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각 바른 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지구빵집 2019. 10. 11. 18:20
반응형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남자가 잘 보지 못 하는 풍경을 세상 어떤 사람보다 더 잘 보는 그가 쓴 글을 다시 쓴다. 우리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2019년 10월 6일 이정(巸程)이 쓴 글을 '남자'가 덧붙이지는 않고 편집한다. 매끄럽지 못하거나, 이상한 문장은 모두 남자의 허술함과 미숙함이다. 

 

 

***

 

  2019년 10월은 마라톤 동호회가 태어난 지 20년 되는 해다. 최형은 작년 겨울 송년회 겸 총회에서 역사적인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창립 20주년에 책을 출간하자는 제안을 했다. 유명하진 않지만 책도 내고, 문학 동아리에서 오래 활동했고, 제법 나이도 60을 넘긴 작가 분이다. 책을 만들자는 제안에 웬걸 대부분의 회원이 불평과 불만을 제기하고, 절대 안 되는 이유만 늘어놓는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시작부터 문제가 심각해지는 공통점이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달리기 경력에도 상관없이 동료들의 딴지가 이만 저만 아니었다. 우리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맞아?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전에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이다. 잘 되겠냐?'

'글 쓰는 일을 왜 하느냐?'

'책을 낸 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마라토너는 그저 달리는 일만 잘하면 되는 아니냐?'

'그냥 우리 만족을 위한 출판이냐? 아니면 판매를 하기 위한 목적이냐?'

 

  생각보다 더 진도가 많이 나간 말도 나왔다. 누가 글을 쓰고 모을 거며, 출판 비용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함께 꾸려질 편집진은 누가 맡을 건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정말 일일이 손에 꼽지 못할 만큼 많은 말이 나왔다. 오히려 이 정도의 노이즈면 잘 되겠다는 수상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책을 출간하는 데 동감하는 회원은 나와 주축 멤버인 양띠 몇 명에 불과했다. 동호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여러 신참 회원도 시큰둥했고, 오래 활동한 고참 선배의 야유 섞인 눈빛을 견디기에 편하지 않았다. 총회 자리에서 격렬한 토론이 이어지고, 여러 번 술잔이 오가고 나서도 한동안은 비관적인 말만 나오고 있었다. 밝은 빛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꽃과 나무의 싹은 원래가 땅속에서 나올 때, 아니 씨앗 속에서 나오기 전까지 어둡게 지내야 한다. 딸기나무는 겨울 한 철을 춥게 보내고 나서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편법으로 모종을 냉장실에 일정기관 보관하고 나면, 겨울을 보낸 줄 아는 딸기나무는 마찬가지로 딸기를 맺기도 한다.  

 

  할 일은 하자는, 꼭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자는 나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을 설득했다. 그러느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술 한잔 하느라 체력은 늘 바닥이었다. 겨울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렇게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반대하던 사람이나 혹은 시큰둥하던 선배까지 제풀에 꺾일 무렵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왕 하기로 한 일이기 때문에 동호회 운영진에게 사업을 진행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곧바로 책 출간을 위한 긴 항해를 시작했다.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편집위원 각각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경험은 서로 다르고, 각기 자신만의 책을 보고 각자의 음식을 먹은 사람이라 '달리는 일' 외에는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려웠다.

 

  최형과 이형 원로 선배 두 분과 그나마 젊은 현역인 나와 남자 둘과 삽화를 담당하는 남주현 선배와 의무사항으로 회장을 참여시켜 전부 6명으로 편집진을 구성했다. 글의 방향, 마라톤 수기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요건, 받은 글이 기준에 미달일 경우 대처방안을 정했다. 달리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뭉쳐 그들만의 리그를 시작했다. 적어도 달리는 일에 열심인 마라토너만 만족하는 글이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 마라톤이라는 운동이 주는 묘미와 즐거움, 시작하는 러너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되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우리가 만든 책을 보고 달리기를 시작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책 속에서 만나야 되는 일이었다.

 

  최형과 이형은 현재 활동하지 않거나 오래전에 활동하면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을 설득하고, 일찍 고인이 된 선배 몇 명을 기억하기를 원했다. 나는 중간 레벨의 선배 회원을 설득해 글을 걷었다. 가입한 지 오래되지 않는 신참에게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30주년에도 함께 책을 내자며 꼬드겼다. 장장 20년 동안 활동한 카페글을 120여 개 이상 뽑아놓고 보니 난감했다. 여기다가 부탁하고 받아낸 회원의 글 40여 편을 추가했다. 사실 좋은 글감에서 나온 아름다운 글이 많았다면 작업에 속도가 붙었겠지만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그저 달리고 난 후 느끼는 기쁜 감정과 절망감, 딱 두 가지로 표현한 소감 정도의 글이 대다수였다. 기대가 많아서 그런지 정작 뽑아놓은 글을 보니 책으로 엮는다는 것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친구들끼리 엮거나 학급 문고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런, 편집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도 화들짝 놀랐다.

 

  아니나 다를까 최형과 남자는 생각대로 여러 면에서 부딪쳤다. 아무리 같은 책을 읽고, 서로 글을 쓰는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생각의 취향이나 선호하는 내용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남자가 말하는 생기 있는 아이디어와 글 구성, 파격적인 실험은 늘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오랜 시간 나이가 제법 있는 글을 쓰고, 기존의 관습을 고수하는 최선배와 사사건건 부딪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선배는 자기 이야기에 토를 달고, 거의 항상 이의를 제기하는 남자가 불편했다. 그럴 때마다 나와 이형은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에 몰렸다. 만약에 내가 두 사람 의견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경우 이형은 곧바로 다른 쪽을 지지할 태세였다. 나는 선택을 하지 않고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남자대로 그가 쓴 글이나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 형은 회의가 끝나면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내 남자를 설득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남자가 자기가 쓴 글을 확 줄여 가져올 때는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았지만, 결국은 내 주문대로 된 거냐고 최형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여름날은 초복, 중복, 말복을 지나가고 시간은 촉박했다. 때론 천둥같은 큰 소리로 떠들썩 했고, 어떤 때는 봄바람 같은 잔잔함으로 평온을 지켰다. 계절이 여름을 넘기며 격주로 편집진 회의가 열렸다. 같은 글을 읽고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니 지지부진한 편집회의가 되었다. 경력이 오래된 선배 회원 위주로 글을 부탁하고, 카페 글을 모두 읽으며 글을 추려내는 일을 한동안 계속했다. 최형과 이형은 모든 일을 도맡아 하셨다. 나이도 있고, 모니터 글을 보는 일도 힘들었는지 두 위원은 몸에 탈이 나기 시작했고 그저 보기에도 위태로웠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 낮아지기 위해 노력했다. 무언가 변경이 필요한 의견도 많이 내지 않았고, 모두 동의하지 않은 사항은 가차 없이 폐기했다. 최형은 책에 넣으려는 게 너무 많았다. 나는 덜고 또 덜어내는 일을 주로 했다.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고심해봤자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고 고객을 만나야 하고, 겨우 얻은 여름 빈 시간을 무한정 책 만드는 일에 쏟아부을 수도 없었다. 책에 매달려 지내는 바람에 재충전을 필요한 금쪽같은 방학을 날려먹었다. 차를 우려내 좋은 시간 예쁜 정자에 앉아 남자와 마시려던 계획도 없던 일로 했다. 가족 누군가에게 생기는 집안 일은 간혹 한 번씩 교대로 터져 시골을 오가며 메꾸기도 바빴다. 매미도 아니면서 '여름 한 번 치열하게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모으고 다듬었다. 각 장마다 해당되는 글을 나누어 담았다. 겉표지 디자인을 편집장에게 맡기고 ,책 제목을 정했다. 책 제목을 정하는 중에도 진통이 많았다. 최형과 이형의 검색엔진을 들먹이는 의견을 반영해 정말 밋밋하고 개성 없는 제목으로 결정했다. 남자는 말리는 일에 단호하지 못했다. 대학생 딸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놀림만 받아 화가 났다. 남자가 표지 모델 그림에 사용하기 위해 여자 회원 몇 명을 찍어서 편집장에게 보냈다. 편집장은 사진 위에 그림을 그렸다. 널리 알려진 그림을 본따 남자가 찍어준 사진을 수정하여 마라톤 분위기에 적당히 맞추었다. 영락없이 나와 닮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굳이 원한 것도 아니었고, 태생적으로 좋은 감정조차도 오래 가져가지 않는 나는 누군가 알아주면 좋았지만 모른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표지 세부 디자인, 장 나누기, 삽화 등 책은 책대로 진행 되었지만 이번에는 예산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약 천 부를 출판하기로 하고 참여한 선배 편집위원이 돈을 내 계약금과 중도금을 지불했다. 출판사에서 많은 편의를 봐준 덕분에 예산에 맞추었고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디자인, 편집, 교정작업은 의외로 편하게 진행했다. 비는 자주 왔다. 보통 금요일 오후에 회의가 열리면 영락없이 빗줄기가 쏟아지곤 했다. 습하고 어두웠고 불쾌한 일들이 지나고 나면 쾌청한 하늘이 다시 반겨주었다. 가끔씩 회의에 최형이나 이형이 가지고 오는 맛있는 호도 파이, 강원도 오징어, 도넛을 함께 먹었다. 회의가 어스름 해 질 녘에 끝나면 코다리찜과 시원한 맥주를 시켜 놓고 호탕하게 웃으며 초판에 이어 2쇄, 3쇄를 연거푸 찍어내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 가끔 남자가 태워다 주는 차 안에서 장윤정의 '사랑아'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마구 춤을 추기도 했다. 하마터면 차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남자는 일이 진행될수록 의외로 말이 줄었다. 결정 사안에 대부분 동의했다. 주눅 들어 보이진 않는데 맡겨진 일들을 아주 잘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면 커피맛이 괜찮은 카페로 이동해 블라인드 시음으로 미각을 확인하는 일도 즐거웠다. 남자는 힘들면서도 얼마 남지 않은 출판 일정을 아쉬워했다. 남자는 함께 일하는 상황을 무척 즐기듯 보였다. 가까이에서 같은 일에 참여해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광경이다. 함께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처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사실 매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남자가 잘 하는 일이다. 나는 옛날에 대학원 논문 쓰는 일을 도운 적이 있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지난 일이기 때문이다. 

 

  조용하면서도 깍듯한 매너가 있는 이형은 회의 마치고 식사라도 하면 반드시 편집진 SNS 단체방에 감사의 표시를 잊지 않았다. 건축 설계회사를 운영하는 주현 선배는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직접 그린 그림을 여러장 보내 주었는데 크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평판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 의지해 선입견을 갖는 일은 직접 대면해 보면 맞지 않는 일도 많다고 생각했다. 8월 중순에 1차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잠깐의 여유시간을 갖었다. 추석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마무리를 해야 9월 말 창립행사에 출판 기념회를 열 수 있다. 마지막 2차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최형은 자주 윤문(용어나 표현을 좀 더 아름답고 매끈하게 바꾸는 작업)을 주문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문장의 기본적인 부분인 띄어쓰기, 맞춤법, 오탈자에 집중했다. 그게 무엇보다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오탈자가 수두룩하게 문장 속에서 비집고 나왔다. 마치 두더지 머리처럼 여기저기서 뿅뿅뿅하고 튀어나왔다.

 

  9월 말인데도 한낮의 날씨는 뜨거웠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라고 했던가! 우린 긴 시간 산고를 치르고 9월 24일 11시 45분에 인쇄 검수가 끝난 <너! 마라톤 달려봤니? 양재천에서>를 출산했다. 

 

  길고 긴 고통이 끝나고 드디어 출간한 책을 만났다. 그와 함께 하는 일은 늘 즐거웠다. 남자는 적어도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바랐다.-見河- 

 

 

마라톤 도서 <너! 마라톤 달려봤니? 양재천에서> 출간.

달리기와 삶을 연결시키는 일은 또 별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