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저

지구빵집 2023. 1. 1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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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은 한 여인의 범상치 않은 사랑 이야기다. 주인공은 연하이면서 유부남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와 헤어진 후 사랑이 남긴 기억을 되돌아본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고백이 보여주듯이 사랑이 남긴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사라지는 것들이다.

 

1991년 출간한 이 작품은 실제 작가의 경험이라는 것, 남자와의 불륜 체험이라는 사실로 파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책을 출간하기 몇 젼 전 1988년 이 소설에 등장하는 A(소설 탐닉에 등장하는 S(B)와 동일 인물)를 만난다. 몇 년 뒤 '단순한 열정'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독자이자 아니 에르노의 애인이 된 33년 연하의 필립 빌랭이란 청년이 나타난다. 이 청년은 그녀와의 5년간의 사랑을 '단순한 열정'의 문체까지 거의 그대로 옮겨 '포옹'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사랑은 그 자체에 이미 광기가 들어 있어 사랑에 미쳤다는 말은 중복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남자와 여자를 기억하고 환기하는 과정이 전부지만, 머지않아 모든 게 흐릿해지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소중했던 사랑의 기억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낼 수는 없다.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잊힐 수밖에 없는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붙잡아두려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올지라도...

 

'단순한 열정'은 67페이지의 제법 간략한 자전적 소설이다. 한 남자를 기다리는 -그 이유가 섹스 때문이라도- 여자의 심리 묘사를 놀라울 정도로 집요하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책 말미에 이재룡 문학 평론가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글쓰기' 해설에 아니 에르노가 발표한 작품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한다. 오히려 소설보다 더 잘 썼다.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연보에는 이 글 처음에 나오는 내용들이 연대 별로 잘 실려 있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져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p.27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p.36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사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p.52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갈망했던 지난해 봄 그 사람을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p.59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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