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저

지구빵집 2023. 1. 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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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리옹의 라크루아루소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원 자격 실기시험을 친다. 시험은 두 명의 문학교수 심사위원 앞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었고 결국 합격했다. 정확히 두 달 후에 67세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여자는 딸과 남편을 데리고 어머니가 살아계신 집을 방문한다. 

 

오로지 본 것만을 쓰는 건조한 글, 흐름을 아주 넓은 띄어쓰기로 표시하는 것, 말하는 것은 늘 자기가 보고 들은 내용을 직접 적는 서술 방식을 택하는 것들이 모두 아니 에르노 소설의 특징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책 맨 앞부분에 적은 글쓰기에 대한 인용구가 보인다. 이것도 한 가지 특징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설명해보려 한다.
글쓰기란 우리가 배신했을 때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 장 주네

 

 

여자는 자기에게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선 안된다고 한다. 여자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은 글이라고 말한다. p.19

 

모든 부모는 아이 에르노의 부모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도 그랬고, 친구의 아버지도 같았고 지금 살고 있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유전자, 아니면 이런 것도 문화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큰 차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삶이 흐르는 속도와 방향은 같고 차이가 있다면 강도 intensity 뿐이다. 누가 더 깊은 함정에 빠지고, 누가 더 높은 곳에 오르고, 모든 부모에게 거쳐가는 잔혹한 사건과 상황이 누구에게 더 야만스러운지 그 정도만 다를 뿐이다. 

 

아버지는 아침 다섯 시에 소젖을 짜고, 마구간을 비우고, 말들의 털을 빗겨주고, 저녁에 소젖 짜는 일을 다시 시작한다. 아버지는 활발한 성격에 노는 것을 좋아했고, 언제나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장난을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모임에 자주 나가서 춤을 췄고 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1차 세계 대전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고 싶지 않아 산업화가 막 시작되는 끈 제조 공장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마가린 공장에서 일하다가 끈 제조 공장에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는 잡지에 나오는 유행을 따라 하길 원했고, 처음으로 머리를 잘랐으며, 짧은 원피스를 입고 눈화장을 하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랐다. 활기차고 당찬 여공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즐기는 말은 '내가 저 사람들보다 못하진 않아'였다. 

 

어머니의 제안으로 가게를 연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열등하지 않았다면 분명 알 수 있었던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p.54

 

그가 대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옳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음식을 먹는 태도 혹은 말하는 방식을 지적했다. 그에게 바캉스를 보내 주지 않는다고 비난했다면 나 자신이 부끄러웠을 테지만, 그의 태도를 바꿔주려고 했던 것이라 정당하다고 확신했다. 어느 날 그가 이렇게 말했다. "책, 음악, 그런 건 너한테나 좋은 거자. 내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 없어." 

 

 

책의 원제는 La place 자리였다. 이것이 영어 번역 제목이 'A Man's place'로 되면서 남자의 자리로 책 제목이 되었다. 언어는 늘 한계를 정한다. 언어와 말, 책으로부터 멀어져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찾아 기쁘다.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어느 어떤 자리에 있는 걸까? 요즈음 자주 드는 생각이다. 3시 30분에 사업단 단장을 모시고 시무식을 회의실에서 한다. 1월 2일 2023년 근무 첫 날이다. 

 

 

 

사무실 이사 기념.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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