 저는 생명 자체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품고 솟아나는 것들에 관심이 생깁니다. 다음 소설에서는 그런 생명의 감각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 2016년 부커상 수상 즈음 인터뷰에서 “인간이란 주제는 제가 지금까지 소설을 쓴 동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을 소설이란 형식으로 ‘거는’ 것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선생님의 과거 말씀(작가의 말 등)을 되짚어보면 작가가 소설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작가의 잉태하는 것이란 생각도 드는데요.

 

= 생각하고 서성이고 고민하고 질문하고 길을 잃고 우회하고 되돌아오고…. 그런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고 지금도 느낍니다. 그렇게 질문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요.

 

- 애써 희망하시는 일도 아니고, 또 답변하시기도 꺼려지시겠지만 엄연히 다가올 미래라고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질문 드립니다. 저는 10년 안에 ‘소설가 한강’의 이름이 스웨덴에서 호명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0일 노벨문학상 수상). 이미 유럽은 한강의 이름을 연거푸 외치고 있고요. 한 나라의 문학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읽히고 너른 공감을 얻는 것은 과연 작가와 독자, 즉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형성한다고 보십니까.

 

= 문학이라는 것이 원래 연결의 힘을 가지고 있지요. 언어는 우리를 잇는 실이기도 하고요. 어디에든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 독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9년 노르웨이 ‘퓨처 라이브러리’ 행사에서 선생님께서 흰 강보로 묶어 땅에 묻은 책에 어떤 문장이 적혔는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는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사라진, 100년 뒤에 공개될 책을 노르웨의의 숲에 묻으셨어요. 100년 뒤의 독자를 생각하면 ‘쓸쓸하고 막막한’ 글인데, 100년 뒤의 독자를 감히 대신하여 여쭙습니다. 그 글이 어떤 글로 기억되기를 바라시는지요.

 

= 100년 뒤에 그 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예측하기 어렵고요. 그 프로젝트에 참가한 후로 미래에 대한 관심이 더 생겼습니다. 인간은 변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어떤 본질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변하지 않은 마음들이 그 시공간에 있어서 제 글이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해외 잡지 ‘FRIEZE’에서 밝히시기를 앨리스 먼로, 한나 크랄, 체스와프 미워시, 페르난도 페소아, 한용운의 책을 언급하셨습니다. 선생님께 영향을 준 책들이지요. 아끼시는 작가나 작품을 꼽아주실 수 있을지요.

 

= 저에게 영향을 준 책들이라기보다는, ‘흰’을 쓰던 시기, 그러니까 바르샤바에 머물던 시기에 읽었던 책들의 목록으로 한정해서 썼던 짧은 에세이입니다. 벌써 10년이 흘러서 이젠 지금의 저와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책은 없네요. 사실 어떤 작가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에게 작가들은 일종의 집합체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다루는 것들에 골몰해 있고, 뚫고 나가려 하는 사람들의 집합체요. 그들 전체의 이미지로부터 깊은 영향을, 때로 감동을 받습니다.

 

최근 썼던 글에 마음 머물러…아직까지 마음 가는 인물은 ‘작별하지 않는다’ 女주인공

 

- 선생님 본인의 소설에서 자꾸 돌아보게 되는,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과거 글에서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고 하셨으니, 그 인물 모두를 아끼시겠지만 특별히 자꾸 꺼내어 보게 되는 인물은 누구일지 궁금합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 ‘그대의 차가운 손’의 L, ‘검은 사슴’의 의선…. 자꾸만 부축하고 싶어지는 인물이 있다면.

 

= 언제나 가장 최근에 썼던 소설에 마음이 머무르기에, ‘작별하지 않는다’의 세 주인공에게 지금은 마음이 갑니다. 정심과 인선과 경하에게요. 특히 정심은 소설을 쓰는 동안 아침에 눈뜰 때마다 생각했던 사람이라서 아직도 마음이 갑니다.

 

-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의 힘, 다시 말해 세상에서 소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거칠고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서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

 

=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읽고 있는 소설 속 사람이 되어보며 자신으로부터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반복하면 자아에 틈이 벌어지면서 투명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경험도 하게 되고요. 그렇게 소설은 여분의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앞서 다음 소설의 주제로 ‘생명의 감각’을 언급하셨습니다. 현재 집필 중인 다음 소설에 대해 귀띔이 가능할까요.

 

= 원래는 여름까지 마무리하려고 했던 소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졌습니다. 가을이 아직 남았으니 가을 안에 완성해보고 싶지만, 아마도 겨울로 넘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소설을 끝내는 시점을 스스로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대체로 늘 틀리는 편입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쩌면 이 질문을 드리기 위한 인터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필하시는 순간, 선생님이 보시는 ‘골방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집필공간으로서의 물리적 풍경이 아니라 ‘쓰고 있는 순간에 선생님께서 보시는 상태의 정신적인 풍경’이 궁금합니다. 누가 지나가고, 누가 말을 거는지,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 심장 속, 아주 작은 불꽃이 타고 있는 곳. 전류와 비슷한 생명의 감각이 솟아나는 곳. 

 

인터뷰 전문 기사는 매일 경제 기사

 

 

 

페이스북 김유태 님 글 10월 14일

 

5시. 찬쉐 인터뷰는 작년에 감사히 해두었고, 옌롄커 선생님과는 이미 수차례 대면했으니, 난 이번 노벨문학상 기사에 실은 (아주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내심 옌롄커이거나, 최애 작가 크라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이기를 바랐다. '사탄탱고'를 전날 다시 들춰본 뒤이기도 했다. 시리아의 아도니스, 그분과도 출판사의 극진한 도움으로 5년 전쯤 인터뷰를 했었다. 그래서인지 오만하게도 2015년 처음 노벨문학상 기사를 챙기기 시작한 이래 준비가 가장 많이 되었다고 느꼈다.

 

6시. 착각이었다. 이 긴장감은 도대체가 익숙해지지가 않는 녀석이었다. 발표를 두 시간 앞두고 직업병인지 기시감인지 뭔가 큰 태풍이 오고 있음을 느꼈다. 하루키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란 생각은 (조심스럽지만) 해본 적도 없었는데, (나는 그가 결국은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뭔가 거대한 태풍이 오고 있다는 불안감... 괜찮아. 이름도 처음 듣는 압둘라자크 구르나, 심지어 밥 딜런도 써봤잖아. 하지만 부장 선배와 회사 앞 중국집에서 조촐하게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면서, 코로 들어가는 건지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입맛이 썼다. 탕수육이라 그런가. 근데 왜 하필 난 또 그 많은 메뉴 중에 영혜가 싫어했던 그 탕수육을 골랐던 건가...

 

8시. 나름 노하우가 쌓였기에 이제 한림원 홈페이지나 유튜브는 보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때 가장 빠른 뉴스는 사실 트위터(X)다. 기억에 틀림이 없다면 수상자 발표 실시간 영상은 스웨덴어와 영어로 번갈아 '방송'되는데, 대략 2분쯤 걸린다. 환언하면, 트위터가 2분쯤 더 빠르다는 의미다. 8시 0분 15초쯤 됐을까. 한림원 트위터를 수십 번 스크롤하다가 게재된 포스팅을 보고 두 손으로 감싸쥐고 '악' 비명을 질렀다. Han Kang...

 

그 전율을 잊지 못한다. 엉뚱하게도, 그날 아침 그분의 메일이 도착한 뒤였다. 문학기자 처음 시작한 이후, 아니 내가 앞으로 기자를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으로부터 한두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최소한 '기자생활 중 가장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 바로 그때'임을 직감했다.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도 생각하는 사이 수초가 흘러버렸다...

 

전열을 가다듬고 데스크 선배에게 급히 두 가지를 급히 요청했다. 선배, 5단 광고부터 날려주세요, 인터뷰 전문(全文) 다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인터뷰 질문과 답변, 보내온 글의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쓰겠습니다. 목소리 그대로 들어가야 하고, 리라이팅할 여유 없습니다... 평소에도 날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그 데스크 선배는, 부장으로서의 전권(全權)을 발휘해 후배의 두 요청을 관철시켰다. 마침 편집부 선후배들도 컬러가 아닌 흑백사진을 고르는 대범한 결정으로 지면을 아름답게 채워주셨다. 그리고 혼돈의 시간.... 집에 오니 자정이 넘었다.

 

새벽 1시. 유디트 샬란스키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꺼냈다. 그분이 최근까지 읽었다고 소개해주신 책. 서문을 읽으며 전율했다. 샬란스키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잊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는 어느 정도는 조망이 불가능한 스스로의 아카이브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영원히 보존되지 못한다 해도, 어떤 것들은 다른 것보다 오래 보존된다... 쓰는 행위를 통해 아무것도 되찾을 수도 없다 해도, 모든 것을 경험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는 있다..."

 

다음날 5시. 밤새 뒤척였으나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스크랩마스터 앱으로 조간신문을 전수 검색했다. 밤 사이에 혹여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언론사가 있을까 싶었는데, 없었다. 수상 이후의 인터뷰는 아닐지언정 수상 당일 이뤄진 세계 미디어 유일의 인터뷰. 6시. 첫 카톡이 왔다. 기사를 본 한 교수님의 메시지. 본인도 밤새 잠을 못 이뤘는데 인터뷰 타이밍이 좋았다고... 애 많이 썼다고... 그 이후의 카톡과 문자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숫자였다. 언론계든 문인이든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테니 이심전심 모두 감사드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인터뷰는 내 힘 혼자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한때 나는 한강 소설에 대한 열병을 앓았다. '몽고반점'이 처음이었고, '채식주의자'로 대학 4학년 때 리포트, 아니 내 기준으로는 소논문을 써냈다. 대학원 준비할 때여서 이 악물고 쓰던 시기이기도 했다. '붉은 닻'을 시작으로, 그분의 책 전권이 거의 초판으로 내 책장에 꽂혀 있으며, 그분의 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터뷰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문학기자 생활하며 유일하게 제대로 된 인터뷰를 이루지 못한 딱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분이었다.

 

2016년 부커상 때 통화를 길게 나눠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켰으나 그건 아무래도 전화 인터뷰였고, 이후 만남을 청해도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 열병이 최고조였던 때가 벌써 6년 전 일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분에게 전송했던 문자메시지가 아직 내 휴대폰에 그대로 있다. 시간이 흐르며 나도 반쯤 포기 상태였는데, 이번 인터뷰는 그 모든 기억을 응축해 진행됐다. 기회가 좋았다.

 

인터뷰 질문이 좋았다는 분들도 있었고 신문에 쓰기엔 너무 현학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는데, 사실 그분에게서 뭔가를 '이끌어내려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질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분의 단편과 장편, 작가의 말까지 전권을 모두 다시 읽었고(거짓이 아니다...) 주말 이틀 동안 질문지를 써내려갔다. 독자로서의 연서에 가까운 편지 한 장, 질문 두 장, 그리고 부끄러워 밝힐 수 없는 자료가 담긴 또 두 장. 그렇게 다섯 페이지에 준비한 질문 13개를 고봉밥처럼 꾹꾹 눌러 담았다. 나는 그분의 문(門)을 열어야만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어떤 책인가요?'와 같은 수준의 저급한 질문을 던졌다간 그분이 그나마 여신 창문을 꽁꽁 닫으리라는 판단에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질문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시간이 허락되어 리라이팅을 했다면 오히려 인터뷰 기사를 망쳤으리란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안다. 아니 모두가 알 것이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이 모든 건 전부 사라질 것이다.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이번 소동의 핵심은 지구 반대편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이 선물처럼 주는 상의 무게감이 아니다.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문학이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창고에 메달이 없더라도 책의 가치가 낮은 것도 아니며, 오직 독자와 작가의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이 지나가고 있다... 아무도 본 적도 없고, 목격하지도 못했던, 바로 무엇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10대 때부터 낡은 도서관 책장 옆 구석에 앉아 누래진 책을 펼치면서 굳게 믿고자 했고 기대고자 했으며 애써 껴안고 나 스스로도 부축 받으려 했던 바로 그것, 그 작은 믿음(들)이 거대한 경이로 뒤바뀌어 지금 이 순간에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 감정은 나 개인의 감정만이 아닐 것이다. 문학에 감염됐거나 감염돼본 자들은 이 기분을 알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모두가 믿어왔던 '문학'이라는 가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것... 그 생각을 할수록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난다. 멀리서나마 나의 작은 글로, 그 모두의 마음에 한 발짝 담그며 동참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행복해지고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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