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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안 계시면 남자는 슬플 거라고 생각한다.

지구빵집 2020. 11. 1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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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안 계시면 남자는 슬플 거라고 생각한다. 

 

가을이 막바지다. 조금만 더 지나면 추워진다. 추우면 가을이고 머고 따뜻한 게 제일이다. 가벼운 바람에는 양버즘나무나 느티나무 단풍잎이 바람에 날리고, 무거운 바람에는 머리통만 한 플러터너스나 노란 은행나무 잎이 날린다. 찰나와 같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을 순간임에도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는 도시 사람들의 마음은 산란한다. 가을 단풍은 도시 사람에게나 매혹적이고, 외롭게 만들고, 삶의 회한을 안겨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골 사람은 느끼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늘 보는 익숙한 진실에 새삼 무어 그리 감동을 느끼고 단풍을 놀이 삼겠느냐 말이다. 봄에 한창 꽃피는 5월에 흐드러진 꽃을 보고 삶에서 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도시에 사는 사람이지 늘 꽃에 파묻혀 지내는 시골 사람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청주에 어머니와 살고 계신 아버지 생신이 어제 금요일이었다. 요즘 들어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시는 남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들었지만 동생과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아침에 부지런을 떤다. 여자는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겼고, 아들은 토요일은 12시부터 아르바이트가 시작이라 10시인데도 잠자리에 있다. 아들은 '일요일에 가면 함께 갔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여자는 며칠 전 '토요일에 다녀와야 일요일은 좀 쉬어야 되지 않겠느냐'며 마치 갈 것처럼 말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남자는 여자와 싸움이 잦고 감정이 풀리지 않았는데 같이 행동하는 일은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말은 바람이다. 지난 일이다. 모든 결혼한 여자는 남자가 어느 때고 엄마 집에 가서 자고 온다면 모두 거리낌 없이 허락한다. 그 이유는 안심해도 되고 편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으레 청주에 가면 엄마를 보러 간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좋지 않은 기억이나 경험을 씻어 낼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남자에게 심어준 부지런한 태도, 달리기, 성실함 같은 좋은 기억도 많지만 솔직히 못마땅한 기억이 더 많다. 항상 큰 목소리와 거친 말투는 사람이 털만 없는 원숭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선 기색이 달라지고, 고집도 센 편인 아버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최근 기억을 가장 생생히 하고, 믿을 만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아이가 자라면서 20살 때 근처에 좋은 기억을 많이 주면 어릴 때 주지 않아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기억은 전부 26살 이후에 생긴 경험들이 결정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쌀집을 해서 남자는 틈틈이 집안일을 도왔다. 힘깨나 쓰는 나이에 대학교를 다니게 되고, 아버지는 점점 나이가 들어갔다. 짐자전거를 몰고 80kg 한 가마 쌀을 메고 아버지 대신 아파트 5층에 배달을 하고, 20kg 소금 자루를 300개씩 날랐다. 간혹 남주동이나 석교동으로 배달을 가기도 했다. 아버지 친구분을 방문하면 학교에서 보던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파란색 1톤 봉고를 언제 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부터는 학교나 단체 급식소 같은 곳으로 한 두 포대가 아니라 20km 100 포대를 나르기도 했다. 주말이나 하루 정도 시간이 있는 날에는 트럭을 타고 아버지와 함께 청주 외곽에 있는 옥산, 미원, 강서 지역에 있는 같은 업종인 쌀집이나 정미소와 방앗간을 돌아다녔고, 좀 멀리 가면 보은, 상주, 천안 같은 도시들을 다녔다. 

 

아버지가 장사 수완이 남다른 점은 하나도 없었다. 아침 일찍 가게를 열고 주문을 받고 배달을 하는 일을 마치고 어스름 어두워지면 당시 아버지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술을 드시러 나가셨다. 낮엔 열심히 일하고 해가 지면 친구분들하고 놀러 다니는 그런 일이다. 다른 집 아버지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니까 세상엔 직장처럼 꼬박꼬박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는 사람은 담임 선생님 말고 없다고 생각했다. 이젠 그런 직장인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직장을 다니던 시절도 지났다. 이제야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을 다닌다는 의미를 알았다. 인생에 하나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돈 벌 시간이 없도록 일하고, 돈 쓸 시간도 없이 일찍 죽는다. 

 

토요일 아침이라 고속도로는 많이 막힌다. 일단 어떤 길로 갈 것인지 결정하면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에서 제시하는 경로는 따르지 않는 게 좋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나 경로를 제 아무리 잘 찾아서 간다고 해도 결국 도착하고 나면 오히려 더 오래 걸렸다는 사실에 허망해진다. 한 번 경로를 바꾸면 내비게이션은 운전자가 자기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주 쉽게 경로를 바꾸라고 지시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경로를 제시하고 그 경로를 선택해서 움직일수록 길은 막히게 되어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모두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면 누구든 접속 안 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 사람 모두가 부자라면 모두가 가난한 것과 마찬가지다.

 

남동생이 귀엽고도 예쁜 딸아이 둘을 데려왔고, 가장 사랑하는 조카는 친구 결혼식에 갔다고 하며 큰 누나가 왔다. 누나는 점점 말이 많아진다. 외롭고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다. 여동생과 작은 누나가 얼마 전에 다녀갔으니 사실 올 필요는 없었다. 일전에 브라질 이모 오셨을 때 갔던 대게집을 가기로 한다. 부모님 두 분도 마음에 든다고 한다. 나가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식당을 나와 모두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하자는 제안을 자신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극구 거부하신다. 진짜 변하지 않아도 너무 변하지 않는다. 마트에 들려 아버지가 쓰실 면도기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남자는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과천 집으로 올라온다. 누나와 남동생은 떠나고 남자는 운전석에 않았다. 남자는 운전석 창문을 열고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는 마치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젊은 여자처럼 발을 내려다보며 서 계신다. 엄마는 아들을 보내기 싫고, 남자는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한다. 엄마는 잠도 한 숨 못 자고 운전해서 돌아갈 아들, 집에 가서 변변하게 얻어먹지 못하고 지낼 아들이 불쌍했다.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두 분이서만 지낼 엄마가 불쌍했다. 모든 삶이 고난이면서 애처롭고 측은하다.

 

"엄마, 잘 지내셔요. 건강하시고" 남자가 말한다.

 

"잘 지낸다. 건강하고." 엄마가 말했다.

 

남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잊었는지 차창밖에 팔을 내밀고 엄마를 바라본다. 당뇨를 오래 앓으셔서 수척해 보인다. 엄마의 몸은 해가 다르게 자꾸만 야위어간다. 더 지나면 바람에라도 날아갈 듯 보인다. 급히 오느라 꽃을 사 오지 못한 남자는 갑자기 엄마를 모시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라도 만지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머리, 작은 키, 가냘픈 몸매, 조끼를 입으시고 양팔을 주머니에 넣은 채 이리저리 상체를 움직이신다. 남자는 차 창문을 연채 한참 엄마를 바라본다.

 

"엄마 웃어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남자가 말한다. 남자는 아까 식사 중에도, 집에 와서도 찍지 않은 사진이라도 한 장 건져볼 요량으로 재빨리 사진을 찍는다. 

 

남자는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이 혹시 애틋함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남자에게 엄마는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남자는 이미 엄마를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시절을 지나왔다.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 옆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여자로 바라보고 싶었다. 설사 옆에서 살아왔더라도 앞으로는 살아온 날과 똑같은 날들을 다시는 보내지 않을 수 없을까. 마음대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살았다는 한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저 정해진 삶을 앞으로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진저리 나게 싫다. 가을은 유독 가을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지? 남자는 머리를 흔들며 차를 몰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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