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연애 - 장석주 시인
가을은 끝장이다. 여러 개의 파탄이
한꺼번에 지나간다. 양파를 썰자 눈물이 난다.
개수대 아래로 물이 흘러들어간다.
당신이 떠난 뒤 종달새는 울지 않는다.
장롱 밑에서 죽은 거북이 나오고
우리는 잦은 불행에 대해 무뎌진다.
접시를 깬다, 실수였다, 앞니마저 깨진다.
분별이 무서워서 분별을 멀리했다.
짧은 황혼 속에서 빛이 희박해지면
나무는 어둠 속에서 목발을 짚고 일어선다.
누군가 허둥거리고 물이 얼자
인도네시아에서 온 원숭이들이 웅크린 채 잠든다.
우리가 하지 않은 연애는 슬프거나 치졸했다.
이별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여름과 겨울이 열 번씩 지나갔다.
날씨는 늘 나쁘거나 좋았다.
영혼은 무른 부분에서 부패를 시작한다.
나는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 해설: [시 읽어주는 남자]오래된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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