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 춘천에 다녀온 단 하루였다. 춘천의 가을은 도시의 가을과 다르다. 냄새와 질감이 더 부드럽고, 단풍은 화려한 주황과 빨강으로 물든다. 매년 춘천 마라톤을 달리고 오면 계절은 획 지나가고 가을은 아주 선명하고 또렷한 느낌이 든다. 어제 대회를 치른 흥분이 남아 월요일 아침 햇살은 따뜻하고, 단풍은 주황색으로 물들고,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저녁이 오고, 하루 이틀은 역시 우울할 것이다. 몸은 4주에 걸쳐 천천히 풀코스를 달리기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모든 러너들이 겪는 일이다. 영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멋진 달리기를 마치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세상과 더욱 친숙해지고,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 느끼는 최고의 절정 경험은 점점 다음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잊힌다. 속절없이 눈부신 일이다.
이번 대회에 동호회에서 29명이 참가한다. 아침 6시에 서초문화원에서 전세 버스를 타고 간다. 팬데믹으로 3년 만에 대회가 열리는 공지천 유원지는 소란스럽고 정신없고 혼잡하다. 전설이 시작하는 곳은 늘 이렇다. 유일하게 서울이 아닌 곳에서 열리는 메이저 대회라 러너들의 얼굴은 환하고 젊은 러너들이 많아 열기가 뜨겁다. 중년 정도인 러너들은 훈련 부족과 체력 저하, 혹은 두려움으로 덜 참가하고 러닝크루, 번개 달리기, 스포츠 의류 메이커가 후원하는 클럽에 속한 청춘들의 참여는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워밍업 하는 러너들, 어김없이 큰 대회에서 사회를 맡는 배동성 아나운서의 멋진 목소리, 준비 체조 시간에 들리는 신나는 댄스 음악은 러너의 몸을 흥분시킨다. 2017년부터 4번째 출전하는 대회라 긴장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탈의실에 들어가기 전 어떤 모습으로 왔는지 사진을 찍고, 짧은 타이즈와 동호회 싱글렛으로 옷을 갈아입고 짐을 맡기기 전 대회 복장을 사진으로 남긴다. 준비 체조와 맨손 달리기로 몸을 푼다. 모든 준비는 빈틈없이 꼼꼼하게 하고 실전에서는 흐름에 따른다. 고수들은 다 그렇게 한다.
달리기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도 없고 스스로 정한 목표 이외에는 한계도 없는 운동이다. 복장이나 도구, 장소 어느 것도 꼭 지켜야 할 사항은 없다. 마음껏 달리든, 달리다가 멈추든 그것도 자신의 선택이다. 그래서 달리기는 다른 운동과 다르게 큰 자유를 갖는 유일한 운동이다. 어떤 것으로도 구속받을 이유도 없고, 제한할 것도 없다. 그러니 최대한 자유를 만끽하며 달린다. 유일한 경쟁자는 자기 자신이다. 이전 대회보다 더 잘 달리기 위해 대회에 나가는 것이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원하는 빠르기로 알맞은 거리를 달린다. 자유를 얻고 싶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 달린다.
이전 대회, 그러니까 2019년 대회 기록을 기준으로 옷에 부착하는 배번을 부여한다. 마지막 대회에서 풀코스 3시간 46분 기록으로 C조 배번을 받았다. 처음 대회에 출전하는 사람은 F조에 속한다. 춘천 마라톤은 풀코스와 10km, 새로 만들어진 하프코스 참가자까지 약 2만 명이 참가하는 대회다. 출발 5분 전에 천천히 출발선으로 간다. 앞에는 엘리트 선수와 기록이 좋은 A조, B조 선수들로 가득하다. 각 조가 출발할 때마다 함성으로 카운트 다운을 하고 하늘에는 불꽃이 터진다. 아나운서는 일일이 선수를 호명하고 마라톤 동호회 이름을 읽어준다. 여름이 갈 무렵 미국 출장과 귀국 후 코로나 확진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달리기는 꾸준히 했지만 장거리 훈련이 부족했다. 풀코스를 3시간 30분 안에 들어오는 330은 잠시 연기한다. 현실적인 구체적인 목표로 4시간 안에 완주하자고 생각했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의 전설 춘천마라톤 풀코스는 의암호를 가운데 두고 아래는 의암댐, 위로는 춘천댐을 돌아 출발지점인 공지천으로 돌아오는 환상적인 코스다. 10km까지 54분, 하프 거리를 지날 때는 1시간 54분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제 반 남았다. 온 만큼만 한 번 더 가면 된다. 25km 구간은 가장 멋진 구간이다. 중간중간 터널에서 함성도 지르고, 의암호 건너편으로 춘천댐을 돌아오는 실력 있는 러너들의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산은 온통 단품으로 불이 붙은 듯한데 그 사이를 러너들이 무리 지어 달리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30Km를 2시간 45분에 지날 때만 해도 목표인 Sub4는 당연히 달성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뿔싸, 역시 32km 지점은 모든 러너의 영혼이 막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갑자기 이렇게 멋진 곳을 달리는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대회에서든 32km를 넘어서면 "아, 좀 걷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고, 도심이라면 피니시 라인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줄 지하철역이 없나 하고 살피는 지점이다. 지금부터 마라톤은 다른 성격을 갖는다. 얼마나 인내하고 참을 수 있는지, 그동안 쌓았던 멘털이나 육체적 강인함과 훈련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럴 때는 목표를 아주 낮게 가져간다. "단 1킬로미터만 더 달리자."라고 생각하거나, "35km까지만 달리고 거기서부터 걷자."라고 자신에게 말한다. 아니면 욕지거리를 들리지 않게 한다. 달리기는 모든 1km가 힘들다. 걷고 달리고, 또 걷고 달리면서 마라톤 시계를 보지만 4시간을 넘긴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마라톤을 사랑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회에서 지키는 세 가지 원칙은 즐기고, 걷지 않고, 완주하기라고 하는데 이미 걷고 있으면서 갑자기 생각난다. 이제 5km 남았다. 옆에서 걷던 젊은 러너가 지친 모습으로 "이제 끝내자. 어서 달려서 이 지긋지긋한 경주를 끝내버리자."하고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는 느낌이 왔다. "그래 진짜 빨리 끝내고 싶다. 어서 피니시 라인까지 달려서 끝내자."는 생각으로 달리지만 쉽지 않다. 여기저기 마실 것을 건네주며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거지가 되기로 한다. 음료수, 물, 콜라, 맥주, 먹을 것을 구걸하며 마지막 안간힘을 낸다. 멀리 피니시 라인이 보인다. 여기까지 영혼이 빠져나가지 않게 꼭 잡고 달리느라 힘든 경주였다.
"하, 이제 다 끝났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메시지로 날아온 기록은 4시간 23분이었다. 긴 공백과 몸 상태를 생각하면 나쁜 기록은 아니었고 마음에 들 만한 좋은 기록도 아니다. 누구도 팬데믹을 예측하지 못했다. 매년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없으니 목표를 정할 수 없어서 대부분 아마추어 러너들의 기록은 낮아졌다. 마찬가지로 막 출발선을 벗어난 러너는 마지막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때까지 무엇도 앞 일을 알 수 없다. 마지막 피니시 라인의 체크기를 통과할 때 들리는 경쾌한 신호음이 울릴 때 러너의 훈련과 인내한 고통, 다음 대회 성적까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달리기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운동이다. 러너마다 다른 동기를 가지고 달리기 시작하고, 다른 의지를 갖고 있고, 달리는 자세가 다르고 완주하는 목적이 다르고 실력이 다른 것처럼 구체적이다. 러너는 실제적인 사람이라서 풀코스를 달리는 과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몸이 늘어져 귀찮아도 편한 복장으로 집을 나서고, 신발끈을 매고, 주로에선 항상 겸손하게 달린다. 우리의 몸만큼 정직한 것은 없기 때문에 실제적이다. 몸은 마음을 움직이고, 동일하게 마음은 육체적 행위로 전환된다. 달리는 걸음에 번호를 붙이고, 기합을 넣는 것, 일정한 속도로 4시간 동안 같은 동작으로 쉼 없이 달리는 일이 모두 그렇다.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은 삶이 고통스럽거나 지겹기 때문이 아니라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목표로 했던 기록, 대회를 위해 열심히 달린 훈련, 점점 좋은 기록이 쌓인 이전 대회들을 포함해 결국 모든 것은 마지막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때 결정된다.
마라톤에는 운도 존재하지 않고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훈련과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42km를 달리며 어떤 구간에서 나의 페이스와 가장 잘 맞고 조금은 좋은 기록을 내는데 적당한 주자를 바싹 붙어서 함께 달린다. 어떤 지점에서 그 주자가 뒤처질 수도 있고, 내가 힘이 달려 점점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럼 새로운 주자를 또 찾는다. 운이 좋다는 것은 이런 운을 말한다. 이런 것을 만나기에 앞서 육체에 있어 강인함과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무엇보다 받쳐주어야 한다. 사람 대부분은 단기적으로 얻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장기적으로 얻는 것을 과소평가한다. 달리기는 정말 눈에 보이지도 않게 나가다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가능해지는 날이 온다.
삶에서 가장 이루고 싶은 일들, 갖고 싶은 것들은 사실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거지 근성을 버리고 어떤 변화가 필요할 때 과감하게 도전하고 늘 배우고 성장하고 영감을 주는 정신의 문제다. 나의 두 발과 곧은 다리, 건장한 가슴과 냉철한 머리에 감사하고 모든 주어진 날들에 또 감사한다. 가을의 전설 춘천 마라톤, 단풍이 아름다운 주로, 김유정 역, 한가족 닭갈비를 내년 가을에 다시 만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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