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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하거나 지루하거나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 쇼펜하우어

지구빵집 2021. 3. 7.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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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하거나 지루하거나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를 두고 염세주의자 혹은 허무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이런 평가는 아마도 쇼펜하우어 자신이 이래도 저래도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긍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욕망이 있으면 채우지 못하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이 없음으로 인해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는 것을 기본적인 인간의 속성으로 파악했다.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 인간에게 불행은 행복보다 항상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장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빠르지만 단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느리다고 한다. 이 둘의 시간차가 항상 부부간, 형제간, 고부간 또 직장 동료 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괴로움의 대상이 되고 아픔을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쇼펜하우어는 열일곱 살 때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라고 생각했고 20대 초반에는 "삶은 불쾌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라고 고백한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대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인간이 대상 사물의 고유한 색을 인식하는 것은 원래 사물의 색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지만 인식 주체인 '내'가 그 사물의 색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인간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세상을 본다. 이것이 인식 대상을 이미지로 떠올려 표상하는 인간 인식의 '선택적 경향성'이다. 이런 표상 방식은 결국 존재방식을 규정하게 된다.

 

표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성으로 스스로를 인식 대상으로 삼고 그 능력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목도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한마디로 고통 자체 보다는 고통의 표상 때문에 고통받게 되는 셈이다. 세계의 고통이 모두 나의 표상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의 세계에서 '충분 근거율(충족 이유율)'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표상'해 내는 것이 된다. 칸트가 "현상계는 '물자체'가 현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비교해보면 <'물자체'-'의지의 세계'>, <'현상계'-'표상의 세계'>, <'현상'-'표상'> 정도로 도식할 수 있겠다. 

 

"세계는 '의지'의 세계인데 인간에게는 이 의지의 세계가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을 쇼펜하우어의 말로 이어보면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직접 인간에게 인식되지 않고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만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의 작용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는 맹목적인 의지가 충분 근거율에 입각해서 드러나는 세계일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 생명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전체를 관통한다. 이 의지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객관화되고 다양한 표상들의 형태로 나타난다.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지만 인간에게는 세계가 표상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인 의지의 움직임이 표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관찰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필연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고 자기 인식의 선택적 경향으로 내게 좋고 나쁨을 따지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남들도 나와 같이 의지의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지이자 동료임을 깨닫게 된다. 피아(彼我)의 세계가 모두 고통임을 알게 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생겨난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언제나 불가능한 삶을 바라는 존재로써 미래의 모순적인 상황에 희망을 걸고 거기에 행복을 유보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된 것"을 '이념'이라고 했다. 이념의 다음 단계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념을 직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념을 파악한다는 것은 의지를 본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성과 개별화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해 충분 근거율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절대 '의지'를 볼 수 없다. 이념은 이성에 의한 주객의 분리와 시공의 제약에서 벗어나야만 직관할 수 있고 '더 이상 근거율에 따르지 않고 다른 사물과의 연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어진 대상을 응시하는 정관(靜觀) 속에 침잠되어 동화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습득된 성격'이라는 표현으로 자기의 성격과 경향성을 벗어나 계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얘기한다. 습득된 성격은 스스로 일궈낸 성격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경향성을 조절해 나감을 의미한다. 연장선에서 '덕(德)'이란 "피아가 의지의 구현체일 뿐이므로 나의 고통을 미루어 타인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때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구분되지 않음을 알아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덕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나의 개별화의 원리에 갇히지 않고 의지의 큰 흐름을 느끼면 '동정심'이 생긴다. 쇼펜하우어는 실제로 이것을 '조용하고 자신 있는 명랑함'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의지의 맹목성에 의해 의지가 나에게 의욕을 너무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절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의지가 나에게 다가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을 견뎌내야 함을 역설했다. 이른바 '덕에서 금욕으로의 이행'이며 '의지의 부정'이라고 하겠다. 

 

참고문서: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1>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출처: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109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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