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닌의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 -이종훈 서강대 사학과 박사과정 학위 논문(1994)
목차
Ⅰ. 서론
Ⅱ. 바꾸닌 사상의 형성 요소
A. 프루동 사상의 영향
B.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
C. 헤겔의 변증법과 피히테의 주의론
Ⅲ. '연대적 자유'
A. 자유의 본질
B. 민족의 자유와 인민의 자유
C. 연맹주의의 성격
Ⅳ. 자유 쟁취를 위한 혁명
A. '사회 혁명'의 성격
B. 대중과 인텔리겐챠의 혁명적 역할
C. 혁명과 자유 사회의 건설
Ⅴ.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A.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 비판
B. 엘리뜨주의와 권위주의 비판
C. 결정론 비판
Ⅵ. 결어
Ⅰ. 서 론
19세기 유럽 사회 사상 중 아나키즘의 대두는 사회주의와의 관련에서 주목될 만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1860년대부터 이딸리아, 에스빠냐, 프랑스, 서부 쉬스 등지에서 아나키즘은 "대중적 지지를 획득했던 사회주의 운동의 한 갈래"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19세기 아나키즘 운동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지닌 인물로서 바꾸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이 지적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정부, 국가, 권위, 지배 등에 반대하는 이론이자 자유, 주의론(voluntarism), 분권화 등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바꾸닌은 이러한 아나키즘이 순수한 이론이나 단순한 사고 실험 단계에서 벗어나도록 이를 국제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킨 인물이었다. 즉, "바꾸닌 없이도 아나키즘은 존재했겠지만, 아나키즘 운동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바꾸닌은 실로 아나키즘 운동의 "진정한 창시자(le fondateur re?l)"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바꾸닌의 이러한 위치는 한편으로 그가 '독창적인' 아나키즘 사상가라는 점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근-현대사 연구가인 Gu?rin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의 아나키즘의 비교적 통일성을 유지하며 발전하게 된 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사람의 대표적인 사상가, 즉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65)과 바꾸닌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체계가 잡혔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서양 근대사에서 본격적인 아나키즘 사상이 처음으로 제시된 것은 W. Godwin(1756-1836)의 <<정치 정의론>> (1793)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 저작이 정작 아나키스트들로부터 M. Stirner(1806-56)의 <<유일자와 그 소유>>(1844)와 아울러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의 일이기 때문에, 1860년대부터 사회주의 운동의 한 갈래로 대두한 아나키즘 운동에 미친 Godwin이나 Stirner의 영향은 극히 제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Miller가 아나키즘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서들이 가드윈이나 쉬티르너 같은 비-사회주의적인 초기 아나키스트에 상당한 관심을 집중시킨 반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녔던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을 무시하여 왔다고 지적한 것도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살펴볼 때 아나키즘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드러나는 것은 프루동이 노동자의 입장에서 단순히 국가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까지 신랄히 비판하는 사상을 제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아나키즘에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더욱 분명해진 것은 바꾸닌을 통해서였다. 그는 프루동 사상을 계승하고 표방하였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에서 그의 스승과 다른 사상을 펴 나아갔다. 즉, 바꾸닌은 사유재산제 및 혁명 전략에 대하여 타협적인 자세를 취한 프루동과 입장을 근본적으로 달리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 못지않게 극복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Gu?rin이나 Rocker는 바꾸닌이야말로 프루동의 성과를 여과하며 풍부하게 하고 진일보시키면서도 프루동이 제시한 명제들을 한층 차원 높게 체계화한 매우 중요한 아나키스트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사회주의적 성격은 아나키즘의 두 유형을 비교함으로써 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꼬뮌주의적 아나키즘(Anarchist Communism; Communist Anarchism)과 개인주의적 아나키즘(Individualist Anarchism)으로 양분될 수 있다. 1860년대부터의 유럽 아나키즘은 바꾸닌과 그 지지자들이 피억압 민중의 자유를 위해 경제적 독점 및 사유재산제의 폐지와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를 강력히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명백히 사회주의의 한 형태로 규정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인데 그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반권위적 꼬뮌주의(communisme anti-autoritaire), 또는 리버태리언 꼬뮌주의(communisme libertaire) 등으로 명명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성격이 짙은 마르크스주의[communisme autoritaire]와 구별하려고 하였다. 바꾸닌은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조종과 참혹"인 반면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자 불의"라고 강조하면서 반권위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이 이념은 집산주의적 아나키즘(Collectivist Anarchism)으로 통칭되기도 하며, 크게 보아서 무정부적 생디낄리슴(anarcho-syndicalisme)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물론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꼬뮌주의적 아나키즘 사이에 몇가지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양자는 모두 국가와 정부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국립공장 제도나 국유제를 포함한 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배격하며, 아울러 경제의 탈-중앙집권화와 자발적 협동 조직(voluntary associations)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단지 국가 및 정치 권력의 간섭으로 야기된 독점을 배격하여 그 결과 자본이 좀 더 광범위하게 분산될 수 있는 자유시장 체제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유경쟁과 최소한의 정부 기능을 허용하는 자유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라는 공통된 전제에서 출발한 아나키즘의 두 유형은 어떻게 사회 및 경제 체제에 대한 판이한 결론에 도달하였는가? 그것은 자유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 자유를 '타인에 의한 간섭과 강제의 배제'라는 정도로 소극적으로 규정하였다면,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은 이를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욕구 충족의 기회'로 규정될 수 있다.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은 자기 자신의 자유 및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의 관계에서 상호대립적 관계를 부정하며, 타인의 행복 증진을 위해 일하는 공동체 이외에서는 결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바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사회관이 원자론적인 것에 가깝다면,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은 연대성(solidarity)을 강조하는 일종의 유기체적 사회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자가 바로 바꾸닌 및 그 지지자들의 입장이었다. 즉, 바꾸닌을 포함한 대부분의 19세기 유럽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적 연대성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이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반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미국을 제외하면 그 세력이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Josiah Warren과 그 계승자들인 S. Andrews, L. Spooner, W.B. Greene, 그리고 Benjamin F. Tucker 등의 사상과 프루동 사상 사이에 존재했던 부분적인 친화성이다. 특히 R. Owen의 이상적 공동체 건설에 참여한 바 있는 Warren은 1827년부터 자신이 건설한 공동체 안에서 '노동과 노동의 교환'을 경제 활동의 원칙으로 해서 노동시간을 교환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지불 수단으로는 화폐 대신 노동권(labor notes)을 도입했는데, 이는 그뒤 프루동이 독자적으로 도달한 결론인 상조론(mutuellisme)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프루동은 여기에 더하여, 소생산자가 자신들의 생산도구를 집단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전제하고 이들에 대한 제한없는 무이자 은행 대부를 계획했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프루동의 이론은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외래 사상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Warren의 계승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Miller가 프루동의 상조론을 가리켜 사유재산제와 공산제 사이의 '일종의 타협'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음미해 볼만하다.
이러한 성격의 푸루동 사상에 비해서 바꾸닌 사상은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표방했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의 새로운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양자 간의 입장 차이는 첫째로 사유재산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프루동은, 오히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과 유사하게, 자유를 보장하는 요소로서 사유재산을 옹호하였다. 산업과 관련해서도 그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는 상조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꾸닌은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프루동의 상조론을 거부하였다. 바꾸닌은 "개인의 재산 상속 폐지"와 아울러 "집단적 내지는 사회적 소유"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둘째로 자본주의 국가 체제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양자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프루동은 1850년대부터 국가의 완전 폐지 가능성에 회의를 느껴 연맹주의(f?d?ralisme)라는 차선책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혁명에 대한 입장이 자연히 모호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꾸닌은 자본주의를 일소할 혁명적 수단을 주장하였떤 것이다. 따라서 혁명을 전제한 바꾸닌의 연맹주의는 프루동의 연맹주의와는 외형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전제와 의도 면에서 판이한 것이었다.
바꾸닌의 이러한 급진적 노선에 대해 결국 프루동주의자들까지 포함한 당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동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근대 유럽 아나키즘은 바꾸닌에 의해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으로서 그 성격이 분명해졌으며 아울러 아나키즘 조직 및 국제적 노동계급 운동과 연계됨으로써 정치운동화 하였던 것이다. 그 중심은 제1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협회)으로서, 그것은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다. 바꾸닌은 아나키즘을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킴에 있어서 제1인터내셔널의 조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바꾸닌주의자들은 이 조직을 자신들의 이념을 설파하는 연단으로 간주하였다. 이딸리아, 에스빠냐, 쉬스 서부 및 벨기에, 프랑스 남동부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바꾸닌지지자들은 1869년 이후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바꾸닌의 세력 확대는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를 통해 제1인터내셔널을 사실상 장악했떤 마르크스파에게 최대의 위협이 되었다. 특히 사유재산 및 상속권 철폐에 관한 선언문 채택을 놓고 양파 사이에 의견 대립을 보였던 4차 총회(1869년 Basel)에서 바꾸닌파는 더 많은 지지표를 획득함으로써 마르크스파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제1인터내셔널 총회가 총무위원회의 권위에 힘입어 제출된 의안을 단호히 거부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1인터내셔널 안에 마르크스와 대등한 역량의 지도자, 즉 바꾸닌의 출현이었다. 이후 곳곳에서 마르크스파는 바꾸닌파의 도전에 직면하여 사면초가에 처했다. 따라서 마르크스파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자파에 유리한 대의원 수를 확보한 뒤 헤이그에서 개최한 5차 총회(1872년)에서 바꾸닌을 제명하고 총평의회를 서둘러 뉴욕으로 이전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을 더 이상 장악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자 이를 "사보타지" 했는데 이는 "인터내셔널을 죽여서라도 바꾸닌주의자들로부터 인터내셔널을 구하는" 고육책이었다고 표현될 수 있다. 그후 아나키스트가 주도한 6차 총회(1873년 Gen?ve)에서 5차 총회의 결정이 무효라고 선언되고 아나키즘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즉, 5차 총회에서 "조작된 다수(une majorit? factice)"가 채택한 결의안들이 인터내셔널의 "거의 전원(la quasi-totalit?)"에 의해 거부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뉴욕으로 본부를 이전하면서 유명무실해진 마르크스파의 인터내셔널과는 별도로 아나키스트들이 주축이 된 인터내셔널이 존속하게 되었다. 더욱이 1872년 양대 세력의 충돌 이후에는 사태가 마르크스보다는 바꾸닌에게 더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사건 직후 마르크스는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는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 바꾸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치하고 상호 각축을 벌이는 집단이었음과 함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형성하는 양대 주류였던 것이다.
바꾸닌의 사후에 전개된 바꾸닌주의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꾸닌주의는 생디깔리슴, 그리고 더 나아가 노동자 평의회(sovet; conseil) 운동과 관련하여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디깔리슴의 경우 그 사상적 맹아는 이미 프루동이 표방했던 노동자주의(ouvri?risme)과 비정치성(apolitisme)에서 나타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루동의 사상이 혁명적 생디깔리슴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사상을 계승한 제자들의 매개 역할 때문이었는데 바로 그 대표적 예가 바꾸닌이었던 것이다. 또한 바꾸닌파는 노동조합 운동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프랑스, 에스빠냐, 이딸리아 등지에서는 1895-1910년에 무정부적-생디깔리슴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노동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제1인터내셔널 정신의 부활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바꾸닌은, 국가의 근본적 폐지를 지향하는 인터내셔널이 직종별-산업별 조합의 자유로운 동맹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국가 조직과는 다른 이러한 조직이야말로 부르조아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 질서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바꾸닌주의는 소볘뜨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좀 더 정확한 역사적-정치적 의미에서 소볘뜨는 산업에 있어서의 일종의 자주관리(autogestion) 기관으로서 전형적인 직접민주주의 형태를 지니며 사회적-정치적 혁명 지향성의 사회 하층 집단[예: 장인, 노동자, 농민, 경우에 따라서는 군인]을 대변하는 혁명적 기구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바꾸닌이 지향한 제목표 - 국가로부터의 해방, 자주관리, 생산자 협동조합의 연맹, 지역 꼬뮌의 자치와 연맹 등 - 는 바로 소볘뜨라는 관념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은 명백히 20세기 소볘뜨 이론의 선구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 러시아 혁명과 에스빠냐 내전 초기에 바꾸닌의 노선에 따른 평의회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특히 끄론쉬따뜨(Kronshtadt)의 꼬뮌과 까딸루냐(Cataluna) 지역의 노동자 평의회가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바꾸닌은,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꼬뮌을 구성하고, 각 꼬뮌의 연맹이 지역 단위를 이루고, 각 지역 연맹은 국민 단위를 형성하며, 각 국민적 연맹은 국제 형제단을 이루는 식으로 "자유연맹(la libre f?d?ration)에 의한 밑으로부터 위로의 사회 조직화"를 제시한 바 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후일 러시아 혁명기의 평의회 체제의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차원에서 바꾸닌의 사회조직론은 '건설적 아나키즘(l'anarchisme constructif)'의 결정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바꾸닌 내지 바꾸닌주의자들의 사상 및 활동의 역사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존 연구에서 이것이 평가 절하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바꾸닌에 대한 기왕의 연구 성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선 그 근본적 원인을 살펴보자면, 그것은 우선 아나키즘과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밖에 평가하지 않았으며, 다음으로는 아나키즘 운동이 20세기 초반에 좌절하고 말았다는 인식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아나키즘의 실패 원인을 이념의 열등성으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결과론적 해석과 맞물려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인식이 만연하게 된 배경에 관해 부연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근-현대 국가에서 아나키즘의 도전을 물리치고 대표적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아나키즘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우선 자유주의의 입장은 어떠한 것인가? 자유주의는 개인이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개인 및 사회 전체와의 갈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서로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질서 유지를 위한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이러한 전제와 정부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아나키즘에 비판적인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아나키즘이 경제적 독점 및 정치적 억압을 일소하여 소수의 특권을 종식시키고 자유 향유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구하는 혁명과 국가제도의 파괴는 오히려 그 수행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폭력으로 유린할 가능성을 지닌 위험한 것이며 자유 추구의 명분으로 자유를 침해하는 모순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아나키즘이 개인의 자유라는 추상적 관념에 집착하는 한 대중적-계급적 기반을 갖춘 사회 혁명의 수행에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예컨대 스딸린은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차이를 "모든 것을 개인에게"와 "모든 것을 대중에게"로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아나키스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거부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스딸린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나키즘의 자유 관념을 개인주의적인 부르조아-자유주의의 자유 관념과 동일시하는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오류는 사회주의와 러시아사 연구의 권위자인 E.H.Carr의 인식에서도 나타날 정도다. Carr는 비록 바꾸닌의 자유관이 부르조아 자유주의의 자유 관념과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같다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역사적 저평가의 근원을 지적하면, 흔히 아나키즘은 20세기 초에 하나의 사회 운동으로서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는 통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렇게 인식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이 바로 이념 자체의 열등성에 있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결과론적 해석이 자리잡고 있다. 아나키즘의 이른바 내재적 한계성 [폭력 예찬과 파괴의 맹목성, 파괴를 통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모순성, 이론상의 일관성 결여와 비체계성, 계급성 미약과 비조직성, 비현실성, 시대착오적 복고지향성, 확고한 미래상 부재 등] 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귀결이 바로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그 운동의 역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관점을 지닌 Lindeman에 의하면, 아나키스트는 서양 근현대사의 주요 투쟁, 즉 구체적으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19세기 마르크스주의자와 제2인터내셔널, 볼쉐비끼, 파시스트에 대한 투쟁 등에서 늘 패배자였으며, 더 넓게 보아서 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모두 불가피한 추세로 받아들였던 유럽 근대 산업문명에 대한 패배자였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견해를 지녔던 Lichtheim 역시 아나키즘 운동이 한때 수십만명의 추종자를 끌어 모았던 나라에서조차 쇠퇴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단지 역사적 과거로서의 의미만 지닐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적 인식의 잘못을 주장하는 견해도 못지않게 제시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이라 할 Avrich는 1960-70년대의 사회적 격동 속에서 이미 아나키즘 운동의 부활이 목격되었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부활의 시점에 일부 역사가들이 실로 안일하게 이 운동의 "묘비명"을 써 놓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1960년대 후반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출된 신좌파 운동 및 학생 운동으로부터 오늘날의 환경 운동, 반전-평화 운동, 여성 운동, 탈-중앙집권화 운동(municipalism)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아나키즘의 근본 정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19세기 아나키즘의 의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동시에 현대사회에서의 맥락을 명확히 재조명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작업으로서 우선 필자는 바꾸닌 사상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의 현재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바꾸닌 사상은 아나키즘이 지닌 지속적 생명력을 집약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나키즘이 사상적으로나 사회운동으로 강점을 갖게 된 근거는 i) 아나키즘 사상 자체에 내재된 이상주의적 성격 및 ii) 현대 국가 및 사회에 내재된 문제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특히 바꾸닌의 자유관에서 잘 나타난다. 후자와 관련해서 바꾸닌 사상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 및 제3세계의 사회 혁명까지 포함하는 현대 사회 전반의 문제를 통찰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아나키즘의 이상이 갖는 보편성은 인간의 자유이며 이를 억압하는 모든 제도와 관습에 대한 투쟁에 있다. 이 점은 특히 바꾸닌의 자유론에서 극명하게 표출된다. 그에게서 인간의 자유는 천부적-생래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부단히 창조해 나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바로 인류 역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완전한 자유로서, 질서의 명분으로 부분적 양도를 전제하는 사회계약론에서의 자유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또한 완전한 자유를 목표하기에 그에 대한 추구는 부단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 사상으로 대표되는 아나키즘의 이상주의적 성격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바꾸닌에게 비판적이거나 아나키즘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연구자들까지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Carr는 바꾸닌이 구현하고자 했던 자유를 가리켜 "어떠한 인위적 제도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여전히 실현되지도 않고 실현될 수도 없는 이상"이지만 "인간성의 최고 표현이자 열망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역사상 아나키즘 운동의 종언을 단언한 Woodcock마저도 아나키즘 사상이 지닌 영속적 가치를 인정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Ritter와 Crowder는 현대에서의 아나키즘의 지속적 힘을 인정하고 그 이유가 "좀더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점"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이제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이 적어도 모든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서 펄럭이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나키즘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간적이고 더 나아가 영감의 원천으로 인식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의 비젼이라는 것 만큼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둘째로 현대 국가와 사회, 특히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과 관련하여 아나키즘의 의미가 진지하게 고려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우선 현대사회에서는 19세기에 보편적이던 국가의 자유방임적 성격이 사라졌다. 그대신 증대되는 행정의 전문관료화 경향, 정부 권력의 비대화와 경제적 독점화의 추세 등으로 개인에 대한 통제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에, 아나키즘이 추구한 인간의 자유라는 이상은 역설적으로 이론적 형성기였던 19세기보다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점이야말로 1960년대 이후 아나키즘 사상에 대하여 증대되고 있는 관심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업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간을 노동과 궁핍으로부터 해방시킬 잠재력도 커졌지만 이것이 사회 구성원들을 지배하는 권위의 자동적인 감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컴퓨터와 첨단 통신 기술은 오히려 권위의 증대를 초래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것은 이미 120여년 전에 바꾸닌이 국가권력 기반으로서의 과학-기술이 지니는 의미를 예리하게 분석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는 전신 기술이 초래한 정치 권력의 가공할 집중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한편으로 기술 발전에 따른 일상 생활의 만족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의 내용을 빈곤하게 만들고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여가 생활 중에도 끊임없는 상업 광고로 사회 구성원의 소외감을 심화시키는 것에 선진 자본즈의 사회의 주요한 모순이 존재한다. Miller는 이에 대한 반발이 신좌파(New Left) 출현의 배경을 이루며 그 근본정신이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기성 체제와 권위의 타파를 외쳤던 버클리에서 빠리에 이르는 1960년대 학생 운동은 "파괴의 욕구가 곧 창조의 욕구"라는 경구로 상징되는 바꾸닌 사상의 재등장이라고 간주되었다. 또한 인간 예속을 심화시키는 기술관료 정치 및 군산복합체의 전조에대한 바꾸닌의 경고와, 또한 그가 제시한 자치 꼬뮌을 기본 단위로 한 분권화된 사회조직론과 여성해방론도 역시 아나키즘 정신의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나키즘의 현재적 의의는 구미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세계와 제3세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960년대 유럽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와 공산당의 권위주의에도 세찬 비판을 가하였다. 이에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동유럽의 역사가들도 이들의 주장을 바꾸닌주의의 부활로 해석할 정도였다. 또한 구 소련의 역사가 루드니쯔까야(Rudniskaia)와 즈야꼬프(D'iakov)는, "파괴의 욕구는 ㅊ조의 욕구"라는 바꾸닌의 경구를 내건 서방 세계의 청년 봉기가 자본주의 기성사회 구조 전반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며 이를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의 붕괴를 목도하는 시점에서, 거수기로 전락한 소볘뜨, 일당 독재로 귀착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멘끌라뚜라의 지배,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중앙통제식 계획경제 체제가 역설적으로 심화시킨 생산의 무정부성과 '국가 자본주의' 등의 문제는 당대의 볼쉐비즘을 포함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바꾸닌주의자들의 비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동유럽 구 사회주의권에서는, 독재와 자유, 중앙집권주의와 연맹주의, 자주관리와 당의 역할 등, 한마디로 사회 재건의 제반 문제로 인하여 바꾸닌 사상이 새롭게 주목받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20세게 유럽의 주변부[러시아, 에스빠냐]나 제3세계[중국, 꾸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그 성격상 마르크스적이라기보다는 바꾸닌적이라는 점이다. 즉, 20세기에 있어 사회주의 혁명의 무대는 마르크스주의 주장대로 혁명 조건이 성숙된 구미 자본주의 사회보다는, 바꾸닌이 주목했던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회였다. 아울러 혁명 주도 세력도 마르크스가 강조한 산업 프롤레타리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꾸닌의 주장대로 농민, 실업 대중, 지식인에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의 경우, Beyme가 지적했듯이, "왜 집산주의적 아나키즘과 유사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산업 국가에서보다는 러시아에서 더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규명이야말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의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과 비슷한 문제 인식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레닌의 경우 1905-1917년에 멘쉐비끼가 수용한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이론보다는 항상 "인민에 대한 신뢰와 이상주의적 활력과 아나키즘적 기조를 지닌 러시아 혁명 전통"에 더 근접하여 있었다는 Anweiler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코민테른이 결성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일부 역사가들과 전투적인 공산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오히려 바꾸닌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20년대에 러시아의 볼세비끼 역사가인 Steklov 및 Polonskii - 물론 이들은 스딸린의 독재권력 강화 과정에서 숙청되었지만 - 등이 바꾸닌을 러시아 혁명과 볼쉐비즘의 선구자로 기꺼이 인정하려고 했다는 점과 이들이 주도한 가운데 1926년 바꾸닌 서거 50주기에 상당한 규모의 기념식이 조직되고 바꾸닌에 관한 많은 연구 논 문들이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그런가하면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였으며 볼쉐비끼와 대립하게 되었던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자 신들이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의 적인 바꾸닌을 "볼쉐비즘의 선구자(Vorl?ufer des Bolschewimus)"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평가 및 해석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경제 결정론적 성격이 강한 마 르크스주의에 맞서서, 인간의 의지와 실천, 직접행동(l'action directe)에 역점을 둔 바꾸닌 사상에 대한 재음미가 요구되는 바 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살펴 볼 때, 아나키즘 특히 바꾸닌 사상은 20세기 선진 자본주의 사회[제1세계]와 동유럽 구 사회주의 사회 [제2세계]에 노정된 제문제를 통찰력 있게 예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변부 및 아시아-중남미[제3세계]에서의 사회 혁명의 여건과 양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예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바꾸닌 사상이 갖는 현대적 의미는 물론, 역사적 의의조차도 이제까지 연구에서는 대체로 간과되거나 또는 단편적으로만 인정되거나 혹은 부정되어 왔다. 더욱이 그 의 이름은 '어둠의 세력'에서 '파괴의 사도', '거칠은 반항 청년', 심지어 '짜르의 밀정'에 이르기까지 악의에 찬 온갖 불명예스 러운 수식 어구와 결부되어 있는 형편이다. 구 사회주의권에서 나왔던 바꾸닌 관계 저작들도 대부분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바꾸 닌에 대한 가차없는 매도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방적인 매도로는 바꾸닌 사상 및 활동이 지니는 역사적 위치는 물 론 현대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바꾸닌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의 가장 커다란 한계로서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빈약하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따. 이러한 형편들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그의 사상 연구와는 거리가 먼 인물 연구, 일화 소개, 심리 및 정신 분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기류가 기존 연구의 주종을 이루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연구 경향의 원조이며 전형이라고 할 Carr의 연구서는, 바꾸닌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 준 것이 사실이지만, 방대한 자료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 고 바꾸닌 사상에 대한 명쾌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바꾸닌의 주저인 <<국가주의와 아나키(Gosudarstvennost' i anarkhiia)>>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며 오히려 바꾸닌 활동에 대한 희화화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이후에 나온 전기물에 대체로 답습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이론가나 사상가로서의 바꾸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Carr에 앞서서 이미 Diehl, Masaryk, Polonskii 등이 사상면에서의 바꾸닌의 기여를 부정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은 데에는 바꾸닌 자신에게서 비롯된 문제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바꾸닌 자신이 이론의 완전성이나 절대성을 부정하고 이론가이기보다는 실천가 이기를 자처했던 탓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자신이 "이론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자부가히도 했던 점에 유념 할 필요가 있다. 사상가로서의 바꾸닌의 독보적 위치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Steklov를 비롯해서 비교적 최근에는 Leval, Saltman 등의 연구서가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Steklov 및 Pyziur는 바꾸닌 사 상 전반에 대한 균형잡힌 분석보다는 특정한 부분만을 부각시켜 이를 볼쉐비즘 및 볼쉐비끼 혁명과 직결시켰다. 특히 Steklov는 바꾸닌을 가리켜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창시자라고 하는, 상당히 무리한 해 석을 시도하였다. Leval의 저서는, 바꾸닌 사상에 대한 주제별 분류를 통한 체계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인 연구서라기보다는 사상 선집의 수준에 머문 것이었다. Saltman은, 기존의 연구가 바꾸닌 사상의 형성 요소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프루동의 영향을 거의 무시하고 있으며 바꾸닌이 언급조차 한 바 없었던 라마르크의 영향 을 크게 부각시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따라서 Saltman의 연구서도 바꾸닌 사상의 이해를 위해 올바른 사상 형성의 계보를 파악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바꾸닌에 대한 기존 연구의 또 한가지 문제점은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가운데 그의 단편적 활 동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1850년대 러시아에서의 수형 생활 중에 바꾸닌이 짜르 니꼴라이 1세 앞으로 써서 제출한 <참회록(Ispoved')>의 성격, 냉혈적인 러시아의 혁명가 녜차예프와의 관계, 슬라브 민족 해방을 위한 다양한 활동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중에서 비교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 마지막 문제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바꾸닌을 러시아 패권주의자나 이와 유사한 범슬라브주의자로 왜곡하였으며, 심지어 Nettlau나 Gu?rin처럼 바꾸닌의 아나키즘에 공감하는 연구자들마저도 슬라 브 민족 해방을 위한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든지 아나키즘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하는 이해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Venturi, Kohn, Lavrin의 연구에서도 바꾸닌의 활동을 그의 아나키즘 사상과 관련지어 파악하려는 시도는 찾아 볼 수 없다. 이것 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이 1863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체계가 잡혀 나간다는 점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 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반해 필자는 바꾸닌 사상이 1840년대부터 줄곧 일관성을 유지하며 발전되어 갔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 면 벌써 이때부터 그의 아나키즘의 중심 사상을 이루는 것으로 연대성을 강조하는 그의 독특한 자유관 및 반-국가주의가 나타나 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에 Cahm은 유일하게 이러한 관점에서 바꾸닌의 민족 해방 운동을 다룬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바 있 다. 이상과 같은 기존 연구에 대한 검토를 통해 더욱 그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바꾸닌 사상 전반에 대한 체계적 연구라고 하겠 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우선적으로 바꾸닌 사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에 있으며 더 나아가 그를 통하여 그 현대적 의미까지도 재조명해 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바꾸닌이 쓴 격문 및 논문, 비밀결사의 강령, 신문 기고문, 서신 등의 내용을 분석하고 그 사상의 변화와 발전을 각 시대 상황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방법을 취하고자 한다. 아울러 자료를 해석함에 있어서 몇가지 유념하 려는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스스로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했던 바꾸닌의 삶에서 저술활동 - 비록 정력적으로 전개되고 방대 한 양의 문헌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 은 부차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혁명 이후 신질서 수립 의 정연한 이론적 문제를 신세데의 몫으로 돌리고 혁명의 의미를 무엇보다도 기성 질서 파괴에 두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구체적 전략과 전술에 집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저술은 여러가지 상황 변화에 따른 선전-선동이라는 매우 특수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어서, 그 형태에 있어서 격문, 강령, 소책자, 편지 등의 대부분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일견하기에는 서로 모순된 내용과 일관성이 결여된 면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료의 이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행간의 진정한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바꾸닌 사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는 가능하며 그 사상의 현재적 의미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리라고 필자 는 믿는다.
Ⅱ. 바꾸닌 사상의 형성 요소
바꾸닌 사상은 어떠한 지적 배경에서 형성되었는가?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들과 같은 의견을 교환하였 는가? 자유의 추구에 장애가 되는 기성의 제도와 권위에 대하여 단호한 투쟁을 시도한 그의 아나키즘은 간단히 말해서 반국가적, 반권위적이며 동시에 혁명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특성들이 i) 프루동 사상, ii)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가치 관과 인민의 정서, iii) 독일 관념론 철학, 특히 헤겔과 피히테의 사상에서 연유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세가지 요소에 대 한 고찰을 통하여 바꾸닌 사상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우선 바꾸닌의 사상에 기본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프루동이었다.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주된 활동 무대로 삼 으며 여기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던 바꾸닌은 자신의 노선을 "폭넓게 발전되고 최종 결론에 이른 프루동주의"로 요약 한 바 있다. 이러한 규정은 그의 지지 기반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바꾸닌은 대부분이 프랑스인, 벨기에 인, 이딸리아인, 에스빠냐인으로 구성된 연합 세력을 이끌었다. 프랑스, 벨기에, 프랑스어권 쉬스에서 바꾸닌은 프루동의 계승자 로 간주되었으며, 수백만 에스빠냐 사람들에게 바꾸닌의 메시지가 계시와 같은 충격을 준 것도 그가 프루동의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프루동의 광기"가 "바꾸닌에 의해 확산"되었다고 하였으며, 쁠레하노프는 바꾸닌을 가리켜 "가증스런 공산주의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까지 뒤섞인 프루동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밀접한 지적 연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Gu?rin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프루동과 바꾸닌 사이에 유의해야 할 몇가 지 차이점이 주목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출신 계급이 판이하다. 프루동이 프랑스 농촌 태생의 노동자 출신인데 반하 여 바꾸닌은 러시아 토지 구족 출신의 인텔리겐챠다. 그렇다면 러시아 귀족이 프랑스 노동자 출신 사상가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 었던 심리적, 정신적 기반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19세기 러시아의 인텔리겐챠가 갖는 독특한 가치관관 인민의 정서 속에서 실마 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러시아 정신사 속에 배태된 인민 예찬과 권력국가 배격의 논리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양 자 간의 단절을 보여주는 측면, 즉 바꾸닌이 프루동을 극복한 측면도 없지 않다. 바꾸닌은 특히 자본주의 하의 사유재산제에 대 한 비판적이면서도 장인층의 생산 도구 소유를 전제로 한 프루동의 상조론(mutuellisme)을 배격하고 집산주의(collectivisme)를 내세우며 오히려 프루동의 옛 추종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던 점도 러시아 사상 속에서 어느 정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다 음으로 러시아의 농민반란 전통을 중시한 바꾸닌은, 만년에 보수 성향으로 기운 프루동과는 대조적으로, 사회혁명의 기폭제로서 의 민중봉기에 시종 강한 집착을 보였다. 집산주의와 민중봉기에 대한 집념은 러시아 인민에 대한 예찬과 이상화 속에서 태동하 였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은, Miller가 주장하였듯이, "러시아의 인민주의와 유럽 아나키즘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바꾸닌 사상의 형성에서 독일의 관념론 철학, 특히 피히테와 헤겔의 사상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세기 러시아 인텔 리겐챠의 사상 형성에 끼친 독일 철학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바꾸닌도 예외일 수 없었다. 바꾸닌은 피히테를 통하여 자유의지 의 관념을 다듬었으며, 헤겔로부터는 현실의 모든 기존 권위를 부정하는 변증법적인 혁명 논리를 발전시켰다. Lichtheim에 따르 면, "1865년 프루동의 죽음이 그의 프랑스인 추종자들을 고아로 만들었을 때 바꾸닌이 프루동의 외투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 기반은 "바꾸닌이 1836-42년에 피히테, 헤겔을 읽음으로써 얻게 된 하나의 철학 내지는 세계관"이었다. 바로 이것이 훗날 바꾸닌의 추종자들이 "libertarianism"으로 불렀던 것이다.
A. 프루동 사상의 영향
바꾸닌 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프루동의 영향은 i) 노동자주의(ouvri?risme) 내지는 노동자 중심적 관점, ii) 반국가주의, iii) 경제적 연맹주의(f?d?ralisme)로 요약될 수 있다. 바꾸닌은 1848-51년의 혁명기에 집필된 프루동의 저작, 특히 <한 혁명가의 고백>(Les confessions d'un r?volutionnaire)과 <19세기 혁명의 일반 이념>(L'id?e g?n?ral de la r?volution au ⅩⅨe si?cle)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정치적 국가의 철폐"와 "경제적 연맹에 의한 사회의 조직화" 즉, 반국가주의와 경제적 연맹주의가 두 저작의 중심 사상이라고 파악하였다. 프 루동에 있어서 이 두가지는 바로 노동자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노동자주의란 노동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지식인의 지도와 후견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결정하며 이를 직접행동(l'action directe)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조 직해 나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프루동 및 노동자주의의 관점에서, 국가란 노동을 착취하는 유산 계급의 지배 도구이 기 때문에 노동자의 의사에 반하여 그 권위와 지배 의지를 강요하는 적대 세력을 의미하며, 또한 노동자들의 자율적 활동에 따른 사회 조직 원리인 연맹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국가주의는 연맹주의와 아울러 노동자주의 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 세가지는 바꾸닌이 인터내셔널에서 프루동주의의 이름으로 표방했던 노선의 기본원리인 것이다. 그러면 바꾸닌에 있어서 노 동자주의는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그는 인터내셔널의 노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일상적 노동으로 탈진한, 무식하고 비참한 노동 대중이다. 그들은, 여하한 의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편견으로 자신의 양심을 얼룩지게 하거나 부분적으로 지배한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인 사회주의자 "(socialiste sans le savoir)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능의 밑바닥에서부터 그리고 그들이 처한 입장 때문에, 그렇지 못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들 및 부르조아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진지하고 훨씬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바꾸닌이 볼 때, 노동 대중에게 굳이 결여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사상일 뿐인데 그들은 이미 그들 자신의 물질적 존재 조건에 의해서 사회주의자였던 것이다. 반면에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사상적 필요 때문에 사회주의자였던 것이 다. 바꾸닌에 따르면, 존재의 필요는 항상 사상의 필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하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사상이란 주로 존 재의 표현이며 그 후속적 발전의 반영에 불과하며 결코 그 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이 처한 참담한 존재 조건을 극 복하려는 모든 진지한 노동자야말로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선 표명은 특히 인터내셔널의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를 장악하고 있던 마르크스파에게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사 실 바꾸닌은 비공개적으로 프루동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닌으로서는 최대의 경쟁 세력 인 마르크스파를 권위적 사회주의자, 국가사회주의자, 지식인 사회주의자로 매도하며 이를 통해 한편으로 프랑스, 쉬스, 이딸리 아, 에스빠냐 회원들을 규합하기에는 노동자주의에 입각한 프루동 사상이 가장 편리한 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프루동의 노동자주의는 어떻게 태동하였으며 발전하여 갔는가? 우선 그 자신이 프랑스 농촌 태생의 노동자(인쇄공) 출신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 형성 과정에서 리용 지역 견직공들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1831년과 1934년 봉기 에 참가한 투사들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모임이 중간계급의 지식인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에 프루동은 더욱 일체감을 갖게 되었다. 프루동은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이 노동계급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현실적이고 권위적인 주장들을 비판하고, 사상의 독자적인 표현과 조직에 대한 노동계급의 내재적 역량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노동운동이 "초월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이를 노동계급 내부의 것으로 대체하는 "내재성의 철학(la philosophie de l'immanence)"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회 이론은 "프랑스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 노동자의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숙련 노 동자인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산업화로 인하여 오히려 새로이 나타나는 공장 노동자들보다 더 커다란 상대적 박탈감을 맛본 계층 이었다. 프랑스 노동운동은 이러한 도시 숙련 노동자들의 창안이며,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도 그들의 진정한 사회 경험과 열망에 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루동 사상도 똑같은 근본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여러가지 동일한 희 망과 이상을 공유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은 1844년 빠리에서 프루동과 차를 수없이 마셔가며 온 밤을 지새우는 동안 태동하고 있 는 노동자 운동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게 되었다.
프루동에게 특히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은 1828년 견직업의 작업반장들(chefs d'atlier)에 의해 창립된 '리용 상조회'(la Soci?t? de Devoir mutuel)였다. 작업반장들은 분명히 임금생활자에 속하나, 전문기술자로서 작업장의 운영과 조직에 대하 여 일정한 권한을 지니기 때문에 공장주의 권능에 맞서 일정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전적으로 외적 의지에 종속되 거나 소외되지는 않았다. 이들이 원한 조직도 국가와 공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발전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이들은 정치 권력으 로부터 비롯되는 질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회 혁명 내지는 이들의 표현대로 '해방과 쇄신'의 도정에 들어서려 했다. 그러 한 의미에서 이들은 상조회를 결성한 1828년 6월 28일을 '재생 원년'(an I de la R?g?n?ration)의 제1일로 삼았 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집단 심성을 프루동도 공유했던 것이다.
1840년대에 프루동이 자신의 사상을 특징짓고자 'anarchie'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되풀이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즉, 노동계급에게 예속을 뜻하는 모든 세속적 전통과 결벌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바꾸닌은 이러한 프루동을 가리켜 "혁명 가의 진정한 본능"을 지녔으며 "합리적인 부정에 있어서 가공할 힘을 지닌 위대한 혁명적 이론가"라고 평한 바 있다. 프루동의 노동자주의는 기성 권위에 대한 평가절하와 신성모독을 수반한다. 즉 반권위주의적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가 및 종교에 대한 부정은 노동계급에 가해지는 특권 계급과 그 제도의 압박을 제거하고, 여기에 노동계급의 제가치를 대립시 키고자 하는 것이다. 기성 종교에 대한 비판은 노동계급을 전통적인 제가치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며, 국가에 대한 비난은 권 력이 주도하는 것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특히 국가에 대한 부정은 노동계급에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권 리, 즉 외적 권위 또는 프루동 자신의 표현대로 "초월적" 권력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판의 결론은 단순히 정치 형태의 수정일 수 없으며, 오직 사호, 경제 관계의 근본 변혁일 뿐이다. 혁명은 새로운 국가 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파괴 내지는 정치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프루동은 루이 블랑, 까베, 블랑끼 등과 대립하면서, 혁명이란 경제적 재조직 속에서 모색되어야 하며 정치 제도의 개혁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루동의 이러한 주장은 리용 노동자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리용 노동자들의 1789년 및 1830년 혁명의 경험 에서 얻은 교훈은 정치적 혁명만으로는 권력의 원천만 바뀔 뿐이라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해결할 문제는 새로운 영역에서 제기되 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즉 확실한 혁명은 정치적 봉기나 유산계급과의 공모가 아니라, 생활조건의 향상을 위한 조직적 행위로서 생산자들 자신이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꾸닌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노동자들은 부르조아지와 부르조아 사회주의자들의 유혹의 소리에 홀려 탈선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경제해 방이라는 이 중대한 문제에 자신들의 노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경제해방은 다른 모든 해방의 원천이어야 한다. 인민에게 주된 문 제는 그들의 경제적 해방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해방을 야기하며, 그 뒤를 이어 사상적, 도덕적 해방을 야기한다.
여기에서 노동자주의의 특징인 비정치성(apolitisme)이 드러난다. 이러한 입장은 리용 지역을 비롯한 프랑스 숙련 노동자들로부 터 프루동과 바꾸닌을 거쳐 19세기 말 생디깔리슴의 노선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Kiegel은 생디깔리슴 운동 속으로 프루동 사상이 스며들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사상적 계보는 그를 스승으로 삼는 다른 사상가들의 매개 역할을 통해 계승되었고 그 대표적인 예로 바꾸닌을 거명하였다.
또한 리용 상조회의 창립규약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토론을 금지시켰다. 아울러 리용 상조회의 역사는 다양한 의견에 대한 관용 을 보여주면서도 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요소가 프루동 사상과 그 지지세력의 주장을 통 하여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 정신과 바꾸닌 사상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 점은 바꾸닌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서 극명하게 드러 난다.
인터내셔널의 창립자들은 ... 그 강령에서 모든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처음부터 배제함으로써 매우 현명 하게 행동하였다. 물론 그들 자신에게 정치적 견해나 명쾌한 반종교적 견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령 속에서 이에 대한 표명을 자제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목표가 문명세계의 모든 노동 대중을 하나의 공동 행위 속에 규합하는 것이 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미몽 속에 있건 간에 이와 상관없이 스스로 진지한 노동자, 즉 지속적으 로 착취당하고 고통받아온 사람들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노동자들이 동의하고 또한 동의해야 하는 하나의 공통 기반, 간명 한 일련의 원리를 반드시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후일 바꾸닌이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제시한 혁명 노선에 다시 나타났다. 물론 바꾸닌 자신은 철두철미한 무신 론자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민들로 하여금 종교 문제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인민의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교회는 "일종의 하늘나라 선술집(rod nebesnogo kabaka)"인 것이었다. 교회에서 인민은 선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잠시만이라도 굶주림과 박해와 굴욕을 잊어 버리며, 한쪽에서는 신앙으로써 또 다른 쪽 에서는 술로써 자신들의 일상적 고난의 기억을 진정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의 종교성은 소위 자유사상가들의 추 상적이고 공론적인 선전에 의해 일소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사회 혁명에 의해 일소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여타의 모든 문제 들보다도 그 해결에 그들의 해방이 가장 크게 달려 있는 중대한 문제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그들이 처한 바로 그 상황, 그들의 존재 전체에 의해서 제시된다. 그것은 경제적이며 역설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다. 그것은 사회 혁명이라는 의미에서 경제적이며, 국가 파괴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이었던 것이다.
프루동과 바꾸닌은 모두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을 중시하였다. 두 사람 모두 대중의 각성을 위하여 소수 사상가나 선전 조직 이 개입하는 불가피한 경우를 인정했지만 그로부터 어떠한 권위도 대중에게 강제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프루동이 1848년 혁명 기에 되풀이하여 주장하였듯이 아나키즘 사회는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그리고 "대중 주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바꾸닌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혁명 주체의 문제에서 표출된 노동자주의는 한편으로 국가사회주의 내지는 권위적 사회주의의 제경향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권위적 사회주의자들은 마치 후견권을 갖고 노동을 조직화하려는 허세를 부리기 때문이었다. 즉 생산자들을 새로운 외적 속박에 종속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관리업무는 노동자에게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과 기업가에 맡겨지는 것이 다. 이렇게 이해된 이성이나 과학은 새로운 전제정을 수립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 속에 뿌리를 두지 않아서 이들을 이해하지 못 하는 지식인들, 특히 유토피아 사상가들이 프루동으로부터 경멸받은 것도 그들의 제안에 통제와 권위에 대한 찬양의 요소가 있었 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프루동과 여타의 사회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규제는 1848년 이전에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공통된 열망이었다. 까베 , 루이 블랑, 푸리에주의자, 생시몽주의자는 하나같이 미래에 대하여 교조적 이론을 내세우거나 조직화하려 하였다. ... 그러나 여기에 프루동이 나타난다. 그는 농민의 아들이다. 이러한 사실로 해서,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는 이러한 모든 교조적, 부르조아 적 사회주의자들보다 백배나 더 혁명적이었다. ... 이 모든 국가사회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그는 권위에 자유를 대립시키면서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대담하게 선언하였던 것이다.
프루동은 이성이란 "초월적 지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집단적 이성"을 실현하는 생산자들 자신 의 만남 속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그대로 본받은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토록 많은 어설픈 시도에다 아직도 자기들의 노력을 더하는 척하는 모든 박 사들과 인류의 선생들의 심오한 지성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인민 대중의 본능적 열망과 진정한 욕구 속에 훨씬 더 많은 실천적 이성과 정신이 있다.
여기에서 노동자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인 지식인 불신이 나타나는데 이는 또 다른 특징인 비정치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노 동 계급은 궁극적으로 국가 체제를 인정하는 정당 활동, 선거 참여, 정부 참여를 배격해야 하는데 특히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이러한 활동을 노동 계급에 권고하였기 때문에 불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프루동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란 노동에 대한 착취 계급의 지배 도구이며, 노동 계급에게는 그들의 주체적 삶과는 양립될 수 없 는 대표적인 소외 현상이었다. 우선 "정치체제는 예나 지금이나 경제조직의 반영"이라는 것이 프루동의 지론이었다. 재산의 원리는 그 자체가 권위의 원리로서 가진 자에 대한 못 가진 자의 예속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원리가 전반적으로 발전되는 것은 자본주의 아래서다. 재산의 집중과 이로부터 야기되는 노자 대립은 노동자들에 대항하는 유산가들의 동맹과 점증하는 계급 불평등을 가져오며 또한 그로부터 비롯되는 강제적인 물리력의 법제화를 초래한다. 즉 자본주의의 혼란 상태는 사회적 갈등을 억누르는 강제를 필요로 한다. 특히 루이 필립 통치 하의 국가는 노동자들에게 적대하는 부르조아 동맹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 국가의 전제정은 경제, 사회적 기반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문제는 권력과 독점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는 바꾸닌의 국가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꾸닌은 국가를 "모든 경제적, 사회적 노예화의 정치적 이 유" 또는 "대중에 대한 유산 계급의 조직된 권위와 지배와 힘"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또한 국가 파괴에 관한 저 서의 집필을 구상하면서 바꾸닌은 무엇보다도 프루동의 저작을 참조하고 있다고 동료인 게르샬과 오가료프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밝힌 바 있다. 바꾸닌은 자신의 주저인 <<국가주의와 아나키>>(Gosudarstvennost' i anarkhiia)에서 지배 계급의 도 구로서의 국가의 착취적, 폭력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최근의 자본주의 생산과 금융 투기는, 그 자신의 최대 발전과 완벽한 발전을 위해, 이러한 거대한 국가적 중앙집권화를 요구한다. 오직 이것만이 수백만의 근로 인민 대중을 착취할 수 있다.
인민의 욕망과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소유 계급 및 지배 계급으로서는 결정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남게 되는 유 일한 방도는 국가적 폭력, 한마디로 국가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폭력을 지니며 또한 폭력을 의미하며 폭력으로써 지배하기 때문 이다.
그러면 바꾸닌과 프루동의 국가관에서 어떻게 연맹주의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는가? 프루동에 따르면 국가의 필연적 운동이란 흡수 운동 즉, 모든 형태의 자치, 자율에 대한 파괴 운동이다. 이러한 "국가의 속성은 개인적, 협동적, 꼬뮌적, 사회적 주 도권을 희생시켜서 끊임없이 확대된다." 국가는 자율적 노동과 자유를 부단히 노리는 "함정"에 비유된다. 따라서 국가는 철폐되어야 하고 정치는 종식되어야 하며, 각 생산자 및 생산집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연맹주의 원리에 따라 사회는 조직되어야 한다.
바꾸닌의 지적대로, "개인적, 집합적 자유와 자유로운 결사의 자발적 활동에 기초한 그(프루동)의 사회주의는 ... 정치를 사회의 경제적, 사상적, 도덕적 이해관계 밑에 두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연맹주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프루동의 연맹주의는 직종별 노동조직과 각 지역단위 자치체를 근간으로 한 사회 조직 원리이다(Vincent는 이것을 직종별 연맹주의와 지역별 연맹주의의 결합이라고 본다).
또한 바꾸닌이 용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민주주의 형태도 생산자들의 자치정부에다 국민국가를 지역 자치 단위로 분할하는 형식 을 가미한 것이다. 따라서 Gu?rin은 바꾸닌이 프루동의 연맹주의 사상을 단지 발전시키고 보강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Pyziur에 따르면, 바꾸닌은 프루동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선 1848년 3월 혁명기에 이미 슬라브 민족 해방운동과 관련하여 지역별 연맹주의에 대해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꾸닌은 프루동 연맹주의의 어느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는가? 그것은 프루동의 직종별 연맹주의였다. 사실상 이것은 프루동의 초기 주장에 속한다. 프루동은 1850-60년대에 지역별 연맹주의를 주장했으나 이에 앞서 1848년에 직종별 연맹주의를 제 시한 바 있다. 직종별 연대주의는 바꾸닌의 표현에 의하면 "경제적 연맹에 따른 사회의 조직화" 내지는 "노동 조 직에 대한 연맹주의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적으로 조직된 작업장들과 산업체들이 전국적 차원에서 "직종별, 산업별로 연맹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 연맹은 각 집단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각 집단 간의 관계는 계약에 근거한 것으로 상호 협력의 요구에 부응하 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 행위로써 각 생산집단은 일정 기간 자신들의 자유를 일부 유보하는 듯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각 집단들은 전체적으로 총회를 조직하여 공공 토목공사, 공중 보건, 사법제도 운영 등 전국적 차원의 문제 를 다룬다. 이러한 가운데 각 생산집단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율성과 자유를 유지하면서 연맹주의라는 모델 속에서 국가에 의한 궁극적 흡수에 맞서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은 바꾸닌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훗날 생디깔리슴이 지향하는 사회조직론의 주요 내용을 이루게 된다.
B.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
두번째로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인민의 정서에서 오는 영향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i) 인민 예찬, ii) 권력 국가의 배격, iii) 집단적 소유 내지는 공유제에 대한 신봉, iv) 농민 봉기의 심성과 전통 등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서 i)이 순수하게 인텔리겐챠의 가치관과 관련된 것이라면 iv)은 거의 전적으로 인민의 정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ii)와 iii)은 양쪽에 공통된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바꾸닌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일원으로서 공유한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과 아울러 바꾸닌은 어떠한 점에서 동시대의 인텔리겐챠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 성향을 지녔는지 하는 것이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
인민 예찬은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이상으로서 그들의 독특한 사회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가 비참하게 살아 가는 인민의 노동과 희생의 대가로 이룩된 것임을 자각하는 무거운 책임 의식 같은 것이었다. 바꾸닌이 청장년기를 보낸 1840년대의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은 대체로 귀족 출신이었는데, Berdyaev에 따르면 이 시대에 인텔리겐챠나 토지귀족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것은 인민에 대한 죄의식이며 의무감을 의미하였따. 즉, '참회하는 귀족'은 자신들의 기생적 성격을 자각하고 반성하는 데서 비롯된 독특한 러시아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Berdyaev는 농노제의 불의에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뇌하였다고 최초로 표명한 라지시체프의 글 <뻬쩨르부르그에서 모스끄바로의 여행(1790)>에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탄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바꾸닌은 유럽에서 혁명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러시아로 압송되어 수형 생활을 하며 짜르 니꼴라이 1세에게 제출해야 했던 <참회록>(Ispoved')에서 인텔리겐챠로서의 고뇌와 인민에 대한 신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저는 이른바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평범한 인민, 선량한 러시아인, 모든 이로부터 억압받는 농부가 현재 처한 불행한 상황에 가장 놀랐으며 괴로와하였습니다. 저는 다른 어떠한 계급보다도 더 크게, 그리고 범용하고 방탕한 러시아 귀족 계급보다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그들에게 공감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갱생의 모든 희망을, 러시아의 위대한 미래에 대한 모든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저는 신선함, 위대한 영혼, 외국의 부패함에 감염되지 않은 빛나는 지혜, 그리고 러시아의 힘을 보았습니다.
인텔리겐챠에게는 인민이 핍박받는 속에서도 보여 주는 생명력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바꾸닌은 1845년 빠리의 급진적인 언론지인 <라 레포름 La R?forme>지에 게재한 공개 서한에서, 러시아 인민이 "결코 부패되지 않았으며, 단지 불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들의 "반쯤 야만적인 성격" 속에는 "무엇인가 활력적이고도 원대한 것"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인텔리겐챠는 인민 속에 진정한 사람의 비밀, 교육받은 지배계급에게는 은폐된 비밀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었다. 슬라브주의자, 도스또예프스끼, 똘스또이는 인민 속에 종교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한편 비종교적이거나 종종 반종교적인 게르샬, 바꾸닌 등은 인민 속에 사회적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바꾸닌에 따르면, 러시아 인민은 혹독한 노예제와 온갖 충격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민주적인 본능과 자세"를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인민에 대한 절대적 신봉, 진리와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인민에 대한 예찬이 바로 러시아 인민주의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민이 의미하는 것은 동포에 대한 착취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근로 인민, 특히 노동계급과 농민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종교적이고 혁명적인 인민주의자 뿐만 아니라, 슬라브주의자와 도스또예프스끼 및 똘스또이 같은 종교적 인민주의자까지도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프루동이 프랑스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이라고 도덕적으로 이상화한 점과 흡사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한 바꾸닌으로서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의 노동자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즉 러시아 인민주의는 인민의 대다수인 '농민에 관한 이념'이지 농민에 의해 형성된 이념이 아니며, 또한 농민 속에 뿌리를 내린 이념도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서 Hughes는, 슬라브주의자들의 농노제에 대한 반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전기 작가들이 언급하는 지주인 슬라브주의자들과 농노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완전히 감상적 허구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는 바꾸닌이 여느 인텔리겐챠와 크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Carr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다. 바꾸닌은 1862년 런던에서 <인민의 대의: 로마노프, 뿌가쵸프 또는 뻬스샹리?>(Narod- noe delo: Romanov, Pugachev ili Pestel?)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 농노 출신의 망명객 마르쨔노프의 영향을 받아 쓰여진 것이다. 바꾸닌 같은 지식인이 어떻게 무식한 농민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그의 동료인 게르샬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게르샬이 러시아 인민을 이상화하였지만, 자신의 사상을 한 농노로부터 빌려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상화한 마르크스가 한 직공으로부터 자신의 사상을 차용하는 것과 같았다. 오직 계급 차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았던 바꾸닌만이 농노 출신의 마르쨔노프와 스스럼 없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이 자신을 인민에 일치시키고 인민 정서에 될수록 공감하려는 자세는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 속에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프루동처럼 지식인의 후견과 권위를 부정하는 노동자주의에 심정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프루동의 노동자주의가 반국가주의로 귀결되듯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인민예찬은 권력국가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났다. 슬라브주의자들, 좌파 인민주의자들, 인텔리겐챠에게 국가는 인민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인민의 몸 속에 붙어 있는 기생충이었다. 이들에게 광대한 국가나 제국은 인민에 대한 배신이며 러시아적 이념의 왜곡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아나키즘적 요소는 19세기 러시아의 여러 사회사조 속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 인텔리겐챠 중에서 국가를 좋아한 사람은 거의 없으며 국가를 스스로의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성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레온찌예프마저도 권력국가에 대한 러시아적 이론은 오히려 따따르-독일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러시아 인민이나 슬라브인의 세계는 본래 무정부적인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진단은 바꾸닌도 이미 내린 바 있다. 그는 "따따르-독일적 멍에와 슬라브의 위대한 자유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며, "슬라브인들이 스스로 발전하도록 방치되었더라면 결코 국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바꾸닌은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은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전체 러시아 제국의 형성의 역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여기에 참여했던 것은 따따르의 압제, 비잔틴의 축복[종교], 독일적인 행정-군사-경찰의 계몽주의 등이다. 불쌍한 대러시아 인민과 그 다음에 제국에 합병된 소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인민들이 제국 창건에 단지 그 배후에서 참여했었다. 따라서 슬라브인들이 결코 스스로 앞장서서 그들 자신의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슬라브인들은 주로 평화적인 농경 종족이다. 이들은 게르만 제종족이 고취시키는 호전적인 정신에 생소하며, 따라서 일찌기 게르만족들에게서 나타나는 국가주의적 열망에도 생소하였던 것이다. ... 공동체들 사이에 영속적인 정치적 유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외족의 침입 같은 공통된 위험이 닥쳐올 때는 임시적인 방위 동맹이 결성되었다. 위험이 지나가면 이내 정치적 통합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요컨대 슬라브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바꾸닌에게 있어 국가란 무엇보다도 독일적 - 나중에는 마르크스주의까지 포함한 - 영향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슬라브인의 정서와는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들은 어느 정도 과장된 것으로 러시아의 역사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인은 한편으로 전제국가의 형성을 온순하게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인의 심성에는 대제국 형성에 대한 수동적 동의가 내재되어 있었다. 바꾸닌도 이 점을 시인하였는데, 특히 뾰뜨르 대제 시대에 "인민의 본능"은 "위대한 미래에 대한 예감으로 자극받고 있어서 규율과 통일과 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로부터 도피하고 대항하려는 성향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바꾸닌은 뾰뜨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1세까지의 시대를 인민에게 "강제된 지속적인 폭력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인민은 이에 예속"되어 "인민 스스로 현명한 척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적 본성은 이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Berdyaev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그들'이라고 하면 국가, 제국, 권위를 말했으며, '우리'라고 하면 인텔리겐챠, 사회, 인민, 해방운동을 의미하였다. 즉 국가는 '그들'이었으며 '타인들'이었다. 러시아인이 말하는 '우리'는 모든 국가로부터 낯선 별개의 차원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의 이러한 부정적 국가관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배태된 것인가? 이러한 국가관 형성의 주요 계기는 1660년대에 시작된 교회 분열과 1700년대부터 본격화된 뾰뜨르 대제의 개혁이었다. 정교회 분리파 내지는 정통신앙 고수파(staroobriadtsy)에 아나키즘 성향이 존재하였다. 1660년대 교회분열의 근저에는 '제3의 로마'로서의 러시아 제국이 진정한 정교의 나라인가에 대한 의혹이 깔려 있다. 본래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신앙만이 정교이며 참된 신앙이었다. 참된 신앙은 참된 국가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야말로 참된 국가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참된 제국은 지상에 이미 그림자도 없었다. 1660년대부터 러시아에는 적그리스도의 지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참된 제국은 공간적으로는 지하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었고, 시간적으로는 묵시론적으로 채색된 미래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교제국은 지하로 들어갔다. 참된 왕국은 어떤 호수의 밑바닥에서 발견될 도시 '끼쩨쉬'(Kitezh)였던 것이다.
분리파의 입장에서, 국가로부터의 이탈은 국가에는 진리도 정의도 없다는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국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였다. 따라서 국가는 신국, 그리스도의 나라에 반역하여 세운 케사르의 국가였다. 이러한 관점이 19세기 인텔리겐챠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 똘스또이, 호먀꼬프는 모두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바꾸닌도 이 문제에 대하여 대동소이한 견해를 지녔다. 그는 분리 종파(religioznye sekty)의 반국가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땅을 갈거나 수렵, 어로에 종사하는 러시아 인민, 농민, 이른바 서민(chernyi narod)은 200여개의 분리 종파로 갈라져 있는데 모두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의 질서를 거부하고 짜르의 권력을 적그리스도의 권력으로 간주하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모스끄바 정부가 이미 1660년대에 교회 분열로 인민의 의식 속에 종교적 회의를 낳게 하였다면, 이 회의는 뾰뜨르 대제 시대에 와서 더욱 굳어졌다. 뾰뜨르는 적그리스도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정교의 정신 토양에서 형성된 문화 유형을 신봉하는 슬라브파의 입장에서 뾰뜨르의 서구화 개혁은 러시아에 대한 배반이었따. 뾰뜨르 대제의 개혁으로 유럽화한 일부 러시아인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식민주의자'가 되었으며 반면에 인텔리겐챠는 이후 더욱 소외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제국에 대한 모스끄바의 오랜 원한은 슬라브주의자인 꼰스딴찐 악사꼬프를 통해서 표출되었다. 그는 뾰뜨르 대제의 개혁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인민 공동체와 도덕의 이름으로 국가주의와 법치주의를 부정하였다. 악사꼬프는, 마지못해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수를 줄임으로써 이른바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취지에서 기묘하게도 독재군주정을 옹호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꾸닌이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되도록 자극을 준 최초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1867년의 한 서신에서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미 그 당시[1830년대 말]에도 꼰스딴찐 세르게비치[악사꼬프]와 그 친우들은 뻬쩨르부르그 국가와 국가 일반에 대한 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 속에서 그는 이미 우리를 예견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슬라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바꾸닌은 뾰뜨르를 "러시아 인민의 대박해자"로 규정하고 뾰뜨르의 개혁과 그가 건설한 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러시아 국가는 인민에게 "소외감"을 더욱 심화시켰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인민에게 비인간적 외래 문명이 강요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정복국가를 지향하면서 "인민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정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인민에게 강제된 유럽 문명은 주로 "독일"의 것이었는데, 바꾸닌에 따르면, "그 당시 독일에서는 윤리적이고 인간적인 법들에 무관심"하였으며 자국 "인민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이 그들을 팔아 넘기고 감정도 없는 물건인 양 흥정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한 뾰뜨르는 러시아를 "외국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기계"로 만들었으며, 그것이 "대외적으로 한층 확대될수록 대내적으로는 자국 인민에게 한층 생소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정복 지향적인 기계적 국가는 자국 인민의 "삶의 근본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정부에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양의 병사와 돈을 제공하는 기계" 즉 "정복 기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자국 인민을 피정복민처럼 냉대하며, 대외적으로 그렇듯이 대내적으로도 억압적인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의 국경이 한층 확장될수록 돈과 병사가 한층 더 요구되었으며, 그럴수록 정부는 한층 더 억압적으로 되었던 것"것이다. 1840년대 말에 행해진 러시아 국가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후일 바꾸닌의 아나키즘의 기저를 이루는 반국가주의와 특히 1870년대 독일 군국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슬라브주의자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한 사람으로서 바꾸닌이 보여준 인민 예찬과 권력국가 배격의 논리에는 프루동의 노동자주의 및 반국가주의와 쉽사리 결합될 수 있는 친화성이 있었다. 그러나 바꾸닌은 이상적인 재산 소유 형태에 대하여 프루동과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였다. 바꾸닌은 자타가 인정하는 프루동의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산업 운용에 있어서 집산주의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옛 스승과는 달랐다. 그는 노동과 과학의 전분야에 걸친 협동적인 사회조직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서 "모든 자본과 노동 용구가 토지까지 포함해서 집단적 소유의 이름으로 노동에 귀속"되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에 비해 프루동은 생산도구를 개별적으로 소유한 장인들의 협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Lichtheim에 따르면, 그 이유는 바꾸닌이 게르샬과 공유하였던 촌라 공동체에 대한 애정 탓에 집합체도 존립의 권리를 갖는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Lichtheim의 견해는 바꾸닌이 표명한 집산주의에서 그 러시아적 기원을 지적한 것이다.
인텔리겐챠에게 러시아 촌락 공동체가 갖는 의미는 서유럽의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바꾸닌은 자신의 <참회록>에서 서유럽 사회에 팽배한 이기주의를 신랄히 비판한 바 있는데 이는 니꼴라이 1세마저도 "경탄할 진실"이라는 메모를 여백에 남길 정도로 러시아인 대부분이 공감하는 문제였다. 또한 그의 동료인 게르샬은 서유럽 사회주의와 노동자들 속에서까지 부르조아 정신이 승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본 서유럽 노동자는 '부르조아 무산자'였다. 부르조아지를 움직이는 것이 '탐욕'이라면,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질시'였던 것이다. 게르샬은 이러한 세상을 구할 사람이란 러시아 농민이라고 믿었으며, 부르조아화한 유럽인에게서보다는 농노제 하의 계몽되지 못한 러시아 농민에게서 더 위대한 인격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러시아의 촌락 자치체나 경제적 후진성에서 구원을 찾았으며, 따라서 서유럽보다는 러시아에서 더 용이하게 사회주의가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었다. 게르샬은 이러한 러시아 사회주의의 개념을 발전시켜가던 1847년에 바꾸닌을 다시 빠리에서 만났다. 이러한 만남에서 바꾸닌은 서유럽주의자였던 게르샬의 사상적 변화를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슬라브주의자들도 서유럽의 부르조아 자본주의 문명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서유럽 사회의 부패 원인이 부르조아 문명과 이로 인한 사람의 통일성의 훼손에 있다고 보았다. 악사꼬프는 이와 대비하여 러시아 인민 공동체에서 이기주의와 독선이 배제된 개성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이른바 '합창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슬라브주의자들은 게르샬 유형의 인민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특유의 유기적인 경제 생활구조로 파악하였던 촌락 공동체의 옹호자였다. 바꾸닌의 경우, 비록 공동체의 가부장제가 지닌 권위주의에는 비판적이었지만, 그 역시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였다. 그에 따르면, 슬라브인들은 안으로는 "촌로들이 주도하되 선출제에 입각한 가부장제 관습에 따라 다스려지는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밖으로는 "국가에 대한 단호한 대립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의 거의 절대적인 자치" 속에서 "인간적인 형제애의 관념"을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구현하면서 "모두 평등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촌락공동체에서 바꾸닌이 무엇보다도 주목했던 것은 바로 토지 공유제(obshchinnyi uklad)였다. 토지는 공동체에 속한 것이며, 개개 농민은 단지 그에 대한 용익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용익권도 근원적으로는 토지를 개인에게 한시적으로 분배하는 공동체에 속한 것이다. 토지 재분배는 20-25년마다 실시된다. 상속권은 동산에서만 존재하며 토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꾸닌은 슬라브인들이 공동체 속에서 "모두 동일하게 공유지를 활용하여 사는 가운데 귀족계급을 갖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토지는 그것을 땀으로 적시고 자기 손의 노동으로 비옥하게 하는 인민에 속한다는 전인민적 확신"이야말로 러시아 인민의 이상의 기반을 이룬다고 바꾸닌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후일 "땅은 그 모든 부대 자원과 아울러 모든 사람의 소유이나, 그것을 경작할 사람들에 의해서만 점유"되어야 한다는 혁명 강령 속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농민이 짜르, 국가나 영주의 이름으로 경작하는 땅이 본래는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마치 농민이 모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되며" 아울러 "공유제를 파괴하는 것"은 제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지주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은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바꾸닌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텔리겐챠에게 널리 퍼져 있던 것이었다. 슬라브주의자로서 대지주였던 먀꼬프도 유일한 토지 소유주인 전체 인민이 자신에게 토지의 부를 양도하고 토지 점유권을 위탁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조건에서 사유재산의 개념은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촌락공동체를 예찬했던 러시아인에게 일반적으로 로마법적인 재산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즉 서유럽인들이 사유재산에 대하여 갖는 절대적 개념은 부정되었따. 모스끄바 시대의 러시아에서는 짜르가 명목상 유일한 토지 소유주였기 때문에 토지 소유상의 범죄를 몰랐다고 전해진다. 재산이나 절도에 관한 러시아 법률의 판결은 사회제도로서의 재산에 대한 태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태도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러시아 정신에서 중요한 것은 재산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부르조아 정신과 투쟁하고 부르조아 사회의 수용을 거부하게 되는 요소가 있었다. Berdyaev가 주장하였듯이, 바로 이러한 러시아인의 부정적인 재산관념 때문에, 사회주의 - 이 말을 교조적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할 경우 - 는 러시아적 특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 당시 러시아인의 지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루동은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재산만을 거부하였을 뿐, 생산자들이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도구를 소유하는 사회에 대한 비젼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는 소농이나 장인의 경제적 독립성을 옹호하였을 뿐 아니라 예찬하였다. 특히 그는 국가 권력의 위협에 대한 견제력으로서의 사유재산을 지지하였다. 프루동이 배격한 것은, 사용료 징수권(프루동의 표현으로는 droit d'aubaine)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재산이었다. 이러한 재산권 행사로 인한 소득은 자보에 대한 이윤, 토지에 대한 지대, 대부에 대한 이자 등의 불로소득으로서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동이 원했던 것은,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재산 증식으로부터 사유재산제를 정화시키는 것이지, 재산을 집단적으로 소유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즉 가가 요구한 것은 불의의 폐지였지, 불평등의 폐지가 아니었다. 프루동은 이렇게 말했다. "재산은 공동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물어뜯는 방식으로 광견병을 치유할 수는 없다." 요컨대 프루동은 집산주의자가 아니었다.
바꾸닌은 프루동의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부분적인 원인은 Lichtheim의 주장대로, 바꾸닌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알게 된 데에 있었다. 독일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본론> 제1권이 발간되기 전에 죽었던 프루동과는 달리, 바꾸닌은 마르크스의 중요성과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그럼으로써 바꾸닌은 프루동의 이름과 결부된 반자본주의 이론에 어느 정도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슬며시 가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일 마르크스주의자인 쁠레하노프가 바꾸닌을 가리켜 "가증스러운 공산주의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까지 뒤섞인 프루동주의자"라고 비난했던 사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꾸닌은 "노동 도구의 집단적 소유화(l'appropriation collective)"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창조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유하는 목표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Lichtheim이 앞서 지적한대로 바꾸닌에게서 나타나는 러시아인이 전통적 가치관 속에서 규명되어야 한다.
바꾸닌은 1849년 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된 <러시아 상황>(Russische Zu-st?nde)이라는 소책자에서 토지공유제에 대한 신념이 러시아 인민의 특징임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러시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농노제, 즉 개인의 자유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토지에 대한 권리에 관해서이다. 농민들은 이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 주인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nasha) 땅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사회혁명으로서의 러시아 혁명의 성격은 미리부터 결정되어 있으며, 또한 인민들의 전반적 성격 속에, 그리고 그 공유제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꾸닌의 이러한 가치관에서, 훗날 프루동의 '시대에 뒤진 개인주의적 유산'을 '반권위주의적 집산주의'로 대체할 수 있었던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꾸닌은 혁명 전략에서도 러시아 농민 봉기(bunt)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비폭력적 수단을 고수하였던 프루동과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었다. 바꾸닌은 근로 인민에게 숨겨진 진리와 계몽되지 못한 대중을 신봉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으뜸가는 반란 민중으로 간주한 러시아 인민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인민주의자였다. 이 점에서 바꾸닌은 게르샬과도 달랐다. 게르샬이 느낀 농민층의 매력은 주로 그들의 공동체 제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게르샬도 한때 혁명적 파괴에 매력을 느낀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과적인 것이었다. 반면에 바꾸닌은 집단 폭력과 방화의 전통을 지닌 러시아 농민층에 점점 더 이끌리게 되었다.
바꾸닌은 스쩨빤 라진과 뿌가쵸프를 자신의 정신적 선구로 인정하였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러시아인으로서 이들에 대한 기억은 인민들 사이에 간직되어 있었다. 러시아인은 스스로를 대제국 건설의 도구와 재료로 순순히 바치는 심성도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봉기, 소요, 아나키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인민 속에 내재된 탈법적인 라진-뿌가쵸프적 요소를 이상화하였다. 인민의 원초적 힘을 신뢰하였던 바꾸닌은 그저 인민을 반란에 참여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나 뜨까체프와도 달랐다.
바꾸닌의 이러한 인식에는 일종의 러시아-슬라브적 메시아 정신이 스며 있다. 그는 빛은 동방에서 온다고 보았다. 전세계를 휩쓸 대화재가 러시아에서 인민에 의해 일어나, 서구 부르조아 세계의 암흑을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가 여기에 서려 있다. 1842년 바꾸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끝없이 넓고 눈덮인 제국, 아마도 위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나라인 러시아에서조차 뇌우를 예고하는 검은 구름들이 모여들고 있다! 오, 대기는 불안하며 폭풍을 잉태하고 있도다!
바꾸닌은 구세계의 파괴를 원하였다. 또한 구세계의 폐허와 잿더미 속에 신세계가 자연스럽게 대두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그 누구도 최소한 신질서에 대한 막연한 생각도 없이 파괴를 목표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미래상이 생생하게 잡힐수록 파괴력은 가일층 강해지는 것이다.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그의 경구는 이러한 정서를 집약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자치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국가는 깨끗이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이러한 영감의 원천이 바로 농민 봉기의 전통이었다. 바꾸닌은 농민 봉기가 지닌 파괴력의 원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본성상 자연발생적이며 혼란스러우며 무자비한 인민 봉기는 항상 재산에 대한 광범위한 파괴를 전제한다. 노동 대중은 이러한 희생의 태세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웅적 위업을 가능케 하는,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목표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거칠고 야만스러운 힘을 이들이 형성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재산을 별로 또는 전혀 갖고 있지 않기에 그로 인해 부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어의 편법이나 승리를 위해 필요할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촌락이나 도시에 대한 파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재산이 인민에 속해 있지 않는 만큼, 그들은 매우 자주 파괴에 대한 적극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에 대한 Lichtheim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바꾸닌은 하나의 추상물로서의 국가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건과 재료, 즉 건물과 도시, 문화 유산까지 실제로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러시아 농민층이 자신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문명에 대하여 어렴풋이 느낀 것을 바꾸닌이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바꾸닌은 러시아 인민이 지닌 봉기의 심성과 정서로부터 억압적 권위를 분쇄하는 동력을 찾고자 하였으며 헤겔과 피히테에서 그 철학적 표현을 찾았던 것이다.
C. 헤겔의 변증법과 피히테의 주의론
바꾸닌은 헤겔과 피히테를 나름대로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혁명적이고 실천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그는 헤겔 변증법 속에서 부단히 새로운 상태를 창출하는 원동력으로서의 부정에 주목하여 이를 자신의 변혁 논리로 삼았다. 바꾸닌은 이러한 논리를 연장하여 스스로 급진적 이론가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는 실천가로 나선 것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불굴의 의지와 신념이었다. 바꾸닌은 헤겔을 수용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피히테의 주의론을 통하여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바꾸닌에 있어서 헤겔 철학 수용의 새로운 이정표가 된 것은 1842년에 쥘 엘리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글 <독일에서의 반동>(Die Reaktion in Deutchland Ein Fragment von einem Franzosen)이었다. 바꾸닌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Carr이지만 이 글에 대해서는, 그의 글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하고 정치한' 글, '대중적인 글 치고는, 존엄한 헤겔을 혁명의 철학자로 일변시켜 놓은 걸작' 또는 '진보 진영 내에서 유럽적 명성을 가져다 준' 글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 글은 헤겔주의에 대한 급진좌파적 해석을 최초로 시도한 대표적 예에 속한다. 이 글에 이론적으로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은 부정의 원리와 행동 철학의 문제였다.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바꾸닌이 생각하였던 헤겔의 공헌은 적대 요소의 대립, 투쟁이라는 개념과 부정의 절대적인 정당성에 대한 인정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떻게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삶의 내재적 조건으로서 자신에 대한 부정을 자기 외부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지니는 것을 통해서만 살아 있게 되는가 하는 점과, 만일 그것(모든 살아 있는 존재)이 단지 긍정적일 뿐이며 부정을 자기 외부에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정태적이며 죽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였던 것에 헤겔의 커다란 공로가 있지 않은가? ... 살아있는 하나의 유기체는 자기 내부에 자신의 죽음의 씨앗을 지님으로써만 살아 있게 된다.
그러나, Walicki에 따르면, 바꾸닌은 대립 요소가 화해, 조정되는 순간을 배격함으로써 부정에 대한 해석에서 헤겔과 결별하였다. 즉 그는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각 단계별 결과로서 나타나는 지양(Aufhebung)을 부정과 보전의 공존상태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선행 단계(과거)에 대한 완전 파괴로 보았다는 점에서 헤겔과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모순 대립의 본질은 균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우세에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긍정에 대한 결정 요소로서 오직 부정만이 그 자체 내에 모순의 총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부정만이 절대적인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귀결로서 바꾸닌은 미래의 창조가 기존 현실의 파괴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그의 경구는 "모든 삶의 영원한 창조적 원천"으로서 파괴를 수행하는 영원한 정신에 대한 신념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바꾸닌은 이러한 관점에서 적대 요소(세력) 간의 화해를 추구하는 몇몇 유형의 절충적 타협론자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반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에서 양자의 타협 가능성을 믿는 절충론자들에게 대오각성을 촉구하였다. 2x2=4를 주장하는 좌파와 2x2=6을 주장하는 반동 세력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절충론자들의 입장은 마치 2x2=5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이다. 또한 바꾸닌은 전쟁에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모두를 편들다가 결국 양쪽으로부터 처형받은 폴란드계 유태인의 운명을 교훈으로 제시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바꾸닌으로 하여금 비타협적이고 혁명적인 인텔리겐챠로 일관하게 만든 헤겔 사상의 요소인 것이다.
바꾸닌이 수용한 헤겔 사상의 핵심 요소는 부정의 원리로서, 이 원리는 역설적으로 헤겔 사상을 포함한 철학 전반에 적용되었다. 그것은 행동을 위해 사변적 철학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독일에서의 반동>이 지닌 중대한 함의는 행동 철학의 탄생이다. 그것은, Carr의 규정대로, 바꾸닌에 있어서 '헤겔 시대의 절정'이자 동시에 '헤겔과의 작별'이기도 하였다. 이 글을 발표한 수년 후, 바꾸닌은 한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론가이기를 그쳤다. 나는 마침내 내 안에 자리 잡았던 형이상학과 철학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실천의 세계로, 현실적 행위와 현실적 삶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꾸닌이 <독일에서의 반동>을 발표하며 사용한 '쥘 엘뤼자르(Jules Elysard)'라는 프랑스식 필명은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인들의 관점에서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행동과 혁명의 나라였기 대문이다. 이 시기에는 청년 마르크스를 포함한 사상가들의 독일적 요소[철학]와 프랑스적 요소[행동, 정치]의 결합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바꾸닌에게서 그의 동료인 아르놀트 루게가 기대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그는 바꾸닌을 가르쳐 "독일 철학을 이해하고 교정하는 프랑스인"이라고 소개하였으며, 바꾸닌의 자극으로 독일인들이 "이론 영역에서의 자만심"을 떨쳐 버리게 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바꾸닌 자신은 철학과 행동의 결합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의 관점에서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부정 뿐이었고, 미래는 행동가에 속한 것이었다. 후일 그 자신의 지적에 따르면, 신의 세계 전체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그 자체까지도 부정하게 되는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 혁명적 헤겔학파의 거두 포이어바흐마저도 결국은 형이상학자에 불과하였으며 뷔흐너 같은 그의 계승자들도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사유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서의 반동>을 집필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바꾸닌은 라므네의 <인민의 정치>(Politique du peuple)와 로렌츠 폰 쉬타인의 <프랑스 현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Der Sozialismus und Kommunismus der heutigen Frankreichs, 1841)를 읽었다. 전자에서 독일 형이상학의 존재가 아예 무시된 것을 보고 바꾸닌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후자에는 생시몽, 푸리에, 삐에르 르루, 프루동 사상이 소개되어 있었는데(1844년 바꾸닌이 빠리에서 프루동을 만났을 때는 이미 그의 사상을 열렬히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은 추상적인 독일 철학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바꾸닌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일관되게 기저를 형성하는 독일 철학의 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피히테의 주의론이다. 바꾸닌은 1840년 한 서신에 피히테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여기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있습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곧바로 지침없이 나아가기 위하여, 생소하고 외적인 모든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통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추상해내는 그의 능력을 나는 항상 부러워하였습니다. ... 내게도 그러한 능력이 있지만, 아직은 독자적으로 그리고 외적인 모든 것에 도전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정치적 급진주의로 전화될 수 있는 주의론적 성향을 예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꾸닌은 피히테 철학의 주의론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던 것인가?
우선 피히테 철학의 주의론적 성격은 자유의 문제가 의지와 실천의 문제로 직결되는 데서 강하게 드러난다. 피히테에 있어서 자유는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제가 된다. 즉 자유란 결코 당장 현실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마땅히 존재해야 하며 달성해야 할 최고의 과제이다. 이 과제를 실천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의미이며 목적이다.
이러한 자유관은 바꾸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바꾸닌은 1836년의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절대적 자유, ...이것이 우리의 목표다. 인류와 전세계의 해방,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이러한 자유의 실현은 도덕적 의지에 의해 달성된다. 이 과정에서 주체와 객체(객관의 세계; 자연의 세계; 외적 세계; 비아)의 분열은 극복된다. 물론 후자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 체계 내에서 진정하고 근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의 완전한 자기 실현 즉, 자유의 실현을 위해 요구되는 질료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자유를 실현하고자 행위함에 있어서, 후자의 저항을 받게 되는데 이에 굴복함으로써 비롯되는 나태, 무기력, 수동성은 죄악이 된다.
이러한 피히테의 관점은 바꾸닌이 1836년에 썼던 서신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바꾸닌은 관능적인 생활을 비판하였으며, 피히테가 형식주의 도덕이라고 불렀던 바, 인간을 굴종시키고 인간 의지를 마비시키는 실제적 도덕 규범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내었다. 또한 그는 "개인적, 가족적, 민족적 이기심"의 타파를 주장하였으며, "절대적인 것에 대한 안목"을 상실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따. 아울러 바꾸닌은 자신의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과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길 위에 있다. 그 길이 슬프고 고독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가치있는 것이 될 것이다."
바꾸닌에게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피히테 철학의 주의론적 요소는 현실이라는 객관성을 강조한 헤겔 철학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었는가? Kelly의 지적에 따르면, 헤겔이 변증법을 통하여 현실 내지는 외적 세계를 자아에 대치시킨 궁극적인 목적은 자아를 좀더 확실하게 변증법 체계에 들어맞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헤겔 철학에서의 외적 세계 또는 객관의 세계는, 아무리 참신하고 독특한 성격을 지녔어도, 결국은 이전의 주관적 관념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관념에 의한 창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파라독스야말로 바꾸닌에게는 물리칠 수 없는 매력의 비밀이었다. 피히테 식으로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세계를 종속시키는 것보다, 헤겔처럼 자아로부터 엄연히 독립된 현상 세계를 인정함으로써 바꾸닌은 결과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현실에 대하여 더 커다란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즉 바꾸닌은 헤겔 철학을 통하여 Kelly의 표현대로, '피히테적인 환상'에 '객관성이라는 환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헤겔로 인하여 바꾸닌은 자신이 이미 갖추고 있었던 '거대한 자기중심주의'(colosal egocentrism)에 보다 확고한 기반을 제공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실에서 가장 제어하기 힘든 것까지도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자아의 궤도로 끌어 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 바꾸닌의 전생애를 통해 지속된 심대한 낙관주의가 형성되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내적 갈등과 분열이 이전에는 좌절의 요인이었으나 이제는 승리의 원천인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바꾸닌은 1838년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험난한 길이 내게 놓여 있다. 나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정이 클수록 투쟁이 거셀수록, 조화와 화해는 심대할 것이다.
이러한 전투적 낙관주의는, '불일치 없는 완전 조화란 없다'라든지 '삶과 행복에 대한 인간의 권리는 부정의 힘에 비례한다'라는 그의 소신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상의 고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꾸닌에 있어서 피히테에 대한 기질상의 친화성은 헤겔적 정통에 대한 요구보다 훨씬 강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바꾸닌이 헤겔을 연구하기 전인 1836년 초에 쓴 한 편지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나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외에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이 목표에 대한 나의 전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분쇄할 것이다. 인간을 희생시켜서 그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건에, 그리고 그와 관련된 ... 모든 관념에 저주가 있으라. 모든 거짓된 것은 가차없이 그리고 착오없이 파괴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진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이처럼 진지하게 바꾸닌은 낡은 세계가 분쇄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헤겔에 대한 보수적 해석에서 벗어나 그로부터 변혁의 논리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Ⅲ. '연대적 자유'
바꾸닌의 아나키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자유에 관한 것이다. Cole의 지적처럼, 그의 사상은 자유에서 시작하여 자유에서 끝났다. 또한 Carr는 바꾸닌을 가리켜 역사상 자유 정신의 가장 완벽한 구현의 일례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꾸닌 스스로가 자유에 대한 "광적인 애호가(un amant fanatique)"로 자처하였다. 그의 자유관은 그 자신의 사상적 기초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슬라브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그의 참여(1848-63)와 새로운 사회 조직의 원리로서 그가 제시한 연맹주의에 대하여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바꾸닌이 추구한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 의식에 투철한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외없이, 즉 평등하게 누리는 자유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연대적 자유(la libert? par la solidarit?)", "평등 속의 자유(la libert? dans l'?glit?)"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연대적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들의 자유가 상충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는 "전체의 자유로 인하여 제약받지 않는 각 개인의 자유(la libert? illimit?e de chacun par la libert? de tous)"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개인들의 자유가 상충되는 것임을 전제로 한 루쏘의 사회계약론적 견해를 배격하였다. 그는 "루쏘 학파나 여타의 모든 부르조아 학파들"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적 자유"는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가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있다.
바꾸닌의 저술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는 이러한 자유관이야말로 그의 아나키즘의 기반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딸리아에서 바꾸닌의 비밀결사 활동기(1863-67)에 집필된 강령들에서 나타나는 자유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바꾸닌에 대하여 비판적인 E.H. Carr는 이 기간에 조직된 비밀결사의 실체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는 바꾸닌이 기초한 몇가지 비밀 결사 강령도 그러한 조직의 허구성을 반증할만한 근거가 못된다고 본다. 그러한 조직은 오직 바꾸닌과 그의 몇몇 추종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실제로 바꾸닌은 단명했거나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직의 강령을 진지하게 구상하고 집필하였던 것이다. Lehning은 이 점을 부인하지 않지만, 조직의 실재 여부나 가동 실태 보다는 오히려 강령 집필을 통하여 바꾸닌의 아나키즘 사상이 체계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 간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강령들 중에는 1865-66년에 집필된 <혁명 교리문답>과 <인류 해방 추진 국제 비밀 결사> 등이 있다. 전자는 Gu?rin의 말대로 "바꾸닌의 아나키즘 저술 중에서 가장 안 알려진 것이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글의 초안에 해당하는 후자가 최근에야 발견되어 공개된 바 있다. 이 강령은 이딸리아에 있던 바꾸닌이 스웨덴을 잠시 방문하였던 1864년 가을에 그곳의 민주주의자인 August Sohlman에게 써 준 것으로, 그 원고가 후일 암스테르담의 국제 사회사 연구소(Internationaal Instituut voor Sociale Geschiedenis)의 문서고에서 발견되어, Mervaud에 의해 전문이 다시 발행되고 소개되기 전에는 다만 Lehning에 의해 문서고의 원고 상태로 부분 인용되었을 뿐이다.
이에 덧붙여 이딸리아를 떠난 직후 쥬네브의 한 국제회의에서 행한 연설의 원고인 <연맹주의, 사회주의, 반신학주의>의 내용도 고찰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회의란 1867-68년에 수차에 걸쳐 쥬네브에서 개최된 평화와 자유연맹(Ligue de la Paix et de la Liber?)의 총회로서 국제적 명사로는 J.S. Mill, Garibaldi 등이 창립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이 글은 이딸리아에서 이제 막 형성된 그의 사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의 아나키즘에 관한 자료로서는 당시에 최초로 공개된 자료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하여 바꾸닌의 아나키즘이 형성되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자유관이 어떻게 확립되어 가는지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바꾸닌의 활동과 사상적 발전에 대하여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필자로서 역점을 두려는 것은 바꾸닌의 이러한 자유관이 그의 아나키즘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기 이전인 1848-63년, 즉 그가 슬라브 민족 해방 운동에 투신하던 시기에 이미 제시되고 있음을 규명함으로써 일부 연구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바꾸닌 자신이 1848년부터 줄곧 일관된 사상 체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하여 왔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역점을 두려는 것은 자유의 문제와 민족 문제에 대한 고심의 귀결인 연맹주의에 관해서다. 이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바꾸닌이 어떻게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자유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를 조직해 나아가려고 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A. 자유의 본질
바꾸닌의 자유론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자유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한 점에 있다. 그는 이웃의 자유가 자기 자신의 자유에 대한 필수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으로는,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필연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좀더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자유는 개개인의 그리고 모든 사람의 전체적인 연대성 속에서만 정당하고 완전하다. 고립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자유)은 성격상 본질적으로 상호적이며 사회적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지상의 한 인간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민족의 자유와 인민 대중의 자유를 위한 민족 해방 운동과 사회 혁명에 대한 그의 집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한 민족의 자유"와 "단 한 명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훼손도 "나의 권리와 인간성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렇다면 바꾸닌에 있어 자유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꾸닌은 자유에 각별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즉 자유는 "인간의 징표(le signe de l'homme)"로서 인간을 야수와 구별짓는 것이며 "인간성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 "자유롭게 되는 것(etre libre)"은 인간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자 "사명"이다. 또한 자유를 향하여 장구한 세월에 걸쳐 계속된 이행 과정에 "역사의 모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하는 바는 바꾸닌에 있어서 자유란 자유주의자들이 인식하듯이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 또는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후천적으로 각성되고 창출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인간들은 애초에 야수와 다름없는 존재로 출발하였다. 이 상태에서 자유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인간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다가 마침내 서로 동료, 형제임을 인식하게 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인간의 이성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원시적, 야만적 상태에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로써 인간은 야수성(la bestialit?)을 탈피하여 "제2의 특성인 인간성(l'humanit?)"을 만들어 낸다. 또한 이성은 연대성의 본능을 양심으로 변환시키는 유일한 원인이다. 이성을 통해 인간은 끝없이 이어지는 엄청난 역사적 진화와 변천을 겪으며 자연 상태의 사회를 지성, 정의, 권리에 따라 조직되는 사회로 변모시켜 가며 "자신의 자유를 창조해낸다(il cr?e sa libert?)."
따라서 자유를 증대시키는 것이 역사 발전의 추세이며 또한 역사의 의미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 구성원의 자유가 클수록 그 사회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유를 감소시키고 위축시키고 말살하려는 시도는 그 비인간성, 야수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바꾸닌은 자유의 제한을 합리화하는 시도, 특히 루쏘나 자유주의자들의 사회계약론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류의 사회계약론이 공공의 안녕이나 사회 전체의 이해를 위하여 개인적 자유의 부분적 양도 또는 유보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며, 결국은 국가에 의한 절대적 지배로 귀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자들의 관점에서는 개개인의 자유의 일부를 단지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한 완전한 보장을 위해서 떼어낼 뿐이다.
반면에 바꾸닌의 입장에서, "자유란 쪼개어질 수 없는 것이다(La libert? est indivisible)." 즉 자유의 일부를 떼어 양도한다는 것은 자유 전체에 대한 훼손을 의미한다. 이것을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대가 떼어 간 이 작은 부분, 그것이 내 자유의 진수 그 자체다. 그것은 전체다." 떼어낸 부분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자유에 대한 의식은 정확하게 바로 그 부분에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며 억누를 수 없는 운동인 것이다. 바꾸닌은 모든 안락함을 희생할 각오로 단 하나의 금기를 깨뜨린 아담과 이브, 그리고 뻬로(Charles Perrault)의 설화집에 등장하는 잔혹한 성주 푸른 수염(Barbe-Bleue)의 일곱번째 아내를 예로 들며, 이러한 설화의 함의가 자유를 향한 최초의 행위라고 강조하였다.
바꾸닌은 사회계약론자들이 전체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개인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고 더 나아가 부정하려는 데서 국가의 출현을 보았다. 즉 계약론자들이 계약체결과 더불어 성립한다고 본 사회란 바꾸닌에게는 국가를 의미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계약의 이론 체계 속에 사회를 위해 배려된 자리는 없으며 오로지 국가만이 존재하며 설사 사회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에 의해 흡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꾸닌과 사회계약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관의 근본적 차이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양자 간의 자유관이 판이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약론자들에게 있어서 인간 사회는 오로지 계약 체결과 더불어 성립된다. 이에 반해 바꾸닌에게 사회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여 사회란 모든 계약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인간 집단성의 본원적 존재 양식(le monde naturel d'existence de la collectivit? humaine)"인 것이다. 즉 인간은 본능적으로나 운명적으로나 사회적 존재로서 개미나 벌과 마찬가지로 사회 속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연대성의 내재적 법칙(une loi inh?rente de solidarit? naturelle)"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가장 원시적인 미개인들도 함게 모여 사는 것이다. 결국 계약론자들이 사회 이전의 단계로 가정하는 자연상태까지도 바꾸닌에게는 엄연히 사회적인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자연상태의 사회에서의 자유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 바꾸닌과 사회계약론자들은 다시 상반된 입장을 견지한다. 계약론자들에 따르면, 이 상태에서 즉 계약 이전 단계에서 자연인(l'homme naturel)은 절대적인 자유를 누린다. 바꾸닌의 관점에서는 이른바 자연 상태에서의 자유란 끊임없이 괴롭히는 외적 세계에 대한 "고릴라급 인간(l'homme gorille)"의 절대적 예속에 불과한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가장 낙후된 섬사람들의 경우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원시적 야만 상태 속에서도 양도할 "단 한 조각(une parcelle)"의 자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야수성 상태 속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할 뿐더러 설사 계약을 맺고자 하더라도 계약의 전제가 되는 이성을 아직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꾸닌의 관점에서 사회계약론자들의 자유관의 좀더 심각한 문제점은 자유의 연대성 내지는 사회성에 대한 부정에 있었다. 바꾸닌은 "한 사람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계약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유인들은 서로 접촉하지 않는 한, 즉 개별적인 고립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이러한 논리 때문에 사회계약론자들은 계약 이전 단계인 자연상태를 사회로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개개인의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개개인의 자유는 모든 타인들의 자유에 대한 부인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계약론자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자유들은 서로 접촉하게 되면서 서로 모순되고 제한되고 축소되고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자유들이 완전히 무너지는 극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계약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바꾸닌이 느꼈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사회계약론자들이 사회질서를 위하여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그 일부나마 제약 내지는 규제의 대상으로 보았던 점이다. 바꾸닌이 보기에, 루쏘의 정치이론은 크리스트교의 정치이론처럼 인간성과 개인적 자유의 성격을 부분적이나마 악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바꾸닌은 계약론자들이 자유를 야수성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바꾸닌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는 자신의 야수성의 폐허 위에서 주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계약론자들의 부정적인 자유관은 권위주의적인 해법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는 점에서 바꾸닌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질서란 사회 구성원들인 개개인 자유에 대한 제약이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개인적 자유의 무한한 확대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질서는 자유의 기반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영예로운 완성(couronnement)"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바꾸닌은, 자유의 고립성과 야수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자유를 제약하는 권위주의로 귀결될 필연성을 지닌 사회계약론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자유의 연대성 내지는 사회성이라는 관념을 고수함으로써 평등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는 "자유란 연대성, 즉 상호성의 산물 및 최고 표현이기 때문에 평등 속에서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꾸닌에 따르면, "인간은 마치 거울에 비쳐지듯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양심에 의해서 자유롭게 인식되고 대변되는 자신의 자유가 그들의 자유 속으로 무하한 확대를 발견할 경우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만일 나의 권리가 나보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감정에 의해서 보증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자유 의식이 아니라 특권 의식을 주게 된다. 이 경우 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권이야말로 자유에 역행하는 것이디 때문이다. 나의 자유는 완전하고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의 자유 속에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보다 덜 자유로운 단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의 자유를 방해하고 훼손하고 제약하고 결국 부정하는 것이 된다. "나는 나와 똑같이 자유로운 사람들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라든지 "개개인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평등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처럼 자유의 실현 요건으로서 평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차이의 균일화나 개인의 지적, 도덕적, 신체적 획일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개인의 성격, 지성, 역량의 다양함은 물론, 인종, 국민, 남녀, 연령의 차이까지도 "인류(l'humaie esp?ce)"와 "인간성(l'humanit?)"의 풍요로움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사유재산이 개개인의 능력과 생산적 에너지와 절약의 산물인 한, 경제적.사회적 평등이라고 해서 더 이상 개인 재산의 균등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바꾸닌이 주장하는 평등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사회 조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 속에 태어난 개개인이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도록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자질과 역량을 발전시키고 발휘"함에 있어서, 즉 자유를 누림에 있어서, 동등한 수단 내지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회 조직이다. 결국 바꾸닌이 주장한 것은 일종의 기회의 평등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출발선의 평등(l'?galit? du point de d?part)"이다.
B. 민족의 자유와 인민의 자유
'자유의 연대성'이라는 바꾸닌의 관념은 민족 해방 운동과 사회 혁명에 대한 그의 활발한 참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민족 운동에 대한 바꾸닌의 최우선 관심사는 이러한 운동들이 자유 - 반드시 그 자신이 이해하는 자유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 를 위한 투쟁과 관련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1848년 혁명 이후 그가 슬라브 민족 해방 운동에 적극 투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연구자들은 바꾸닌을 러시아 패권주의자나 이와 유사한 범슬라브주의자로 왜곡하였으며, Nettlau나 Gu?rin처럼 바꾸닌의 아나키즘에 공감하는 연구자들마저도 1848-63년 동안의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든지 아나키즘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하는 이해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들 연구자들은 1863년 폴란드 봉기 실패 후 바꾸닌의 주된 관심이 민족 해방 운동에서 사회 혁명으로 전환된 사실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이미 1848년 당시부터 바꾸닌에게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인민의 자유와 사회 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취급하는 문제점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후 유의하여 살피고자 하는 것은 '자유의 연대성'이라는 관념이 이미 1848년경부터 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가, 인민 대중의 자유를 위한 사회 혁명의 요소를 민족 해방 운동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민족주의 운동에 잠재된 위험성 내지는 반동성이 어떻게 지적되고 있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바꾸닌의 자유론의 핵심을 이루는 '연대적 자유'라는 관념은 1864-67년에 집필된 각종 강령 속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되기 훨씬 이전인 1848년 혁명기에 이미 그의 글 몇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바꾸닌은 1848년 6월 프라하에서 개최된 범슬라브족 대회에 대의원으로 참여한 뒤 여러 슬라브족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소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새로운 슬라브 정책의 기초>라는 슬라브족 통합 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글에서 바꾸닌은 슬라브족 사이의 긴밀한 '연대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이들[슬라브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 자신의 자유에 대한 제1의 요건이 된다. ... 어느 한쪽의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다른 한쪽의 행복과 불행이 되어야 하며, 나머지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한쪽의 박해는 다른 한쪽의 박해가 된다.
이러한 사상은 이듬해에 집필된 <슬라브인들에 대한 호소>에서 민족의 자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표출되고 있다.
제민족은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유럽 어느 곳에서든 아직도 억압 아래 살고 있는 단 하나의 민족이라도 존재하는 한, 제민족의 복지는 보장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또한 제민족의 자유가 아무 곳에서나 친숙한 것이 되려면 그것은 모든 곳에서 친숙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들은 사실상 한 입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의 자유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것은) 진정하고 완벽한 자유, 유보와 예외와 제약 없는 자유입니다.
슬라브 민족의 자유에 대한 바꾸닌의 이러한 주장은 폴란드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당시 시대 분위기의 일단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Carr의 지적대로, 프랑스 혁명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유란 개인의 자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민족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의지에 반해서 전제군주나 외국인에 의해 지배받지 않을 권리를 지녔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정치적 정의를 위한 동맹 관계에 있었으며, 19세기를 통하여 이에 대한 모범적 예로 손꼽힌 것이 바로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민족주의 정수와 민주주의 정수를 동시에 대표하였던 것이다.
하물며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론이 지닌 문제점을 신랄히 비판할 정도로 19세기의 가장 극단적인 자유 옹호자로 평가받는 바꾸닌이 민주주의와 아울러 민족주의를 예찬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폴란드에서 그 최초의 구체적 대상을 발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찌기 바꾸닌은 1845년 1월 <레포름>지에 게재된 공개서한과 1847년에 행한 폴란드 봉기(1830년) 17주년 기념 연설에서 박해받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공통된 운명과 양국 인민의 유대를 강조한 바 있다.
자유는 바꾸닌에 있어서 민족 운동의 정당성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이었다. 그는 민족의 권리를 "자유라는 최고원리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로서만 인정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자유에 역행하거나 자유 밖에 존재"할 경우 더 이상 권리일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기준은 폴란드 문제에 대한 시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꾸닌은 폴란드의 경우를 포함하여 민족 운동에 일차적으로 공감을 표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민족 운동이 제한적이나마 폭정과 억압에 대한 항거와 관련되는 한, 자유를 위한 전반적 투쟁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1863년의 봉기 실패로 폴란드 민족 운동이 그 한계성을 이미 드러낸 뒤에도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제국을 타도하려고 할 경우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러시아 청년들에게 호소할 정도였다. 더 나아가 폴란드 귀족의 "자랑스러운 자유정신"을 한편으로 찬양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마치 좁은 곳에라도 제대로 비추기만 하면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엄청난 활력소인 "태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의 "자유"가 노동 대중에게는 항상 "노예제"를 의미해온 것을 바꾸닌은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는 폴란드 귀족들의 농민 탄압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폴란드 민족 운동의 약화 원인은 반란 귀족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이었으며, 1863년 당시 러시아 짜르 정부는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폴란드 귀족들이 "조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노동 대중에게는 "감옥"을 의미하였다. 여기에서 바꾸닌은 민족의 이름으로 정치적 통합과 독립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의 자유가 인민 대중의 자유와 유리되고 더 나아가 이를 억압할 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통합과 독립의 목표가 본질적으로 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거의 모든 나라 사람이 "애국적"이라는 말과 "혁명적"이라는 말을 혼동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애국적인 동시에 반동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모든 국가와 정부는 외관상 아무리 민주적이라고 하여도 바꾸닌의 관점에서는 다수를 희생시켜 소수의 수중에 권력을 집중하려는 속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지배계급만의 자유를 추구하는 민족 운동은 인민 대중을 포용하지 못함으로써 근본적인 한계를 노정하게 되는 것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그토록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혁명과 자유를 위한 투쟁을 겪은 후에도 유럽이 아직껏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는 원인은 진정으로 대중이 움직이지 않은 데 있었다. 폴란드는 바로 이러한 예의 전형이다. 조국 해방을 위한 폴란드 귀족들의 투쟁의 한 세기는 노동 대중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무모한 것임이 드러났다고 바꾸닌은 단언하였다.
폴란드 민족 운동에 대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냉담함의 원인을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계급 문제에서 찾았다.
귀족들이 농민의 팔로 경작하고 그들의 땀과 피로 그 땅을 적시게 하는 한, 폴란드인, 독일인, 유태인 자본가들과 공장주들의 장인들과 공장 노동자들을 통하여 번돈으로 주머니를 채우는 한, ... 귀족과 노동자들의 이 두 세계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갈라질 것이다.
바꾸닌은 1864년 마르크스와 만난 자리에서 폴란드 봉기 실패 원인이 "처음부터 폴란드 귀족들이 농민적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선언하기를 거부"한 데에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또한 바꾸닌은 이 자리에서 폴란드 봉기가 실패한 마당에 앞으로 사회주의 운동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바꾸닌은 이미 1848년 혁명기에 민족 문제와 결부된 계급 문제 내지는 사회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슬라브인들에 대한 호소>의 초안에서 두 문제를 지칭하는 "안팎으로부터 동시적인 제인민의 해방(?mancipation des peuples ? l'interieur et ? l'ext?rieur ? la fois)" 또는 애초부터 드러난 "우리들의 숭고한 혁명의 양대 성향"이란 표현을 써 가며, "피억압 민족체들에 대한 구원"과 짝을 이루는 "대중들의 사회적 해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이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을 요구하였던 것은 어떤 개인이나 한 당파가 아니라 바로 대중의 찬탄할 본능이었습니다. 누구나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만, 인구의 대다수가 비참한 존재로 영락한 곳에서, 그리고 교육과 여가 생활과 빵을 박탈당한 채 힘있고 돈있는 자들의 발판으로서 봉사하도록 운명지워진 곳에서, 자유란 거짓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꾸닌은 독립을 추구하는 슬라브족들을 향하여, 러시아 제국을 통하여 나타나는 대러시아족의 외형적 독립의 허구성을 폭로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독립이, 밖으로 여전히 폴란드에 대한 재앙을 의미하며 안으로 자유 부재를 의미하는 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따. 이처럼 바꾸닌은 인민의 자유에 무관심하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민족주의의 문제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C. 연맹주의의 성격
바꾸닌은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사회 조직의 원리로서, 자유의 정신에 입각한 연맹주의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장차 사회 구성의 유일한 원리이어야 한다. 또한 인류의 억누를 수 없는 성향의 하나가 통합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가 자유를 기반으로 삼을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통합에 이른다고 낙관한다.
그러나 역으로 통합으로부터 자유에 이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본다. 자유를 배제하는 통합은 개인들과 인민들의 존엄성과 복지에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바꾸닌은 애국주의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왕의 정치적 통합태로서의 모든 국가는 자유에 대립되는 권위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질서와 정치 및 사회 조직이 위로부터 아래로, 그리고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이루어져 자연적으로 도처에서 위계적 규율이 형성되고 모든 부분의 자유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꾸닌은 자유 밖에서 이루어진 통합을 파괴함으로써만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그는 혁명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그것[혁명 목표]은 역사적 권리(droits historiques)의 폐지, 정복권의 폐지, 외교상 권리의 폐지이다. 그것은 신적, 인간적 권위의 멍에로부터 개인들과 결사체들의 완전 해방이다. 그것은 지방 행정 구역에 꼬뮌들이, 그리고 국가에 지방들과 피정복민들이 강제적으로 통합된 것을 모두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군사적, 관료적, 통치적, 행정적, 사법적, 세속적 제도 일체와 더불어 중앙집권적, 후견적, 권위적 국가의 근본적 해체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 집단, 결사체, 꼬뮌, 지방, 지역, 민족들에게 반환된 자유(la libert? rendure)이며 이러한 자유를 연맹으로 상호 보장(la garantie mutuelle de cette libert? par la f?d?ration)하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러한 원리가 민족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자유 의사에 따른 결정의 원리, 즉 자결권에 놓여 있다. 크고 작은 모든 민족들 뿐만 아니라 지방들과 꼬뮌들도, 모든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웃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 한, 양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치권과 자결권을 지닌다. 이들은, 이른바 역사적 연고권과 기성 국가들의 정치적, 전략적, 상업적 이해 관계 및 그에 따라 결정된 국경선을 전혀 고려할 필요 없이, 자신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스스로의 일을 처리하고, 스스로를 내부적으로 조직하며, 원하는 집단과 동맹하거나 이미 결성된 연맹에 자유롭게 가입하거나 탈퇴할 수 있다. 특히 자유로운 가입과 탈퇴의 권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연맹이란 은폐된 중앙집권화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 행사에 의해서 온갖 사회 조직 간의 분열이 심화된다면, 자유에 기초한 사회들이 필연적으로 통합에 이른다는 바꾸닌의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일 뿐만 아니라 자가당착이지 않을까? 바꾸닌은 심지어 한 민족 가운데서 분립하기를 원하는 어떤 지방이 민족 통합체 내의 잔류나 가입을 강요받을 경우, 반란까지도 열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고립을 자초하는 독립의 경우는 연대성에 의한 혜택과 자원과 보호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방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고립적 자의를 조용히 누리도록 내버려둘 경우, 생필품 수요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필요의 압력으로 인해서 그 지방은 제 발로 그리고 신속히 통합체에 복귀 또는 가입하게 된다는 것이 바꾸닌의 생각이다. 즉 개인이나 여러 사회조직이 경제적 필요에 반하여 반발하지는 않지만, 자유와 권리에 대한 모든 침해에 대해서는 반발한다는 점이다.
바꾸닌에 따르면, 1863년 폴란드인들이 바로 이 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봉기가 실패한 원인이었다. 당시 바꾸닌은 그들에게 폴란드 분할(1772) 이전의 국경선을 더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간청하였으나 허사였다고 토로한다. 옛 국경선의 복원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러시아의 탄압에 똑같이 시달리는 처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란드를 결코 사랑해 본 적이 없으며 또 사랑할 이유도 없는 루테니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전체를 폴란드인 마음대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봉기한 폴란드인들이 옛 국경을 말하는 대신에 인민의 자유를 대의명분으로 내걸고 러시아에 대한 투쟁에 동참할 것을 모두에게 호소하였더라면, 루테니아인들은 우선 함께 봉기하였을 것이며 그후 인민적 연대에 의해 폴란드에 통합되기를 원하였을 것이라고 바꾸닌은 아쉬워한 바 있다. 결국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신념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이후 바꾸닌은 폴란드 봉기 실패를 교훈 삼아 민족 문제와 자유 일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게 된다. 그는 이른바 "민족체의 원리를 단지 자유라는 지고의 원리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로서만 여길 수 있되, 이것이 자유에 반하거나 자유 밖에 머물 경우 더 이상 권리가 되지 못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1864년만 하더라도 "민족체의 원리"라는 표현을 쓰던 바꾸닌이 그로부터 삼년 후에는 "민족체"라는 것이 "원리"일 수 없음을 선언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원리에는 보편성이 요구되는 데 반하여 민족체가 함축하는 것은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것으로서 사회 통합의 진정한 원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 정신에 입각한 사회 통합의 원리, 즉 연맹주의에 따라 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우선 "자유 결사와 자유 연맹의 원리에 의해서(par principe d'association et de f?d?ration libres)" 질서와 조직이 "아래로부터 위로" 그리고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형성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들을 꼬뮌으로, 꼬뮌들을 지방(province)으로, 지방들을 민족으로, 민족들을 우선 유럽 합중국으로 그 다음에는 전세계 합중국으로 결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맹주의 조직 방식에서 정치적 기본 단위는 꼬뮌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결사체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가담하지 않은 개인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작은 세계로서, 선출된 담당자들에게 행정 업무가 위임되며, 공공 교육이 실시된다. 또한 선거에 의해 구성된 법원이 꼬뮌 구성원들 사이의 논쟁 및 이견에 대하여 판정을 내린다.
꼬뮌들은 연맹하여 지방을 구성한다. 또한 지방들의 연맹은 민족을 형성한다(즉 바꾸닌에게 민족이란 연맹주의 이론 체계 내에서는 지방들의 연맹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각 꼬뮌의 헌장이 자유의 원리에 부합되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지방의 판정과 승인을 받아야 하며, 각 지방의 헌장은 민족에 의해서 승인되어야 한다. 각 지방의 운영을 담당하는 것은 입법의회(une assembl?e l?gislative), 행정처(une pr?sidence), 선거로 구성된 법원(un tribunal ?lus) 등이다. 이러한 체제와 방식은 민족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여러 등급의 사회 조직에서 유기적 자치가 확립된다. 이러한 식으로 결국 바꾸닌은 국가에 의한 중앙집권화 뿐만 아니라 절대적 자치로 인한 고립을 거부함으로써 균형과 연대를 선택한다. 최종적으로 국제연맹이 여기에 가입을 원하는 민족들로 구성된다.
바꾸닌의 연맹주의 이론 내에는 꼬뮌 이외에 또 하나의 기본 단위로 노동자들의 협동적 조합(les associations coop?ratives ouvri?res)이 자리잡고 있다. 전자가 정치적 기본 단위라면 후자는 경제적 기본단위이다.
그러면 바꾸닌에게서 노동자 조합은 의미는 무엇인가? 바꾸닌은 영국, 프랑스, 벨기에, 쉬스 등에서 1840년대부터 그리고 그후 이딸리아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야말로 격동의 19세기를 상징하는 "최대의 사건"이며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결정적인 사실"이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로써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노동자들이 고립 상태에서는 모력할 뿐만 아니라 노예제 하에 영원히 신음하게 되리라고 본다. 반면에 이들이 결속(associ?s)하기만 한다면, 즉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면, 막강한 자본가들보다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강력하게 되며 마침내 그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가능성의 단적인 예는 역설적으로나마 나뽈레옹 3세가 프랑스 인민을 상대로 직접 채권을 두차례 공모하는 데서 이미 암시된 것이다. 귀족 은행이나 부르조아 은행의 개입이 일체 없었던 가운데, 인민들만의 협력을 통하여 모금액은 수주만에 10억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모든 은행들이 단합하여 이룰 수 있는 모금 액수의 총규모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평민들의 결속(l'association des petites gens)" 즉 민주주의가 거둘 승리의 위력을 예고하는 것이다.
바꾸닌은 동일한 결속 내지는 조합의 법칙이 소농민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들의 기계 영농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여기에 "협동 노동력(la force du travail associ?)"을 부여함으로써 대재산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소농민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노동조합들이 현존하는 꼬뮌, 지방, 심지어 국가들의 경계선까지도 무너뜨리면, 세계는 더 이상 민족 단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산업 집단으로 나뉘게 되며, 정치에 대한 요구에 따라서가 아니라 생산에 대한 요구에 따라 조직되는 새로운 체제가 인류 사회 전체에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합들이 하나의 거대한 경제 연맹을 형성하게 되리라고 바꾸닌은 전망한다. 이 연맹은 당시로서는 생각해 볼 수 없는 세계적 규모의 정확하고 상세하며 방대한 통계에 근거하여 정보를 제공받는 거대한 회의 기구를 갖게 되며, 상업 및 산업의 공황과 원치 않는 불경기와 재앙과 유실되는 자본 및 노동이 없도록, 여러 지역 사이에서 세계 산업 생산량에 대한 관리, 결정, 분배(gouvemer, d?terminer, r?partir)를 제시하고 요청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세상의 모습은 일신된다. Lihning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제1인터내셔널 내의 이딸리아 및 에스빠냐 연맹들이 바꾸닌의 결정적인 영향 속에 자신들의 이념으로 삼았던 "혁명적 집산주의"인 것이다.
Ⅳ. 자유 쟁취를 위한 혁명
바꾸닌에게 있어서 자유를 쟁취하는 유일한 길은 혁명이다. 그런데 바꾸닌은 혁명을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즉 혁명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파괴를 내포한다. 그는 인류가 진보를 위한 좀더 평화로운 수단을 창안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자유가 파괴를 통해 달성될 수 밖에 없다는 논거는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 혁명"의 파괴성보다 인도주의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도대체 이러한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사회 혁명"의 개념은 무엇이며, "정치 혁명"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한 바꾸닌은 "범세계적" 또는 "보편적" 혁명으로서의 사회 혁명을 강조하였다. 보편성은 사회 혁명의 본성이자 성공의 필수 요건이라고 주장된다. 이상의 제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선 '사회혁명'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인민 대중과 인텔리겐챠의 역할을 중심으로 혁명의 주체와 노선에 관한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어떠한 점에서 바꾸닌이 혁명적 생디깔리즘의 사상적 선구자의 하나인지 살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어떠한 이유에서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농민도 혁명의 주역이 되도록 고심하였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끝으로 자유로운 미래 사회 건설의 과제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A. '사회 혁명'의 성격
바꾸닌에게 자유와 "사회 혁명"의 의미, 그리고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바꾸닌이 강조하는 자유는 "연대성에의한 자유" 또는 "평등 속의 자유"이다. 그런데 사회 혁명은 "보편적인 위대한 자유"와 "세상 만인의 경제적, 사회적 평등화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바꾸닌에 의하면 자유란 "개개인의 잠재 능력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모든 물질적, 지적, 도덕적 역량의 완전한 발전"이다. 이것이 또한 바로 사회 혁명이 추구하는 바다. 즉 사회 혁명의 목표는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개인들이 말 뜻 그대로 인간적으로 될 수 있는 것,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계발할 권리 뿐만 아니라 모든 재능의 계발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향유하는 것, 평등 속에서 그리고 형제애를 통하여 자유롭고 행복하게 되는 것"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왜 사회 혁명은 파괴를 수반하는가? 이 혁명의 목표가 평화적으로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완전한 자유의 실현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가로막는 각종 장애물은 힘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를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회 혁명이 대중, 집단, 꼬뮌, 결사체 그리고 개인들에게까지 완전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폭력의 역사적 원인 일체와 국가의 권력 및 그 존재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종식시켜야 하는 것은 다름아닌 힘에 의한 조직의 이 낡은 체계이다.
이제 힘을 분쇄하고 격퇴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대부분 문명국들의 현재의 정치적, 사법적, 종교적, 사회적 조직 하에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해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를 달성하고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 모든 현존 제도를 파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것은 국가, 교회, 법정, 대학, 행정, 군대, 경찰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에 적대하는 특권계급에 의해 구축된 요새들일 뿐이다.
현재 문명 세계의 모든 나라에 오로지 단 하나의 범세계적 문제, 단 하나의 세계적 관심사가 존재한다. 그것은 경제적 착취와 국가의 억압으로부터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인 것이다. 이 문제가 피비린내나는 가공할 투쟁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바꾸닌은 역사상 "그 어느 시기에 혹은 그 어느 나라에서 거리낌없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힘과 두려움에 내몰리지 않은 상태에서 양보하였던 특권 지배 계급의 예가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라고 반문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상 전진을 향한 모든 발걸음은 "피의 세례"를 거친 후에야만 비로소 가능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바꾸닌은 사회 혁명이 수반하는 파괴에 두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그 첫째는 낡은 것의 파괴는 새로운 것의 창조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좀더 중요한 문제인데, 사회 혁명의 파괴는 제도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것이며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번째 경우는 "파괴의 욕구가 곧 창조의 욕구"라는 바꾸닌 자신의 유명한 경구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바꾸닌은 그 누구도 최소한의 신질서에 대한 막연한 생각도 갖지 못할 경우 파괴를 목표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미래상이 생생하게 잡힐수록 파괴력은 가층 강해지는 것이다. 바꾸닌은 인민 대중의 봉기가 본성상 자연발생적이고 무질서하고 무자비한 것이며 항상 재산에 대한 대량 파괴를 전제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파괴적, 부정적 욕망은 숭고한 혁명적 대의와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욕망 없이 혁명적 대의는 실현될 수 없다고 바꾸닌은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파괴를 통해서만 신세계는 태동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사회 혁명 및 바꾸닌 사상의 휴머니즘과 직결된 문제다. 바꾸닌은 이딸리아의 지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 바 있다.
그대들을 억압하는 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일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그대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적들의 힘을 무너뜨린 후, 인정의 움직임에 따르라, 그리고 이제 해롭지 않고 무장해제된 쓰러진 불쌍한 악마들에게 인정을 보여라. 그들을 그대들의 형제로 간주하고 사회적 평등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그대들과 더불어 살고 일하도록 초청하라.
사회 혁명 및 사회주의는 정치 혁명 및 쟈꼬뱅주의보다 "천배나 더 인간적이며 결코 잔인하지 않다"고 바꾸닌은 단언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개인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그리고 그에게 계속 영향을 주는 자연 및 사회 환경의 타의적 산물(des produits involontaires)"이라는 바꾸닌의 인간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들, 억압자들, 모든 종류의 착취자들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사회가 그들에게 만들어 준 사회적 지위의 숙명적인 산물(le produit fatal)"에 불과하며, 비록 악행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일반 범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현 사회 조직의 타의적 산물들"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모든 혁명가 뿐만 아니라 현 사회 조직의 희생자들로서 당연히 그 가슴이 복수심과 증오로 가득차 있을 피억압자들과 고통받는 자들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혁명 후의 신사회는 구사회의 억압자들을 자동적으로 신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풍요롭지만 사치가 줄어든 신사회에는 오히려 "이제껏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된 종류의 사치" 즉 "휴머니티의 사치"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바꾸닌에 대하여 비판적인 Lechtheim마저도 그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파괴의 열정이 "철저하게 관대한 심성"과 "인간의 본질적인 선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수반한 것이라는 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물론 바꾸닌은 인민들이 그 분노를 처음 터뜨릴 때 가장 가증스럽고 가장 악착스러우며 가장 위험스러운 사람들 중에서 몇몇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확실히 저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폭풍우가 가져 온 재앙만큼이나 불가피하지만 무익한 불행에 비유될 만한 것이다. 그러나 태풍이 일단 지나가면 냉혈적으로 조직된, 위선적, 정치적, 사법적 살륙에 전력을 다해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 혁명에 수반되는 학살은 도덕적이지도 유용하지도 못하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는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활동이 부진했다고 할 수 없는 1793년의 기요띤은 프랑스에서 귀족 계급을 분쇄하지 못하였다. 완전히 분쇄되지는 못한 귀족 계급이 그나마 심대하게 타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기요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재산에 대한 몰수와 매각에 의해서였다. 즉 정치적 살륙은 그 어떠한 파당도 죽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특권 계급에 대하여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힘이란 것이 사람 속에 있다기 보다는 사물들의 조직, 즉 국가 제도와 그 자연스런 기반이자 결과인 사유재산제가 특권자들에게 만들어주는 지위 속에 있는 한 정치적 살륙은 무력한 것이다. 바꾸닌은 사회혁명을 통하여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농촌 프롤레타리아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계급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서 사라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계급의 물질적 기반이 분쇄되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을 근본적(급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혁명을 위태롭지 않게 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되는 정당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지위와 사물에 대해서는 단호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산과 그 필연적 귀결인 국가를 일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혁명의 모든 비결"이 있다고 바꾸닌은 강조하였다.
이 점에서 사회 혁명은 정치 혁명과 확연히 구분된다. 쟈꼬뱅주의자들과 블랑끼주의자들은 사물에 대한 근본적(급진적) 혁명을 원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을 적대하는 유혈 혁명을 꿈꾼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독재, 즉 국가 중앙집권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재산의 재확립을 야기한다. 이들에게 사회주의는 혁명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이들은 독재자이며, 혁명의 통제자이며 후견인들로서, 군주국, 귀족 국가, 현재의 부르조아 국가들이 분쇄되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혁명국가의 창건을 꿈꾼다. 따라서 쟈꼬뱅이나 블랑끼주의자들의 승리는 혁명의 죽음을 의미하다.
바꾸닌은 정치 혁명이 사회 혁명에 우선해야 한다는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한결같은 견해가 심대하고 치명적인 오류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사회 혁명에 우선하며 따라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정치 혁명은 필연적으로 부르조아 혁명으로 되며 그리고 부르조아 혁명이란 오직 부르조아 사회주의만을 촉진시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좀더 위선적이고 교묘하면서도 못지 않게 억압적인 새로운 착취로 귀결되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 평등을 그 당면 목표로 삼지 않는 모든 정치 혁명은, 인민의 이해와 권리의 관점에서, 위선적이고 은폐된 반동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민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적 해방이기 때문이다. 인민의 정치적, 사상적, 도덕적 해방은 바로 경제적 해방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회 혁명은 보편성과 범세계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즉 경제적 착취와 국가의 억압으로부터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문명 세계의 모든 나라에 공통된 관심사로서 유일한 범세계적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 혁명은 "한 국민의 단일 혁명일 수 없으며, 그 본성상 국제 혁명"이라고 바꾸닌은 규정한다.
이에 비추어 그 어떠한 혁명도 보편성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즉 "국가를 파괴하며 평등과 정의를 통한 자유를 창조하는 뚜렷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면, 결코 국경을 넘을 수 없으며 보편적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위대하고 유일하게 진정한 세기적 세력, 즉 노동자들을 움직이고 자극하고 고무할 수 있는 한가지 힘은 "세습적 재산 제도와 자본을 보호하는 모든 제도들의 폐허 위"에 이루어지는 진정하고 완전한 "노동 해방"이다.
또한 노동 해방 투쟁에서 국가, 교회, 법정, 대학, 군대, 경찰 등의 권위적, 억압적 제도들을 어느 한 나라에서 타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나라에서 이러한 것들을 타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17-18세기에 근대 국가들의 출현과 더불어 이러한 모든 제도들 사이에는 모든 국경을 초월하여 날로 증대되는 결속과 강력한 국제적 동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구체적인 혁명의 실천 방안이 제기되는 것이다.
B. 대중과 인텔리겐챠의 혁명적 역할
혁명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꾸닌에 따르면 그것은 인민 대중, 즉 노동자들과 농민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혁명의 발발에 있어 개인의 역할을 극히 제한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혁명은 개인들의 의지나 비밀 결사의 음모와는 무관하게 항상 "사태의 힘"(la force des choses), 즉 "제사건과 제사실의 움직임"에 의해서 야기되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혁명의 임박을 예감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폭발을 임의로 앞당길 수는 없는 것이다. 바꾸닌에 의하면 혁명은 "인민 대중의 본능적 의심의 심부"에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쳤다가 종종 일견하기에 하찮은 원인들로 야기되는 것이다. 특히 사회 혁명에서는 정치 혁명의 경우와 정반대로 개인들의 활동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대중의 자연발생적 활동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그렇다면 개인 또는 비밀 결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혁명의 조역으로서의 인텔리겐챠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혁명적 인텔리겐챠의 구성원은 "헌신적이고 정력적이고 명민한 개인들로서 야심과 허영심이 없는 진지한 인민의 벗"으로서 "혁명 사상과 인민 본능 사이의 매개역"으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우선 인민 대중의 본능에 부합하는 사상을 명료하게 체계화하고 이를 대중 속에 전파함으로써 혁명의 조산원으로 일하는 것이다.
만일 모종의 혁명 사상이 인민 대중의 본능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은 틀린 것이다. 틀린 사상은 인민에 의해 반드시 거부된다. 반대로 이러한 사상이 인민의 본능과 진정한 생각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라면, 그것은 반항적 대중의 마음 속에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이렇게 인민 대중의 공감을 얻은 사상은 한층 그 실현 가능성이 고조된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제까브리쓰드(Dekabrist: 12월 당원)들의 좌절은 귀중한 교훈을 준다. 이들의 실패 요인으로 바꾸닌이 지적하는 것은 첫째, 귀족 신분인 이들이 인민과 활발히 교류하지 못함으로써 인민에게 요구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이며, 둘째로 자기 계급의 언어로 대중에게 말하고 인민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혁명에 요구되는 신념과 열정을 인민 속에 일깨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텔리겐챠의 또 하나의 역할은 부단한 노력으로 대중의 타고난 역량을 혁명적으로 조직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인텔리겐챠의 조직은 혁명 투쟁의 주역인 "혁명군"(l'arm?e de la r?volution)이 아니라 일종의 "혁명참모부"(?tat-major-r?volutionnaire)인 것이다. 개인들과 결사체가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앞서의 단 두가지 역할 뿐이다. 여타의 모든 것은 "오로지 인민 대중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또 이루어질 수 있다. 바꾸닌의 주장대로 혁명군은 항상 인민이어야 한다.
이딸리아에서의 비밀 결사 활동을 마감하고 1867년부터 쉬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게 된 바꾸닌은 "새로운 발전의 이니셔티브가 인민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아울러 그는 쁘띠 부르조아지가 "그들 스스로 여하한 종류의 이니셔티브라도 잡기에는 너무 소심하고 비겁하고 회의적으로 되고 말았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말하는 인민은 서유럽에서는 "공장 및 도시 노동자들"을, 그리고 러시아, 폴란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슬라브 국가에서는 "농민"을 의미하였다.
그러면 바꾸닌은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의 양자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1870년 9월 그는 특히 서유럽의 경우 "농민들을 봉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시 노동자들이 혁명의 이니셔티브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바꾸닌이 보기에 당시로서는 노동자들만이 "사회 혁명의 본능과 명확한 의식과 사상과 그리고 그 반영된 의지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당시 "국가의 존재에 대한 모든 위협은 오로지 도시 프롤레타리아에게 집약되어 있다"고 바꾸닌은 단언하였다.
그렇다면 바꾸닌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어떠한 상황 판단에 근거한 것인가? 당시 빠리에서는 프로이쎈에 대한 패전에 분격한 주민들이 나뽈레옹 3세의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하였으며 빠리 사수를 결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빠리 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은 바꾸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서 유럽 각지에서 전개된 노동자들의 파업에서도 바꾸닌은 커다란 시사를 받았다. 즉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을 조직해 나아가는 역량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 후 바꾸닌은 조직 역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그 자신의 대의 명분에 부합하는 정의에 대한 인식은 프롤레타리아의 경우 승리할 수 있는 세력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프롤레타리아에게 이러한 인식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이 아직도 결여된 경우가 있다면 노동자들 사이에 이를 확립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 그러나 단지 이러한 정의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프롤레타리아는 여기에 더하여 그 자신의 힘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팔 부는 소리에 여리고(J?richo) 성벽이 무너질 때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힘을 분쇄하고 격퇴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꾸닌은 노동자 파업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에 따르면 파업이야말로 부르조아 권력과 국가를 무너뜨리고 신세계의 기반을 마련할 "노동자 부대"(rabochee voisko)를 창건하고 조직하는 것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유럽 노동운동과 관련된 새소식은 한마디로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물론 파업 때마다 노동자들은 고통과 희생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필요하다고 바꾸닌은 역설한다. 왜냐하면 파업 없이는 대중을 사회적 투쟁으로 불러일으킬 수 없으며 이들을 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업은 일반 노동자의 의미 없고 즐거움고 희망 없는 고립 상태로부터 그를 끌어내어 동일한 열망과 목표 아래 다른 노동자들과 결속시켜 준다. 그리고 그것은 승리를 위한 강고한 조직의 필요성을 확신시켜 준다.
파업은 모든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사회 혁명적 본능을 일깨워 준다. 경제 투쟁에 의해 이러한 본능이 일깨워지면 사회 혁명 사상의 선전은 훨씬 용이해진다. 왜냐하면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가 자본가 및 재산 소유자들의 이해관계와 절대로 병립할 수 없다는 것, 즉 계급간 화해의 불가능성을 깨닫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부르조아지의 기만적 주장에 미혹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이 보기에 파업은 노동자들을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떼어 놓는 최적의 수단인 것이다.
바꾸닌에게 있어서 유럽 각지의 파업 확산이 의미하는 것은 부르조아지의 뿌리깊은 맹목적 이기심으로 인해서 노자 대립이 더욱 거세지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질서 상태"가 날로 증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무질서 상태의 종착점인 사회 혁명을 향한 커다란 움직임이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각지의 파업이 규모가 커지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주변지역으로 확산됨으로써 바야흐로 "총파업"의 조건이 무르익는 것이다. 총파업의 유일한 귀결점은 사회의 모습을 일신할 "대지각변동"이다. 바꾸닌은 당시 모든 일이 아직 그러한 종극점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곳을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하였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강고한 인민 대중의 조직이 더욱 필요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할 때 바꾸닌에게서 혁명적 생디깔리슴의 사상적 선구자로서의 한 면모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농민이었다. 총파업으로 치닫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무리 가열차게 진행되더라도 농민의 협력과 지원 없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유럽에서 그 어느 곳보다 사회 혁명의 가능성이 높다고 바꾸닌이 지목한 이딸리아와 에스빠냐의 경우, 인민 대중의 대다수가 농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농민이 혁명의 성공 여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큰 것이었다. 특히 1871년 빠리 꼬뮌을 결성한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이 농촌의 무관심과 냉담함 속에 좌절하고 만 것은 바꾸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이를 계기로 바꾸닌은 노동자들이 혁명에서 농민을 끌어 들여 제휴하는 문제를 더욱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바꾸닌은 빠리 꼬뮌의 봉기가 진압된 수개월 후에 이딸리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촉구하였다. 즉 사회 혁명의 이름으로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할 것, 이를 행함에 있어 동일한 준비 조직 속에 그들을 농촌의 인민들과 함께 통합할 것 등이다. 왜냐하면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는 단지 정치 혁명만이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치 혁명은 필연적으로 그에 대항하는 농촌 인민들의 자연스럽고 정당한 반발만을 야기할 뿐이다. 이러한 반발 또는 단지 농민들의 냉담함은 빠리 꼬뮌의 좌절에서 나타나듯이 도시의 혁명을 질식시키게 된다. 오로지 범세계적 혁명만이, 부유한 계급들의 자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국가의 조직된 힘을 전복하고 분쇄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범세계적 혁명은 사회 혁명이며, 또한 농촌 및 도시 인민들의 동시 혁명이다.
C. 혁명과 자유 사회의 건설
바꾸닌이 무엇보다도 혁명의 전략 및 전술 문제에 집착했던 것은 그 자신이 혁명의 의미를 무엇보다도 기성 질서의 파괴에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서 혁명 이후 신질서 수립의 정치적 계획을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기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 이후 사회의 기본 특성을 몇가지로 예시한 바 있다. 첫째로 그것은 자유로운 연맹에 입각하여 건설되는 사회다. 둘째로 무계급 평등 사회다. 첫번째 문제는 이미 그의 연맹주의에 관한 고찰[제3장 3절]에서 언급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두번째 문제에 중점을 두어 살피고자 한다.
이상적인 미래 사회상으로 무계급 사회를 제시한 바꾸닌의 최대 관심사는 기존 사회에서 계급 구조 및 격차를 심화시키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인으로 무엇보다도 지배 계급에 의한 부와 지식, 즉 자본과 과학의 독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러한 불평등 구조를 지속시키는 존재는 바로 다름아닌 국가였다. 왜냐하면 국가는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며, 과학 발전의 성과에 힘입어 이로부터 소외된 인민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에게 있어서 자본과 과학의 독점을 분쇄하는 것은 국가 타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꾸닌은 양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본 및 토지에 대한 집단적 소유, 그리고 과학 및 노동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포괄적 교육"(instruction int?gral)을 혁명의 과업으로 제시하였다. 아울러 가는 이러한 과업의 선결 요건, 즉 자유로운 미래사회 건설의 전제로서 상속권의 폐지, 그리고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적용되는 육체 노동의 의무를 주장하였다.
바꾸닌은 상속권의 문제를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란 평등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권리가 존재하는 한, 계급, 지위, 부의 세습적 차이, 한 마디로 사회적 불평등이 법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실상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바꾸닌의 관점에서, 사실상의 불평등은 사회에 내재된 법칙에 따라 항상 권리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즉 "사회적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불평등이 된다." 정치적 평등 없이는 보편적, 인간적,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적 의미에서의 자유 또는 정치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치적 평등은 경제적, 사회적 평등이 존재할 경우에만 가능해진다. 그렇지 못할 경우, 불평등한 두 부분으로 분열된 사회 속에서 인민 대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부분이 항상 또 다른 부분에 의해 억압되고 착취당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상속권 폐지에 대하여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고 바꾸닌은 보았다. 첫째, 유산을 상속시키려는 개인의 희망 내지는 자유 의사를 짓밟는 일은 타인의 자유의 존중을 강조한 바꾸닌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상속권 폐지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남겨 주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의욕을 꺾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일부에서 주장되듯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수십만 내지는 백만 프랑을 벌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재산을 상속시킬 권리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이는 자연권 침해 또는 부당한 약탈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꾸닌은 이를 "법의 보호를 받는 도둑"이 죽는 경우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였다. 일개 노동자의 생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몇몇 개인들이 그토록 많은 재산을 모았다는 것은 특권, "법제적으로 합리화된 불의"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재산상의 모든 이득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재가와 보호를 받은 개인들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노동의 절도"인 것이다.
다음으로 죽은 사람의 유언 내지는 유지의 계승이라는 것도 바꾸닌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일 뿐만 아니라 불평등 구조를 존속시키는 국가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선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유나 권리나 개인적 의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속해 있는 세상을 유령이 지배하거나 억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재산가들이 사후에도 계속 의지를 관철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법제적 허구"나 "정치적 기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즉 죽은 자들이 직접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모종의 권력, 즉 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바꾸닌은 상속권 폐지가 국가 타도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상속권 폐지에 대한 또 하나의 있음직한 반론은 이러한 조치가 자식에게 재산을 남겨 주기 위해 일하는 자들의 노동 의욕을 말살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바꾸닌의 논박의 출발점은 노동 욕구란 인간에게 내재된 것으로 열심히 일하는 미혼 청년의 경우에서 나타나듯이 부정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노동 욕구란 다름아닌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마치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말하려는 본능과 같다는 것이 바꾸닌의 입장이었다. 이것은 간단한 실험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데, 사람을 며칠간 무위도식하게 한다든지 별로 무지도 않은 돌을 하루종일 아무런 성과 없이 이리저리 옮기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이내 불쾌감과 반발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노동 욕구가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이라면, 놀고 먹는 나태한 자들, 즉 특권계급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왜곡된 부정적 노동관에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에 대한 경멸 및 무위에 대한 선망, 그리고 노동과 지성의 분리이다. 전자의 경우 그 연원은 인간에 대한 "여호아의 저주의 산물"이라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여전히 "필요악" 정도로 간주되는 것이다. 물론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노동의 자유와 "노동의 법적 복권"이 선언되었지만 아직도 노동은 수치스럽고 예속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노동이 삶을 만끽하며 살아갈 가능성을 사람들에게서 박탈하기 때문이며, "여가"(le loisir)의 실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위도식의 가능성이 오히려 영예의 특권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노동관은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소수의 사람이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존속하는 한, 다시 말해서 상속권이 엄존하는 한 바로 잡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평등 사회의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바꾸닌은 보았던 것이다.
한편 노동과 지성의 분리 또는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의 구별은 상속권 존폐의 차원을 넘어서는 좀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르조아 내지는 지배 계급이 내세우는 이른바 '역할 분담론'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지배 계급에 의한 과학 및 지식의 독점을 야기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존 사회에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구별은 예술 뿐만 아니라 연구, 발명, 행정, 산업 경영 등을 포함하는 고상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과 순전히 기계적인 육체 노동에 시달리는 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육체 노동이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 자체가 고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성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개명된 사람들도 매일같이 힘겹고 불유쾌한 "수노동(travaux manuels)"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수의술, 조산원, 해부학자, 유독 물질을 분석하는 화학자 등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통념은 이들의 작업을 평가절하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들의 노동에는 사상 내지는 지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모든 산업 및 농업에서의 노동도 지성과 결합되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배고픔을 면하려는 노동자에게 기계적 작접을 강요해 온 지배 계급의 지식 독점을 극복하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미래의 평등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일해야 하며 동시에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역할 분담론에 입각한 지배계급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모든 사람이 과학 또는 학문에 종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굶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일부가 교육받고 연구한다면, 또 다른 일부는 생산해야 하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정신 노동자들을 위해서이다. 정신 노동자들도 자신들만을 위해서 과학 발견 및 예술 창작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왜냐하면 기성 사회 조직 안에서는 산업 및 상업 발전이 프롤레타리아의 상대적 빈곤을 심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 발전이 프롤레타리아의 상대적 무지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즉 불평등 사회 속에서는 정신적 진보와 물질적 진보가 공히 프롤레타리아의 노예 상태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는 평등을 원한다. 그리고 평등을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포괄적 교육을 원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은 두 가지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첫째는 평등이라는 명분 속에 전체적인 수준이 하락된다는 것이며, 둘째로 아무리 평등한 실시하여도 성과마저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와 관련하여 역할 분담론자들이 표명함직한 우려는 노동자는 저급한 학자가 되고 학자는 서투른 노동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이 전체적으로 퇴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학자가 육체 노동을 생소하게 여기지 않게 될 때, 그의 지식은 좀더 성과적이고 유용하고 폭넓은 것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교육받은 노동자의 노동은 좀더 지혜롭고 결과적으로, 무식한 노동자의 노동보다, 좀더 생산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따라서 더이상 노동자 과학자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인간들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노동과 과학 양쪽 모두의 이해에 합치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바꾸닌은 평등한 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한시적 정체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 따르면 뛰어난 학자도 줄어들지만 아울러 무식한 노동자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화도 경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학자도 노동자도 인간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반에서 과학과 일상 생활에서 넘치는 휴머니티는 이제까지의 성과를 압도하게 된다고 바꾸닌은 낙관했던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들이 과연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시종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이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바꾸닌이 정작 중요시한 미래 평등 사회의 기반은 "출발선의 평등(l'?galit? du point de d?part)"이었다. 평등이 일단 확립된다고 해서 개인 능력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오히려 인류의 자산이 된다.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서 사회 구성원들은 상호 의존하게 되며 연대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과학도 역시 무수한 전문 분야의 하나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은 과학적 사고력을 배양하는 일반 과학에 대한 기본 교육이다. 다만 과학의 전문 분야는 기성 사회에서처럼 특권계급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노동에 대한 아무런 편견 없이 그 분야에 종사하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장애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과 분리된 신체적 힘이 우매해지듯이, 육체적 활동에서 분리된 지성은 쇠약해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 누구라하더라도 어떠한 타인의 노동도 착취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모든 개인이 사람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다양한 자질 개발과 발휘를 위한 평등한 조건을 구비한 사회가 건설되는 것이다.
Ⅴ. 마르크스의 권위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바꾸닌의 아나키즘은 제1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협회)의 주도권을 놓고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국가 사회주의 노선과 대립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사상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문제는 바꾸닌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자유론 및 혁명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바꾸닌 사상에서 국가란 자유를 억압하는 지배와 권위의 원천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혁명에서는 제1차적인 타도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무국가 사회의 건설이라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에 공통된 이상에도 불구하고, 국가 권력의 장악을 당면 목표로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바꾸닌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꾸닌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엘리뜨 지배를 합리화하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을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획일적이고 전제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마르크스주의 역사 철학의 기반을 이루는 경제적 '결정론'은 선진 공업국의 공장 및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발전 상태가 낙후된 사회에서, 즉 바꾸닌의 지지세력이 형성된 사회에서, 피억압 인민 대중이 주도하는 혁명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꾸닌은 마르크스 사상이 자유 쟁취의 원동력인 인민 대중의 반란 본능과 의지를 무시하고 경제적 요소만을 강조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A. 정치적 혁명 및 개혁 노선 비판
바꾸닌은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아나키스트가 국가의 파괴를 목적으로 삼는 데 반하여 마르크스주의자는 "국가의 정치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며, 전자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데 비하여 후자는 권위의 원리 및 실제에 대한 옹호자"인 것이다. 따라서 바꾸닌은 마르크스를 비스마르크와 동일한 국가주의자로 단정한다. 그의 표현을 빌면, 마르크스는 "비스마르크의 계승자(le continuateur)"인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목표가 거대한 "인민국가(Etat populaire: Volksstaat)"의 수립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작 '인민국가' 건설을 주창했던 것은 마르크스라기보다는 라쌀(F. Lassalle)이었다. 그렇다면 바꾸닌은 어떠한 근거에서 마르크스를 라쌀과 동일시하고, 더 나아가 비스마르크와 같은 부류라고 매도하였는가?
우선 바꾸닌이 마르크스를 또 하나의 비스마르크로 규정한 것은, 프로이쎈-프랑스 전쟁 발발 직후인 1870년 7월 20일 마르크스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보내어 당기관지인 <폴크스쉬타트(Volksstaat)>지 (9월 11일자)에 게재된 편지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정복될 필요가 있다. 만일 프로이쎈인들이 승리한다면, 국가 권력의 중앙집권화는 독일 노동계급의 중앙집권화에 매우 유용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독일의 부상은 유럽 노동운동의 무게 중심을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옮겨놓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쎈의 승리 후 마르크스의 분신이라고 할 엥겔스도 한 서신에서 비스마르크가 자국에서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이룩함으로써 혁명에 크게 봉사했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한편 바꾸닌은 이러한 내용의 서신에 접한 후, 프랑스의 재앙이 마르크스의 마음 속에 강한 희망을 일깨웠으며 동시에 비스마르크의 승리가 그에게 커다란 부러움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프로이쎈 왕정의 승리가 결국은 자신을 후견인으로 하는 위대한 "인민국가"의 승리로 조만간 귀결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엥겔스와 더불어 자위하였다는 것이다. 바꾸닌은 이러한 근거에서 마르크스를 비스마르크와 다를 바 없는 국가주의자로 규정하였다.
다음으로 바꾸닌은 어떠한 근거에서 라쌀의 '인민국가' 수립론을 바로 마르크스의 목표라고 주장하였는가? 바꾸닌은 라쌀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혁명이 아닌 평화적 개혁을 추구했다는 것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바꾸닌이 어떻게 개혁 노선보다 혁명적 노선을 추구한 마르크스를 라쌀과 동일시했느냐 하는 것이다. 방법론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꾸닌이 양자의 공통점으로 강조한 것은 어떠한 내용이며, 그러한 바꾸닌의 주장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양자에 공통된 국가주의 및 권위주의 경향에 대한 배격이었다.
라쌀이 자신이 조직한 당의 최우선적 목표로 내세운 것은 국가의 입법부와 행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보통선거권의 쟁취였다. 그런데 이 당은 엄격한 규율과 그 자신의 독재에 기초한 위계에 입각한 것이라고 바꾸닌은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라쌀과의 노선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터내셔널 속에서 이룩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라쌀의 생각으로는 당의 노력에 의해 합법적 개혁으로 보통선거권을 쟁취한 후 인민들이 자신들의 대의원을 단지 인민 의회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의회는 일련의 법령에 의해서 인민에 적대적인 부르조아 국가를 '인민국가'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인민국가의 첫번째 과업은 노동자들의 생산 및 소비 협동조합에 무제한의 신용 대부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후에야 비로소 이 조합들은 부르조아 자본과 경쟁할 수 있게 되며 얼마되지 않아 이를 이겨내고 흡수하게 된다. 이 흡수 과정이 완료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혁되는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쌀의 프로그램이며,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프로그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라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에 속하는 것이라고 바꾸닌은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1848년의 <공산당 선언>과 1864년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 임시총무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첫번째 <국제협의회 선언>을 제시하였다. 후자에는 '노동계급의 제일의 의무는 그 자신을 위한 정치 권력의 쟁취에 있다'는 표현이 있었다. 또한 전자에는 '노동자 혁명을 향한 제1보는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의 단계로 고양시키는 데 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의 수중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바꾸닌은 라쌀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똑같이 노동자들에게 최종적인 이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당면한 중대 목표로서 '인민국가'의 수립을 권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인민국가'란 바로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배계급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통치의 정상부에 있게 된다는 것인가? 바꾸닌은 여기에 강한 회의를 표시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인의 수만해도 약 4천만명인데 이들이 모두 정부 요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꾸닌은 전인민이 지배하게 된다는 이른바 '인민국가'의 내재적 모순을 국가의 속성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전인민이 지배하게 되고 지배받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된다. 그렇다면, 정부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하게 된다면, 지배가 존재하게 되고 노예제가 존재하게 된다. ... 노골적이든 은폐되었든 노예제 없는 국가란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국가의 적인 이유다.
국가를 말하는 자는 지배를 말하는 자다. 그리고 지배를 말하는 자는 착취를 말하는 자다. 그리고 이것이 증명하는 바는, 불행히 아직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의 표어가 되고 있는 '인민국가'라는 말이 가소로운 모순이며 허구이며, ... 또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매우 위험한 함정이라는 점이다. 국가는 아무리 인민적 형태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지배와 착취의 도구가 될 것이며, 따라서 인민 대중에게는 노예제와 빈곤의 영원한 근원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해답은 결국 대의제뿐이라고 바꾸닌은 지적하였다. 라쌀 노선과 마찬가지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구성원 선출을 위한 인민의 보통선거권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결론이었다. 즉, 이들이 의미하는 '인민정부'란 결국 인민에 의해 선출된 소수 대의원들을 통한 인민의 지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소수 지배층의 전제를 은폐하는 것으로서 인민 의지의 거짓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고 바꾸닌은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인민국가'의 지배층이 왕년의 노동자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일단 지배자나 인민의 대의원만 되면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며, 지배자의 높은 자리에서 육체 노동의 세계 전체를 내려다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바꾸닌은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 프롤레타리아 수천명에 의한 권력 행사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바꾸닌은 보았다. 결국 선출된 소수 집단에 권력이 위임되기 마련인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기만적인 대의제 내지는 부르조아 지배체제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바꾸닌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사람에 대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반론도 예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인민은 실제로 스스로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만들어진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에 복종하는 것이 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후견적, 지배적 소수의 자의에 종속되는 것이거나 또는 자의로 노예가 되는 것 이외의 것은 결코 아니다.
바꾸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소수자의 독재가 암시적인 것이며 단명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시적 독재의 유일한 관심과 목적이 일정한 단계까지 인민을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교육시키고 양육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지배가 이내 불필요해지고, 국가는 그 정치적 성격, 곧 그 지배적 성격을 상실하여 경제적 이해관계와 공동체들의 완전히 자유로운 조직으로 저절로 변모되는 단계이다. 바꾸닌의 관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모순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만일 그들의 국가가 진정으로 인민의 국가라면, 왜 그것은 해체되어야 하는가? 만일 그 폐지가 인민의 진정한 해방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감히 그것을 인민적인 것[국가]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결국 마르크스 및 라쌀의 국가주의 성향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바꾸닌은 '인민국가'를 포함하여 여하한의 국가도 전제와 노예제를 초래하는 "굴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너무 오래도록 지배받아 왔는바 그 불행의 원천이 이런 저런 형태의 지배(정부: gouvernement)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류를 막론하고 지배(정부)라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는 것이었다.
B. 엘리뜨주의와 권위주의 비판
자유의 열렬한 옹호자인 바꾸닌은 마르크스 사상에 내재된 권위주의 및 엘리뜨주의의 요소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특히 이러한 요소가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함의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것은 '과학'의 이름과 그 권위로 일반 대중을 지배하려는 소수 지식인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바꾸닌이 과학 자체를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모두 미신을 끝장내고 신앙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과학에 대한 옹호자"라고 보았다. 양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가 과학을 "전파(propager)"하고자 노력하는 데 반해서 후자는 이를 "부과(imposer)"하고 싶어 한다는 데 있다. 바꾸닌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전파로 마침내 확신을 얻은 인간 집단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에 부합하는 그들 자신의 운영에 의해서 창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밑에서부터 위로 스스로 조직하고 연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몇몇 우월한 지성인들에 의해서 미리 검토되고 "무식한 대중들에게(aux masses ignorantes)" 부과되는 계획에 의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꾸닌의 생각으로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그토록 많은 어설픈 시도에다 아직도 자기들의 노력을 더하는 척하는 모든 "박사들과 인류의 선생들"의 심오한 지성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인민 대중의 본능적 열망과 진정한 욕구 속에서 훨씬 더 많은 실천적 이성과 정신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권위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활발한 논의, 즉 노동자 세계 속에서 그 나름의 사상적 발전을 죽이게 되는 것은 바로 공식적 이론의 존재이다. 이러한 비상하게 위대한 두뇌의 고립된 활동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발견된 공식적 진리(v?rit? officielle)가, ... 즉, 마르크스의 시나이 산정에서 선포되어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는 진리가 있게 되는 순간부터 토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꾸닌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과학적' 사회주의의 노선에 입각한 혁명이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소수 엘리뜨의 독재 체제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아나키즘의 이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 노선에 따른 혁명 과업이란 구체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에 의한 재산가 및 자본가의 착취"와 "토지 및 자본의 몰수"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대한 경제적, 사회적 사명을 수행하려면 이러한 국가는 강력하고도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정부는 대중을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 - 생산, 부의 분배, 농업, 공장 건설, 무역의 조직과 통제, 유일한 은행인 국가에 의한 생산부문 투자 - 을 자기 수중에 집중시키며, 대중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방대한 과학(une science immense)"과 아울러 이를 담당하는 두뇌 집단을 필요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과학적 지성의 통치(le r?gne de l'intelligence scientifique)"로서 모든 지배체제 중에서 "가장 귀족적이고, 가장 전제적이고, 가장 오만하고, 가장 고압적"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계급, 새로운 지위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과학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소수"와 "무지한 대다수"로 양분되는 것이다. 라쌀과 마르크스의 저작과 연설에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학식있는 사회주의자',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말들이 오로지 증명하는 점은 이 사이비 인민국가라는 것이 새로운 "소수의 실제적인 귀족들"이나 "사이비 지식인들"에 의해서 인민대중에게 자행하는 전제적 지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배우지 못한 인민들은 그 때문에 모든 지배 업무로부터 해방되어 모두 지배당하는 무리로 편성된다. 바꾸닌은 "웬 해방이냐!(Khoroshcho, osvobodenie!)"라고 개탄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유는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병영 체제(un r?gime de casernes)"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획일화된 남녀 노동자들이 북소리에 마추어 기상하고 취침하며 일하고 살아 가는 것"이다. 반면에 능력과 지식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배의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꾸닌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란 오직 독재 - 물론 그들의 - 만이 인민의 의지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꾸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그 어떠한 독재도 그 자신을 영속화시키는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용인하는 인민 속에 오로지 노예제만을 잉태시킨다. 자유는 자유를 통해서만 ... 창조될 수 있다.
C. 결정론 비판
바꾸닌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이 이론은 역사적 발전 단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선진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이를 담당할 공장 노동자 및 도시 프롤레타리아에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바꾸닌의 지지 기반인 라틴권 유럽에서의 사회 혁명을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것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꾸닌은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 및 혁명의 추동력과 주체를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바꾸닌은 우선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과 그의 혁명 노선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함으로써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바꾸닌은 그의 국가론에서 비판을 시작하였다. 바꾸닌은 마르크스가 경제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비경제적 요소들을 지나치게 무시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에 있어서 국가란 "경제 여건의 산물"이자 그 "충실한 반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빈곤(la mis?re)" 즉 경제적 착취구조가 "정치적 노예제, 즉 국가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결론은 '국가를 바꾸려면 경제를 바꾸라'였다. 그 역은 마르크스에게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역이란 바로 바꾸닌의 노선이었다. 즉 "정치적 노예제인 국가는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서 빈곤[경제적 착취 구조]을 주체적으로 재생산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에 빈곤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분쇄해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경제적 결정론자인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적 노예제, 즉 국가를 빈곤의 실제 원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이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자파 세력,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에게는 정치 권력 장악과 정치적 자유 획득을 경제 해방의 필수불가결한 선행조건으로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엄격히 경제적 차원에서 생각하여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선진국에서만 혁명을 선도, 장악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역사적 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아나키스트들을 비판하는 점은 "역사의 완만한 진행을 재촉하고 앞서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연속적인 진화의 확고한 법칙(la loi positive des ?volutions successives)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꾸닌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외면했던 것이다. 즉, 각 종족 및 민족의 기질 및 특성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경제적, 역사적 제조건에 의해서 형성되지만, 일단 형성되면 경제적 조건과는 별도로 한 나라의 경제력의 운명과 발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바꾸닌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반란 본능의 정도(l'intensit? de l'instinct de r?volte)"였다. 그는 독일 민족성에는 많은 장점이 있으나, 이것만은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바꾸닌은 이러한 문제를 다가오는 사회 혁명의 주체와 직결시켰다. 즉 반란 본능이 결여된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사회 혁명을 주도하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이 다른 곳으로부터, 아마도 "남국으로부터(du Midi)" 이들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바꾸닌은 예상했던 것이다. 바꾸닌이 말하는 남국이란 남부 유럽, 즉 이딸리아 및 에스빠냐, 그리고 더 넓게는 프랑스를 포함한 라틴 문화권을 의미하였다. 또한 남부 유럽과 러시아에는 공업이 낙후되어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세력이 미약하지만 그만큼 부르조아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빈민 대중이 있었다. 바꾸닌에게는 이들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꽃(fleur du prol?tariat)"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꽃이란 무엇보다도 이 엄청난 대중, 문명화되지 못하고 혜택받지 못했으며 비참하고 글을 모르는 이 수백만의 사람들이다. ... 바로 정부의 이 영원한 먹이(cette chair ? gouvernement ?ternelle), 이 엄청난 천민 대중(cette grande canaille populaire)이다. 이들은 부르조아 문명에 의해서 거의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에, 자신들의 열정, 본능, 열망 속에, 그리고 자신들의 집단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모든 궁핍과 빈곤 속에, 미래 사회주의의 모든 씨앗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들만이 오늘날 사회 혁명을 유발하고 승리로 이끌기에 충분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꾸닌은, 마르크스가 경제 결정론에 근거하여 그리고 특히 독일 프롤레타리아를 염두에 두고 주목했던 공장 노동자와 도시 프롤레타리아보다는 반란 본능을 지닌 라틴권 유럽과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빈민, 천민을 포함한 인민대중을 사회 혁명의 주체로 파악했던 것이다.
Ⅵ. 결 어
바꾸닌은 1876년 7월 1일 베른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아나키즘의 종말이라기보다는 아나키즘 운동의 본격적인 서막이었다. 바꾸닌이 제1인터내셔널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그 이론 체계를 세웠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으로부터 19세기 말 - 20세기 초 아나키즘 운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이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꼬뮌주의적 아나키즘의 대표적 이론가인 끄로뽀뜨낀을 포함하여 Elis?e Reclus, Jean Grave, Sebastien Faure, Emile Pouget (이상 프랑스), Carlo Cafiero, Enrico Malatesta, Covelli (이상 이딸리아), R. Mella, A. Lorenzo (이상 에스빠냐), Johann Most (독일), August Spies, Albert Parsons (이상 미국), P.L. Lavrov (러시아) 등은 모두 바꾸닌의 계승자로 볼 수 있다.
바꾸닌 이후 아나키즘 운동의 전개는 본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로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다만 본 논문의 테두리 안에서 아나키즘 운동과 관련하여 필자로서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은 아나키즘 사상, 특히 바꾸닌 사상에 내재된 실천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바꾸닌 사상의 핵심적 부분인 자유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가 추구한 자유는 물론 개인의 자유이지만, 좀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개인의 자유'였다. 바꾸닌은 이를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그는 자유의 연대성 내지는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유의 고립성을 전제하는 사회계약론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즉 계약으로 자유의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성립되는 사회 이전의 상태 -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던 이른바 '자연상태' - 에서 가장 완벽한 자유가 존재한다는 계약론의 전제에 바꾸닌은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유는 본원적인 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바꾸닌에게 있어 자유란 인간이 사회 속에서 만들어 가고 확대해 가는 것이었다. 즉 자유란 실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었다.
자유가 연대적이라는 논리와 자유가 인간의 실천에 따라 창출된다는 논리의 결합은 바꾸닌으로 하여금 자유의 전사가 되도록 하였다. 바꾸닌의 자유론에서 한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한 민족의 자유로도 치환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피억압 민족이나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봉기의 성공 가능성 여부에 개의치 않고 어디든지 달려 갔던 것이다. 그는 빠리에서 1848년 2월 혁명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848년 6월 프라하 봉기와 1849년 5월 드레스덴 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시베리아 유형 생활에서 탈출한 뒤로 비록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지원하는 원정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1870년 9월 보불전쟁의 와중에서 발발한 리용 봉기에 참여하였으며 1874년 8월 불발로 끝난 볼로냐 봉기에 참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바꾸닌의 이러한 행동주의와 혁명 지향성이 바로 그의 자유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본다.
'WebAnarchi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재인 대통령 , 바이든 대통령 한·미 정상 공동성명 2021. 5. 22 (0) | 2021.05.23 |
---|---|
이스라엘 가자지구 침공과 아파르트헤이트를 규탄하는 한국 시민사회 기자회견 (0) | 2021.05.20 |
ESG 도구는 글로벌 과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1) | 2021.05.12 |
미래 2030(FUTURE 2030) 시리즈 (0) | 2021.05.07 |
국가 없는 사회주의 아나키즘, 미하일 바쿠닌 (0) | 2021.04.19 |
서울에 수달이 돌아왔다 / 염형철(사회적협동조합 한강 공동대표) (0) | 2021.03.26 |
결혼 생활에 도움을 주는 이혼을 이해하는 방식 (0) | 2021.03.16 |
세계 여성의 날 113주년 (0) | 2021.03.08 |
더욱 좋은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