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이 책의 원제는 "le sacre des pantoufles" 번역하자면 슬리퍼 대관식이다. 사람은 모두 바람으로 머물다 간다.
책 속으로
새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 그리고 신체가 냄새, 소리, 빛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화면은 화면일 뿐입니다. 빗장을 걸고 집에만 처박혀 산다면 안전을 위해 죽음과도 같은 권태를 대가로 치르는 셈이지요. 먼 곳을 내다볼 수 없는 초저공비행 같은 삶은 감옥 생활, 늘어진 속도의 삶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벌써 피곤한 삶입니다. 그런 유의 정신적 댄디즘은 시간과 세월의 흐름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끔 주도면밀하게 애를 씁니다. 그러한 삶은 때 이른 노년을 불러들여서 청년을 노인처럼 만듭니다. --- p.7~8, 「한국어판 서문|가능성의 문을 되도록 많이 열어놓기를」 중에서
우리는 스마트폰이 엄청난 사건을 불러일으키거나 예고하길 바란다. 이 도구로 인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늘 연결되어 있을 수 있지만 기다림은 더욱 참기 어려워진다. 그 사람이 왜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까? 당신은 기계에 문제가 생겼거나, 배터리가 방전됐거나, 전화가 안 터지는 곳에 있거나, 스마트폰을 도난당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잔인하다. 그 사람은 그저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p.61, 「스마트폰|내게 멋진 일이 생기리라 말해다오」 중에서
집에 나 혼자뿐이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면, 성스러운 장소가 감옥이 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나는 모든 구석에서 나 자신과 부딪힌다. 더 이상 “밖”이 없다면 “안”은 존재 이유를 잃는다. 안팎이 없는 닫힌 장소가 될 뿐이다. 세상의 거대한 빛, 불시의 아름다움이 끊임없는 왕래를 통하여 삶에 의미를 더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다. --- p.117~118, 「집|매여 사는 삶의 고통과 기쁨」 중에서
보들레르는 이렇게 말했다. “자고 또 자는 것, 그게 지금 나의 유일한 소원이다. 비겁하고 역겨운 소원이지만 진실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잠은 규칙적으로 심연으로 내려가는 행위다. 죽음은 존재를 삼켜버리지만, 잠이라는 작은 죽음은 존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효율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중이다. “우리는 침대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내고 나머지 절반에서 겪은 슬픔도 잊는다”고 18세기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는 말했다. --- p.127~128, 「잠|침대 위에서 보내는 절반의 인생」 중에서
슬리퍼 차림의 영웅, 모험가, 특파원을 상상할 수 있는가? 슬리퍼를 벗을 일 없는 삶은 구두나 스니커즈를 신고 리듬감 있게 걸어가는 삶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평소 흠모하던 대상, 가령 위대한 작가나 배우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가 후줄근한 차림새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었다면? 동경하던 대상의 범속함을 직시하게 되는 괴로운 경험이다. 그래서 헤겔이 남긴 유명한 말을 항상 되뇌게 된다. “자기 시종에게까지 영웅인 사람은 없다. 영웅이 진짜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시종은 시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 p.168, 「슬리퍼|리듬감 있게 걸어가는 삶이란」 중에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기예보는 젊은 여성 기상 캐스터가 진행하는데, 얼굴 표정으로 좋은 소식 혹은 나쁜 소식을 나타낸다. 살짝 찌푸린 얼굴은 흐린 날씨 혹은 비 소식을 예고한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 따뜻하고 맑은 날이 온다. 추위와 폭우가 연일 이어질 때는 기상 캐스터가 나쁜 소식의 전령이 되어 괜히 미움을 산다. 어떤 상황에서든 일기예보는 진지한 예측과 배려를 요구한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옷을 따뜻하게 껴입으라든가, 비가 오면 우산을 챙기라든가. 이제 일기예보에서 옛날처럼 유쾌한 분위기는 용납되지 않는다. 기후는 전쟁이고, 기후에 신경 쓰지 않는 자들은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어떤 예보든 심각한 어조로 전달하지 않으면 무책임해 보인다. --- p.183, 「일기예보|날씨와 마음의 상관관계」 중에서
안과 밖의 생산적 긴장은 문과 덧문이 살짝 열리면서 양측의 공기가 순환할 때 발생한다(서로 더 잘 연결되기 위해 국가와 국가를 분리하는 국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우리를 마비시키는 불안에 대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우아함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역경과의 정면 대결이다. 폐쇄 혹은 개방의 독단주의 대신 다공성(多孔性)을, 절제와 용기 사이의 적절한 간격을 추구해야 한다. 그 사이에서 창조적 충격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의 맛은 언제나 다양한 영역의 충돌 속에 있다. --- p.240, 「에필로그|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에서
목차
한국어판 서문: 가능성의 문을 되도록 많이 열어놓기를
프롤로그: 그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1부 여전히 삶은 경이로운가
빗장|간수는 우리 머릿속에 있다
여행|자기 방을 떠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스마트폰|내게 멋진 일이 생기리라 말해다오
일상|운명이 가장 낮은 길로 나아갈 때
사생활|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
방|괄호가 쳐진 (세상)
집|매여 사는 삶의 고통과 기쁨
잠|침대 위에서 보내는 절반의 인생
2부 당신의 세상은 문밖에 있습니다
모험심|조이스틱을 잡고 드러누운 모험가들
슬리퍼|리듬감 있게 걸어가는 삶이란
일기예보|날씨와 마음의 상관관계
에로스|관능이 몰락한 시대
탈주|내 방을 여행하는 법
실존|1년 365일, 365개의 운명들
루틴|모래알 하나에도 화가 난다면
에필로그: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자 후기: 영원한 방황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개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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