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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포스 ATOPOS.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로 인지한다.

지구빵집 2019. 1. 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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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실제적인 사람이다. 일상생활과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다. 사실에 집착하고 현실적이며 적용을 잘하는 것만을 생각한다. 가끔 그와 함께 즐겁게 지내고 나면 버릇처럼 혼잣말한다. "그와 함께 어떤 걸 해도 항상 더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와 함께 술을 더 자주 마시고, 더 오랫동안 놀고,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더 자주 재미있는 일을 하길 바랄 뿐이다." "자주, 오랫동안, 많은" 같은 형용사는 도대체 얼마나 "자주, 오랫동안, 많이"를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측정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닐까? 그러니까 결과에 만족하는 감정적인 상태라서 횟수나 수량을 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고유의 색과 곡선을 가진 반짝이고 근사한 몸을 가지고 있다. 길쭉한 손가락과 둥근 손톱, 검게 빛나는 풍성한 머리카락, 작고 둥근 어깨, 가는 손목과 발목, 한결같은 쇼트커트, 단호한 언어와 간결한 표현 등은 숭배하지는 않더라도 제법 근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역시 남자도 회색빛 머리카락, 검고 진한 눈썹, 도드라진 근육과 날렵한 몸매,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추구하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곧고 뚜렷한 일관성에 대해서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몸은 나에 대해선 유일하기에 '나의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욕망에 불과하지만, 욕망이기에 간절히 원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나의 일부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기는 했다. 사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예측할 수 있다. 스치듯 만나고, 열정적인 사랑이 찾아오고, 절망하는 이별이 오거나, 같이 살게 되든가, 그다음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욕망을 버리면 그를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 ATOPOS’로 인지한다. 이 말은 예측할 수 없는, 끊임없이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하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이다. 나는 그를 분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러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상투적인 것(타인들의 진실)에도 포함될 수 없는 내 진실의 형상이다." -사랑의 단상, 롤랑바르트

 

  롤랑바르트는 사랑에 대한 놀라운 정리를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좋아하는 것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초콜릿이나, 술이나, 관계, 취미 등은 모두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즐기기도 하지만 좋아하지 않게 되거나 싫증이 나면 좋아하지 않게 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갈매기는 바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바람을 타고 난다. 파도는 해변의 모래가 기다린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별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숨을 거둔 뒤에야 사랑하지 않게 된다. 영원한 사랑이란 없다. 유일한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그를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같은 방식으로, 쉽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형태로 지내는 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투적인 방식은 상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 밥을 먹고, 전시회에 가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한잔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잦다고 할 수 없지만, 횟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독창적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상투적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질투도 없고, 그를 안고 싶은 욕망이나, 가질 수 없다는 절망도 없었을 것이다. 독창성이나 상상력의 부재로 인해 다른 사람처럼 사랑해야 하고, 그를 둘러싼 것을 질투하고, 욕구불만을 느껴야 하고, 그를 생각하는데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참기 힘든 일이었다.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라는 대상 자체를 원한 게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결핍을 바라보는 나를 메꿔줄 수 있다고 생각한 '소유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유욕을 버릴 때 진심으로 그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버리지 못한다면 만나지 않아야 한다.  

 

 늘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사는 사람이라서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설픈 나의 모습을 바로잡아 주고 싶은 마음을 항상 보며 지낸다. 언제가 '너는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괴팍한 은둔자야!'라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의미는 맞지만,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도 늘 관찰하고 지켜보면서 마음을 써주니 고맙기도 했다. 문득 더디고 부족한 사람을 정말 짧은 시간에 성장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건 그의 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말하듯 '내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에도 욕심은 없지만, 대상이 있든 없든 목표를 상기하고 집중하며, 때론 집착하고, 매 순간 위태롭게 흔들리며 매달리는 나의 노력이 이룬 것은 아닐까?

 

 익숙한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관계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어떤 관계를 넘어서든가, 아니면 얼마만큼 신뢰가 생겨야 비로소 자유롭게 내려놓고 지낼 수 있을까? 확실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사실 쓸데없는 일이다. 그, 그녀, 그 남자, 그 여자, 여자와 남자라는 말을 많이 썼다. 실화를 허구로 만들어 버리는 일에 열중했다. 마치 육체를 홀라당 불에 태운 다음 진짜 뼛조각을 추려 유골단지에 넣고 '지하 1층 동백실 우 304호'에 안치하려 했다.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고 알아보기 힘든 3인칭 대명사를 자주 사용했다. 마음을 감추고, 누군가 알아보면 안 되는 일에 집착했다. 드러내는 일을 싫어하거나 감추려는 관계는 그 자체로 올바르지 않고 소모적인 관계다. 결과적으로 정확히 지금까지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용기나 확신, 믿음이나 신뢰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남자는 늘 그렇듯이 산책하러 나간다. 이 계절에는 한 시간 후면 해가 진다. 아직은 따뜻하고 환한 햇볕이 쬐는 시간이다. 노을은 역시 아름다울까? 햇살은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의 그림자를 어디까지 질질 끌고 갈까? 매일매일 일과가 정해져 있고, 일상이 변함없이 같을 때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간다.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으로 24시간을 온전히 내가 원하고 싶은 대로 지내던 날 하루가 마치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모든 순간이 새로울 수는 없다. 항상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익숙한 일을 새롭게 하고, 익숙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경험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처럼 이렇게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바로 '더 많은 시간'이다.-見河-   

 

 

2018. 12월 28일 - 과천 스타벅스 2층 전시실

 

박중현 작가 ‘ROSE BLOSSOM‘ 과천에서는 <Flower In Life> 전

 

작가는 장미라는 흔하지만 익숙한 소재, 그러니까 그 흔한 꽃이 회화의 숭고한 근원적인 표현 방식을 거쳐 

기쁨, 슬픔, 기대, 산고, 고통 등의 ‘그 흔한’ 인간의 근본적 감정과 의미를 같이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러 색상의 장미가 가진 꽃말에 국한되지 않고, 장미의 꽃잎과 형태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아 관객과 나누려 한다. 

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로 풀어나가지 않아도 박중현 작가의 장미는 아름답고 이 계절 또한 아름답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바다에서 태어날 때, 

동등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대지에서 장미가 태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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