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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네 탓

지구빵집 2020. 10. 1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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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번번이 우리에게 혼란과 실망, 좌절과 상처를 안긴다. 세상은 우리를 지체시키고, 창의적인 시도에 퇴짜를 놓고, 우리를 승진에서 제외시키고, 얼간이들에게 보상을 주고, 우리의 포부는 그 암울하고 무자비함에 산산이 부서진다. 그래도 우리는 거의 언제나 불평하지 못한다. 진정으로 책임 있는 사람을 알아내기가 너무 어렵고, 누구 책임인지를 확실히 알 때에도 항의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해고를 당하거나 조롱거리가 된다).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 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퍼붓는 비난들은 딱히 이치에 닿지 않는다. 세상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부당한 말들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난폭한 비난은 친밀함과 신뢰의 독특한 증거이자 사랑 그 자체의 한 증상이고 제 나름대로 헌신을 표현하는 비꾸러진* 징표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뿐이다. - 알랭 드 보통 '낭만적인 연애와 그 후의 일상' pp123-124

 

 

*비꾸러-지다 동사
1. 몹시 비뚤어지다.
2. 그릇된 방향으로 벗어져 나가다.
[센말] 삐꾸러지다.

"잘되어 나가던 일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만 비꾸러지고 말았다"

 

 

밑도 끝도 없이 투명하고 파란 가을 하늘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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