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모음

기형도, <빈집> <농담, 이문재> <기형도, 꽃> <김이듬, 오늘도> <나희덕, 푸른 밤> <류석우, 여백>

지구빵집 2018. 1. 2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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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농담, 이문재>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밤 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기형도, 꽃>

 

마감일은 지났고 

쿠폰 사용 기간도 넘겼고 케이크도 상했고 

미련스레 기다리던 사람도 욕을 하며 떠났다 

아버지도 죽었다 

이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아랫배는 아프고 

생리는 안 터지고 

달걀은 프라이가 되거나 치킨이 되고 

인간도 아닌 것이거나 인간 이상이거나 다 인간이고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많은 소리를 지껄였고 

검은 코트는 다섯 벌이나 되고 

갔으면 갔다가 돌아왔을 시간 동안 

갔으면 수만 가지 꿈에 빠졌다가 

일어나 밥 먹고 물 마시고 다시 수백 명하고 잤을 동안 

죽었으면 물통이 되었을 시간 

갈까 말까 머뭇거리는 동안 

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어제는 등기우편을 찾으러 갔다 

집으로 두 번 방문했다가 사람이 없어서 우체국에서 보관하고 있다나 뭐라나 

아는 시인이 보낸 청첩장이었는데 결혼식 날짜는 그저께였다 

이런 내 인생 

한심한 돌멩이 

공기에 삭는다 

자살도 살인도 용서도 사랑도 포기도 체념도 

또 뭐 있더라 

이 터무니없는 관념적인 단어들은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그러는 사이 

저절로 비가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불고

 

<김이듬, 오늘도>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푸른 밤>

 

잘 있냐고

건강하냐고

그렇게만 적는다

 

나머지 여백엔

총총히 내 마음을 적으니

네 마음으로 보이거든 읽어라

 

써도 써도 끝없는 사연을

어찌 글자 몇 개로 그려낼 수 있으랴

 

보고싶다

 

 

<류석우, 여백>

 

 

그러다 갑자기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불필요한 무언가를 위한 시간이 더는 없다는 것이다. 내 자신, 내 일, 내 친구에 집중해야 한다. 더 이상 매일 밤 뉴스를 보지 않을 것이다. 지구 온난화 같은 논쟁이나 정치에도 더 이상 관심 쏟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무심이다. 나는 중동문제와 지구온난화, 불평등 확대를 걱정하지만 더 이상 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속하는 것들이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알아보고, 내가 숨을 거둘 때 깨어 있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정말로 소중하다. 그리고 가능한 한 체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깊이 있는 삶을 통해 삶의 정수를 모두 빨아들이고, 굵직한 낫질로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은 짧게 베어버리고 삶을 극한으로 몰아세워, 최소한의 조간만 갖춘 강인한 스파트라식 삶을 살고 싶었다.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슬픈 짐승 - 모니카 마론

 

 

내가 혼자서 견디는 방법은 대개 이러하다.

 

날씨가 좋은 날 일렁이는 기분에 연락을 하지 않는 것, 당신의 하루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것, 잠을 잘 자는 것, 외로운 마음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지 않는 것, 힘들 때 그림을 그리는 것,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누군가의 시를 읽는 것, 새벽에 홀로 깨어있지 않는 것, 나를 위한 선물을 사는 것, 다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여유롭게 살지 않는 것, 핸드폰을 꺼 놓는 것, 내가 놓으면 끝날 관계에 대해 억울함을 품지 않는 것, 나를 스쳐간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감정을 절제하는 것,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 것, 잠깐의 슬픔이 하루를 망치지 않게 하는 것. -bluegreywh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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