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이르는 길은 건조하고 메마르다.
나는 지금 어떤 달리기를 하고 있을까? 달리기 혹은 러너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완주를 위한 달리기 vs. 경쟁이 목표인 러너다. 그 둘은 명확히 구분된 게 아니라서 상황에 따라 서로 바뀌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스스로 선택하기도 한다. 누구나 처음에는 완주를 위한 달리기로 시작한다. 1km도 달리지 못한 수준에서 점점 거리와 시간이 늘어나며 가끔은 경쟁을 위한 러너로 달리는 때가 있다. 중간에 모든 러너는 경쟁을 위해 달리는 러너로 한 번은 변신한다. 사실 풀코스를 완주하기 위한 마라톤 훈련 자체는 어렵지 않다. 그 훈련을 하면서 다른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이 어렵다.
완주를 위해 달리기
- 목표: 시간에 상관없이 결승선을 통과한다.
- 사고방식: 개인적 성취가 우선이다.
- 노력: 대회 운영이나 훈련은 보수적이고, 완주를 위해 에너지를 관리한다.
- 감정: 시작한 일을 끝마쳤다는 자부심, 인내와 지구력은 덤으로 얻는다.
더 나은 달리기와 경쟁을 위한 러너
- 목표: 특정 시간 기록 수립 또는 순위 달성
- 사고방식: 예리한 집중력, 전략, 그리고 정신적 강인함
- 노력: 불편함을 딛고 일어서는 의지, 어떤 한계와 부상을 극복하려는 강인함
- 감정: 한계를 시험하고 무엇이 가능한지 발견하는 스릴
2020년 18회부터 참가한 강남 마라톤 대회는 절묘하게 춘천마라톤이나 JTBC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 전에 달리는 마지막 장거리다. 작년 대회에 4시간 18분 기록했으나, 기록이나 몸 상태는 점점 나빠진다. 벌써 내리막길인가? 아직 완주를 목표로 하는 달리기로 갈 때가 아닌데도 훈련은 부족했고, 처음 해보는 일로 남는 힘이 부족했다. 달리기는 사는 고통을 줄여준다. 힘들수록 더 많은 거리를 달려 이겨내는 방식도 있고, 평화를 유지하려면 꼭 그렇게 많이 달릴 필요가 없는 삶도 있다.
22회 강남 국제 평화 마라톤 대회는 이렇다. ⊙ 2025. 10. 03 (금, 개천절) 8시 집결 / 9시 출발 ⊙ 봉은사로 삼성1동주민센터 앞(봉은사역 4, 5번 출구) ⊙ FULL-1,500명, HALF-2,500명, 10km-3,500명, 5km-2,500명. 약 만 명이 참가하는 대회다.
달리기에 좋은 날씨였다. 잔뜩 흐렸고, 가는 실 같은 비가 내린다. 대부분의 대회처럼 시작한 곳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다. 달리기는 아무리 멀리 가도 출발한 곳으로 돌아온다. 출발하자마자 한강으로 내려간다. 늘 달리는 코스라 20km 까지는 천천히 달리면 된다. 한강으로 들어오는 양재천과 탄천의 물길을 따라 등용문에서 우리의 보금자리 영동 1교를 향해 달린다. 다시 영동 1교에서 등용문까지 달렸다면 탄천을 따라 분당 여수대로 근처 반환점까지 다녀오는 코스가 남았다.
러너가 되기로 결심하고 함께 동료가 되면 처음 풀코스를 완주할 때까지 깊은 관심을 갖는다. 꾸준히 10km를 달리고 하프에 도전한다. 하프를 달리면 이미 풀코스를 달릴 수 있는 의지와 달리기 실력은 검증이 되었다고 본다. 스스로 경쟁적인 러너가 되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삶에서 달리기를 받아들이고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대회를 앞두고 매주 장거리 훈련을 착실하게 한다. 대회가 열리면 선배 러너 중 한 명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첫 풀코스 완주를 돕는다.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나서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도전이다. 이 고된 여정에는 언제나 조용히 뒤를 받쳐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러너들과 함께 달리는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다. 이들은 경기장의 주인공이 되지는 않지만, 수많은 러너가 자신의 한계를 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페이스 메이커는 단순히 속도를 유지하는 장치가 아니라, 심리적 리듬과 신체적 에너지를 조율하는 존재이며, 마라토너에게 있어선 함께 뛰는 동료이자 멘토, 혹은 조용한 코치 역할을 한다. 이번 경주에 감독은 윤자아자 회원과 함께 달리기로 했다.
탄천을 따라 성남을 가로지르는 개울 옆의 자전거 코스와 산책로가 나란히 있는 주로로 들어선다. 벌써 12km를 달렸다. 26.5km 반환점을 돌아 다시 여기까지 오면 39km라서 거의 다 온 거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32km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주로 전체가 마치 2월에 열리는 고구려 마라톤 대회와 같다. 툭 터진 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세상과 단절되어 양쪽 둑 아래에 있는 개울을 따라 왕복하는 길이 꼭 그렇다. 사실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지루하지 않은 풀코스가 없었고, 유난히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든 풀코스도 많았다. 특별히 지루하거나 힘들거나 하는 것은 없다. 그냥 32km부터는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고 달리면 된다.
한 구간도 걷지 않고 달려 35km 급수대에 도착했다. 전략이나 정신력은 이미 떠났다. 아직도 7km 남았다. 마라톤은 32km + 10km 달리기라고 했는데 정말이다. 걷는 러너도 많았고, 여기부터 걸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지점이다. 모든 달리기가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달리기도 없었다. 전 구간이 양재천과 탄천의 물길과 숲, 성남 비행장의 노란 담벼락을 보고 달려야 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지루하고 힘들다. 눈이 감길 정도로 졸음이 쏟아지고, 모든 급수대에서 물을 마셨지만 지나자마자 또 목이 마르다. 갑자기 같은 배번에 같은 싱글렛을 입은 누군가 지나간다.
"걷고 싶니? 인제 그만 달리려고?" 어느새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온 러너가 말했다.
"어느새 여기까지 따라왔니? 하, 진짜 너무하네." 이제부터 걸으려고 작정했는데 들킨 것 같아 소리를 질렀다.
"응, 더 달릴 힘도 없어, 졸음이 쏟아져 못 달리겠어."
"그래, 그럼 너를 빠져나와 나는 계속 달릴게. 넌 걸어오렴. 넌 또 전부 잃을거야."
갑자기 잃어버린 것들이 생각났다. 다른 사람은 원하는 것을 오랫동안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잘 얻는 것을 보면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적당히 행복한 가족이나 줄을 잘 서서 얻는 것이나,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존중 같은 것들은 사실 엄청나게 노력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조차 거저 얻은 적이 없다.
삶에서 사소한 것이 있겠는가마는 적어도 남들이 다 누리는 것들은 노력하지 않고, 대충 살아도 좀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여기서 멈춘다면, 어차피 쉽게 얻어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노력도 하지 않고, 뒤에 남아 앞으로 멀어지는 러너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같이 가! 나를 두고 가지 마!" 앞서 나가려는 러너의 팔을 꽉 잡았다.
눈이 감기며 졸음이 쏟아지는 내 팔을 잡고 러너가 이끄는 때로 달렸다. 왼쪽으로 지나는 자전거를 피하고, 오른쪽 탄천 풀숲으로 가지 않게 나를 잡아주었다. 아껴둔 마지막 커피를 꺼내서 마셨다. 역시 카페인에 익숙한 심장이 빠르게 뛰자 걸음도 이내 빨라지고 정신이 조금씩 들었다. 이제부터 스릴 넘치는 집중력이 필요했다.
간신히 양재천과 탄천이 합쳐지는 등용문, 다른 팀은 이곳을 영점이라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피니시 라인까지 3km 남았다. 성자 선배가 늘 해주었던 것처럼 러너가 발걸음에 구령을 붙여준다. 이렇게 하면 짧은 거리라도 힘들지 않게 달린다. 세 곳의 물이 합쳐지는 한강과 육지의 경계에서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봉은사역으로 향하는 피니시 라인을 만난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승선에 들어올 때는 복장을 반듯이 하고, 미소를 지으라고 했다. 두 팔을 힘껏 높이 들고 '해냈다!'라고 외치며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아,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 주옥같은 또 하나의 달리기가 끝났다.
프로 야구팀도 경기는 져도 뒤풀이는 꼭 한다. 오늘 대회에 참가한 동료들과 식당으로 이동했다. 어떤 코스라도 완주한 러너를 응원하고 축하하는 자리는 즐겁다. 꽃다발과 월계수 왕관은 없을지라도 모든 동료의 가슴에 일렁이는 불꽃만큼 화려한 선물은 없다. 보이지 않아도 준비하고 고생한 동료들과 처음으로 풀코스를 완주한 마라토너를 축하한다. 빠질 수 없는이야기가 있다면 달리면서 있었던 일, 내가 훨씬 더 힘들었거든? 고통 증폭기, 원래 낚시와 달리기는 좀 과장되고 할 말이 많은 법이다. 죽자고 따지더라도 전부 거짓말은 아니다.
마라톤 전사가 말했다. "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고, 더 열심히 달릴 수 있는데도 왜 하지 않니?"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대답할 말도 없었다. 아직은 완주가 목표가 아니라 더 나은 러너가 되고, 경쟁이 목표인 러너로 살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움직임을 멈춘 것은 죽은 것들이다. 살아 있는 것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움직인다. 잠시 쉬는 러너는 언제나 러너지만, 달리지 않는 러너는 러너가 아니다. 아직도 대회에 참가하기 전날엔 소풍 전날처럼 설레어 잠이 오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까?"
"그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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