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전사에게 / 송경동
- 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위해
청와대 앞에서 47일의 단식을 하면서도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던
선생님은 제 곁에 내내 계셨죠
전사는 집이 없는 거라고
돌아갈 곳을 부수고 싸워야 한다고
전사의 집은 불의에 맞서는 거리며
광장이며 일터이며 감옥이며 법정이어야 한다고 하셨죠
선생님께 드리는 시는
동지에게 드리는 시는
이런 투쟁의 거리에서 쓰여져야 제맛이겠죠
깨트리지 않으면 깨져야 하는 게
무산자들의 철학이라고 하셨죠
철이 들었다는 속배들이여
썩은 구정물이 너희들의 안방까지 들이닥치고 있구나 하셨죠
내 배지만 부르고 내 등만 따스하려 하면
몸뚱이의 키도, 마음의 키도 안 큰다 하셨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하느니
딱 한 발 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하셨죠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야 한다 하셨죠
저항은 어떤 잘난 이들이 대행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린 풀들이 숲을 이뤄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세찬 바람에 맞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거라 하셨죠
그런 선생님과 함께한
모든 고공의 날들이 단식의 날들이
삭발 농성 원정 점거 오체투지의 날들이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관료적 질서와 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 보이지 않는 투신으로
내일 무엇을 얻을 거라는 계산도 없이
오직 지금 여기의 사회적 진실과 신음에 연대해
몸부림치며 절규하던 날들
채증해! 고착해! 포위해! 연행해! 구속해!
십차 이십차 해산명령에도 물러서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노구의 당신과 함께 나아가던
지난 세월들이 눈물겹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어제의 높은 어른이 아니라
함께 어깨 걸고 걸어가는 지금의 친구여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지나온 영웅이 아닌 오늘의 동지여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말과 훈계와 교훈이 아닌
온몸의 연대와 실천이어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타협이 아닌 올곧음이어서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가고 난 지금
나는, 우리는 누구에 기대
이 부정하고 얍삽한 세상을 건너갈까
어디에서 장산곶매의 기상을
함께 일하고 함께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길이 막히면 뚫고 길이 없으면
새길을 내서라도 주어진 판을 깨고
노동자민중의 새판을 열어야 한다는 새뚝이의 이야기를
제국주의와 자본에 맞서 이름없이 쓰러져갔던
옛 전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나도 선생처럼 영영 권력과 부유함과 나태와 타협하지 않고
끝내 밑바닥 민중들과 연대하며
거리와 광장에서 싸우다 쓰러질 수 있을까
두렵고 외로워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마저
전사들의 유산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끝없는 분노와 서러움마저
전사들의 긴요한 양식이라면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새로운 인간해방의 밑거름이 되어
모든 생명들의 소외와 고통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가 저 낮은 거리와 광장에서 맺은 우정은
사랑은 결의는
끝내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마웠습니다. 백발의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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