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러너스

마라톤의 사계(四季) - 가을

지구빵집 2019. 6. 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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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의 사계로 글을 쓰던 중 겨울, 봄, 여름은 그러대로 잘 썼지만 마지막 글인 가을편은 정말 마무리하기가 힘들었다. 사계절을 쓰는 중에 마지막이라 그런지, 절실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 건지, 아니면 없었던 욕심이 일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절실하다는 건 사실 안타깝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낙엽이 지는 시간일 수도 있고, 벚꽃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이거나, 아니면 가을이란 계절이 길게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단풍을 오래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달리고, 더 잘 쓰려는 나의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참 많이 달렸어.'라는 말은 가슴이 뭉텅 빠지는 느낌이다. 무엇엔가 들인 시간은 어떻게든 모두 돌려받는다는 말처럼 달리기에 쏟았던 시간에 맞는 선물을 천천히 하나씩 돌려받았다. 소질 없는 평범한 일반적인 러너의 성장기를 쓰고 싶었다. 어떻게 초보 러너가 매 번 달리면 빠른 기록이 되고, 달리는 거리는 얼마나 멀리 늘어나는지, 무슨 이유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꾸준히 성장하는 러너로 지내왔는지 생각하면 놀랍다. 내가 이룬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생각에 자주 멈칫했다.

 

  수많은 러너는 주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달리는 일이 아름답다면 무엇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달리기를 겨울에 시작했으니 겨울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달리기의 겨울, 봄, 여름 그리고 가을로 이어지는 사계절의 여정이 순조롭게 끝나길 바란다. 러너들은 길 위에서 사계를 모두 보고 느끼고 몸에 새기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고, 그와 함께 주로(走路)에서 달릴 때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웃고, 즐겁고, 행복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마라톤의 사계(四季) - 겨울

마라톤의 사계(四季) - 봄

마라톤의 사계(四季) - 여름

마라톤의 사계(四季) - 가을

 

마라톤의 사계(四季) - 가을

  모든 마라토너도 언젠가는 늙고 꺾인다. 가을은 러너도 별 수 없이 저문다는 사실에 더 애착을 가지고 달리는 계절이다. 러너라면 누구나 42.195km 풀코스를 최단 시간에 달린 기록을 얻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서 손을 놓게 되는 시점은 힘들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자욱한 새벽 안갯속을 달리는 안개 러닝과 벚꽃 러닝, 초여름 녹색 러닝을 지나 단풍으로 가득 찬 주로를 달리는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고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달리지 않게 된다. 러너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이런 시간을 말없이 지켜보는 때가 있다.

 

  뜨거운 여름엔 아침 일찍 달리고, 숲 속을 달리고, 서울의 심장 남산을 달린다. 여름이 지나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사람들 표정이 무척 밝아진다.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뜨거웠던 여름을 버티고 이겨낸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는 마음이 큰 모양이다. 그냥 저절로 계절을 보내고, 주어진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가는 일은 굉장히 위대한 일이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살아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삶이 저문다는 아쉬움 때문에 더 애착을 가지고 달리는 계절이다. 모든 것에서 늦다고 생각하니 달리기도 마찬가지라서, 날이 너무 좋아서, 가을이라서 더 많이 먼 거리를 달리게 된다.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아름다운 양재천의 가을은 늦여름에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영동 1교 주변은 우리 키를 넘는 가을 억새들이 넘실거리고, 새로 단장한 보라색 핑크 뮬리가 안개처럼 밀려났다 다가온다. 양재천은 안양 과천에서 흘러와 탄천 한강으로 흘러간다. 변함없이 흐르는 양재천을 보며 달리는 사람들이 바로 러너들이다.

 

  마라톤을 시작한 해 10월 말에 메이저 마라톤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정확히 10개월 동안 열심히 단계적으로 훈련했다. 모든 마라토너에게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춘천 마라톤 대회다.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을 보다니. 삶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내가 여기서 뛰고 있다니.'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 놀라운 날이었다. 대개 기쁨과 행복이 크면 바로 이어서 아프고 참기 힘든 고통이 온다고 했다. 난 상관없었다. 어느 때 삶이 멈추더라도 크게 아쉽거나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거라는 것은 확실했다. 훌륭한 마라토너인 동료 선배의 페이스 메이커에 기대어 잘 달렸다. 춘천마라톤은 춘천댐과 의암댐으로 이어지는 긴 언덕으로 악명 높아 기록을 내기에 어려운 대회로 알고 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동물이다. 많은 스포츠 중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운동이 인기가 있다. 공과 배트와 글러브를 사용하는 야구, 다양한 크기의 골프채를 사용하는 골프, 축구나 농구는 공을 사용한다. 달리기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예외적인 운동임에도 2018년 조깅 인구를 포함해 6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달리기 취미를 가지고 있다. 발에 맞는 편한 운동화만 있으면 어디서든 달리기를 즐길 수 있다.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은 마라톤이라고 한다. 삶에서 마라톤 완주만큼이나 최상의 절정 경험을 주는 운동은 흔하지 않다. 

 

  우리나라 3대 메이저 마라톤 대회는 이른 봄에 열리는 동아마라톤과 가을에 열리는 춘천마라톤, 중앙마라톤 대회다. 특히 조선일보 춘천 국제마라톤은 아름다운 가을을 수놓는 경관으로 마라토너라면 누구나가 참고하고 싶은 대회다. 대도시를 벗어나 호반의 도시 춘천을 달린다는 점. 의암호를 에돌아가는 코스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러너들도 극찬하는 명품코스다. 춘천 의암호 주변을 달리고, 춘천댐을 돌아오는 코스는 그야말로 '가을의전설'로 불릴만큼 아름다운 주로다. 

 

  아침 기온이 11℃ 로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옷을 갈아입고 맡기고 준비운동을 마쳤다. 몸은 가벼웠다. 바람도 좋았고, 하늘도 맑았고, 춘천 호반의 보이는 모든 가을 풍경이 아름다웠다. 기록을 내기에 가장 좋은 날씨와 기온이었다. 오늘은 4시간 30분 완주가 목표였다. 욕심은 훌륭한 선배인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 4시간 20분 까지도 달리고 싶었다. 주로에서는 항상 긴장하고, 에너지의 소모를 생각하며, 거리에 따른 계획을 세워 달려야 한다. 나의 머리와 팔과 다리를 세세히 스다듬으며 말했다. '힘내라. 드디어 시작이야. 잘 할거지? 너희들을 믿는다. 나도 잘 할께. 해보자' 하고 말했다. 드디어 힘찬 함성으로 출발했다. 2만 4천명의 마라토너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전 출전 기록이 없으니 G조에 배정을 받았다. 가능한 한 천천히 달렸다. 페이스메이커 옆에 바싹 붙어 달렸다. 운동장에서 훈련도 같이하는 선배였고 달리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 분이다. 5Km 기록이 31분 25초 였다.  매 키로를 6분 20초 정도로 달렸다. 10km 까지 구간 기록도 31분 11초, 15km 구간 31분 10초로 아주 잘 달리고 있었다.  페이스메이커를 해주는 선배는 힘들면 이야기 하라고 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매 5Km 마다 있는 물을 가져다 주어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너무 감사했다. 20Km를 지나는 하프 기록이  2시간 12분 15초였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프를 넘어서자 갑자기 화장실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어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장소도 마땅치 않았고, 뛰는데 열중하니 잠시 잊혀지기도 했다. 28km 지점의 화려하지 않지만 작고 소박한 춘천댐을 지났다. 이후로도 구간기록은 5Km를 31분 20초로 변함없이 잘 유지하고 있었다. 35km 지점까지 달리다가 더는 못참겠다는 생각과 함께 공주 마라톤의 악몽이 되살아 났다. 그때도 36Km 까지 잘 달리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니 다리에 힘이 빠져 조금도 뛸 수가 없었다. 걷고 뛰면서 완주는 했지만 기록은 5시간 9분이었다. 그래도 옆길로 빠져 가까운 곳에서 소변을 해결하고 다시 돌아와 힘껏 달리는데 아뿔사, 선배님은 다른 동료들을 데리고 저멀리 앞에 가고 있었다. 힘을 내보지만 좀처럼 1Km 이상 멀어진 동료들을 잡을 수 없었다. 힘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후회도 해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힘으로 끝까지 달려야 한다.  

다시 천천히 뛰면서 페이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39km 를 넘기면서 걷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버릇이 될까봐 또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니 그럴 수는 없었다. 저 앞에 페이스 메이커가 보이고 동료들이 뛰고 있었다. 속도를 높이면서 거의 따라 잡았다.

 

'내가 잡았어'라고 말했다. 여자는 '그래' 하며 짧게 대답했다. 순간 내가 더 잘 뛰게 되어 '마음이 아픈걸까?' 하고 생각했다. 힘들었다. 숨이차고 또 걷고 싶었다. 그래도 동료가 옆에서 뛰고 있는데 걸을 수는 없었다. 말도 한 마디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차고, 심장은 이미 입으로 나와서 물고 뛰는 것 같았다. 멀리 출발점이 보인다. 그곳이 종착지다. 40km를 지나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다리에는 힘이 풀려가고, 숨소리가 거칠다. 갑자기 저기 도착하면 이제 더이상 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에 평온이 찾아왔다. 두 눈에 또렷하게 춘천 공지천의 출발선과 수 많은 응원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조금은 풀어진 두 발이 아스팔트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전력 질주를 하여 드디어 피니시 라인을 지났다. 기록은 4시간 30분 1초 였다. 정말 멋졌다. 아주 만족스런 결과였다. 봄봄, 동백꽃 소설로 유명한 김유정 문학관 옆의 뒷풀이 장소에 모였다. 회원들이 축하해 주었다. 이제 진정한 마라토너가 될 수 있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축하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무릇 생명의 본질적인 목적은 생존과 유전자의 다음 세대로의 전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초의 인류도 달렸고, 최후의 인류도 달릴 것이다. 누가 얼마나 오래 먼 거리를 달릴 지 알 수 없다. 누가 우리의 앞을 보겠는가. 아주 오래가길 바랬던 가을과 보내기 아쉬운 시월이 간다. -見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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