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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격옹도(司马光砸缸)의 아이, 사마광(司馬光)

지구빵집 2020. 11. 1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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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광(司馬光)

 

북송의 정치가. [1019~1086]. 산서 성(山西省 = 산시 성) 하현(夏縣) 속수향(涑水鄕: 쑤수이향) 출신. 자는 군실(君實), 호는 우부(迂夫) 또는 우수(迂叟).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사망한 후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이라고도 하며 출신지를 따라 속수 선생이라고도 불린다.

 

부친인 사마지(司馬池: 979년~1041)가 지방관으로 부임했던 광주(光州) 광산(光山)에서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광으로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7살 때에 벌써 <춘추좌씨전>을 읽으면서 흥미를 보여주는 등으로 조숙했던 데다가 유수(有數)의 교육을 받았다.

 

1038년(인종(仁宗)의 보원(寶元) 원년)인 20세 때에 우수한 성적으로 진사과에 급제한 뒤 화주[華州 = 화저우: 지금의 산시 성 화현)의 판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부친의 친구인 장존(張存: 984~1071)의 딸과 결혼했다. 부인은 검소하고 온화한 성격이었다.

 

1044년, 지방관으로 다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겨울에는 대리평사(大理評事)로서 중앙 정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를 중앙정부로 추천했던 부친의 친구 방적(厖籍: 988~1063)이 재상에 오르자 사마광도 관각교감(館閣校勘), 동지예원(同知禮院)으로 승진하고, 1053년 방적이 병주(并州 = 빙저우: 산서 성에 있었음)로 내려갈 때는 그의 부관으로 함께 따라갔다. 그러나 1057년 방적이 서하(西夏)와의 싸움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이 사건의 발발 책임자이던 사마광은 방적의 희생으로 무사했지만 귀경해서 자신의 과오를 조정에 고했다.

 

1059년, 41세가 된 사마광은 재무 관련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에 임명되기 바로 전해에는 왕안석과 같은 부서에서 일했다.

 

1061년 동지간원(同知谏院)이 되었다가 지제고(知制誥)로 승진했으나 사양하고 천장각대제(天章阁待制)로 옮겼다. 그가 황태자로 적극 옹립한 영종(英宗: 재위 1064~1067)이 즉위한 뒤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발탁되었다.

 

그는 일찍이 역대 사서가 번잡해 편람하기 어려움을 알고 40여 세 때부터 업 외 시간을 이용해 사학 저작을 집필하기 시작, 〈주기(周紀)〉, 〈진기(秦紀)〉, 등 중국 초기 역사를 편찬한《통지(通志)》8권을 지어 바쳤다.

영종은 크게 기뻐하며 숭문관에 서국(書局)을 설치해 계속 편찬할 것을 명했는데 영종 사후 등극한 신종은 책이 완성되기도 전에 《자치통감》이라 명명해 주었다.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이 즉위한 해에 한림학사, 이어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때마침 왕안석이 국정을 담당, 신법을 시행하여 서민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려 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구법당의 영수였던 사마광도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온화한 성격상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여 신법 시행의 득실을 따져 여러 차례 상소했으나 왕안석을 깊이 신뢰하고 있던 신종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므로 사마광은 자신의 현실적인 한계를 파악하고 1070년 자청해서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지영흥군(知永興軍)이 되어 장안을 떠났다.

 

다음 해에 낙양으로 돌아온 그는 이때부터 정사(政事)에 참여하지 않으며 15년간 기거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자치통감의 저작에 전력을 다해 1084년 완성했는데 그의 나이 66세 때였다.

 

책이 완성된 후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에 올랐다. 1085년 철종이 즉위하자 섭정에 나선 태황태후가 사마광에게 사람을 보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물을 정도였다.

 

면역(免役)의 5가지 해로운 점을 논하여 폐지를 청했고, 상서좌복야(尚书左仆射) 겸 문하시랑(門下侍郞)에 머물렀는데 이익을 침해당한 귀족들의 불만이 높았던 왕안석의 신법을 모두 폐지하였다.

 

이런 보수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후세의 지탄을 받고 있으나 그의 생활의 소박 검소함과 근면성, 성실성 등의 인간성과 청렴결백한 태도 및 충성심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부임 8개월 만에 과로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자치통감 외에 시문집인 전가집(傳家集) 80권, 《속수기문(涑水紀聞)》ㆍ《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오늘날 사마천과 쌍벽을 이루는 역사가로 평가되고 있다.

 

사마광의 일화

 

● 물독을 깨어 친구를 구하다.

어린 사마광이 몇 명의 꼬마 친구들과 함께 동네에서 놀고 있었는데 옆에는 물을 가득 담아놓은 큰 물독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친구 한 명이 짓궂게 물독 위에 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잘못하여 그만 물독 속에 빠지고 말았다. 같이 놀던 어린이들은 대경실 색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사마광이 커다란 돌을 찾아들고 와서는 그 돌로 물독을 깨어버리고 독에 빠졌던 어린이를 구해내었다.

그 후 이 이야기는 민간 화가들에 의해 [소아 격옹도(小兒擊瓮圖: 어린이가 물독을 깨는 그림)]란 그림으로 묘사했는데 어린이들 계몽 교과서의 편명이 되기도 했다.

이 일화는 물건보다도 사람의 생명을 존중한 그의 태도를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공(溫公)]이라 불린 연유가 되었다.

 

● 경침을 베고 자면서 공부하다.

사마광은 7살 때에 벌써 역사 거작에 대해 짙은 흥미를 보여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하기 위해 사마광은 특별히 둥근 통나무를 잘라 베개로 삼고 그것을 [경침(警枕)]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잠을 잘 때 돌아눕다가 경침이 회전하여 잠을 깨면 곧바로 일어나 불을 켜고 계속 책을 읽었다.

이런 노력이 19살 된 사마광을 과거에 급제하게 했고 유명한 정치가로 거듭나게 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전지장처

사마광은 공사간(公私間)에 항상 청렴하고 검소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그의 집에는 장례를 치를 돈이 없었다.

아들과 친척들은 모두 돈을 빌려서라도 체면에 맞게 장례를 치르자고 주장했지만 사마광은 오히려 근검한 것이 귀한 것이라고 아들을 훈계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마광은 작으마한 땅을 저당 잡혀 얻은 돈으로 검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이로 인해 사마광은 후세에 [전지장처(典地葬妻: 땅을 저당 잡혀 처를 장사 지내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 사마광은 또한 신동으로 알려져 있어 7살때 좌씨춘추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집의 사람들에게 들었던 내용을 강의를 했었다고 한다. 

 

참고

사마광

위키백과 사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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