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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서재

세월 -김형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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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딸들은 어머니의 인생을 닮는가.

 

남에게 침을 놓을 때는 제 몸에 천 번을 놓은 다음에 해야 한다.

 

면도사는 고무풍선에다가 면도 연습을 하고 간호사는 사과에다가 주사 연습을 한다고 들었다.

 

차는 눈으로 마시고, 코로 마시고, 그다음에 입으로 마신답니다.

 

이 주전자는 인체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따다가 만들었대요. 뚜껑은 여자의 젖가슴, 여기 주둥이는 어린 아기의 고추.

 

탐욕스러운 마음, 진노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그 세 가지가 마음에 독소의 뿌리를 내리는 요소라는 뜻일 거다. 탐진치 삼독. 버리고 또 버리고 탐진치 삼독도 버리고, 몸 안에 푸릇푸릇 자라는 독소를 버리고...

 

어떤 물체든 밀폐된 공간에 오래 두면 썩는다. 썩으면서 독소와 가스를 내뿜는다. 그리하여 모든 걸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여자는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왜 몰랐겠는가. 이미 반야심경을 밑줄 그어 가며 읽은 일이 있는데. 그러나 그때는 그저 지적 호기심으로 읽었다. 이제, 마음 깊은 곳에서 한때의 지적 호기심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눈을 뜬다. 그 지식에 발을 달아주어야 한다고.

 

절대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힘든 거야 어디나 마찬가지지요.

 

그 여자는 평소에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견성암에 묵을 때는 늘 일기를 쓴다. 견성암에 묵으러 갈 때면 새 공책을 하나 준비해 가서 거기에 마음을 정리해 온다. 그 여자에게는 ‘견성암 일기’라는 제목이 붙은 공책이 다섯 권 있다. 적어도 열흘 이상 묵을 때만 별도의 공책에 일기를 쓴다. 견성암 일기는 여간해서는 다시 펴보지 않는다. 다시 펴보지 않으면서 버리지도 못한다.

 

잿빛 바바리는 아마, 그 여자 속에 있는 어떤 사랑, 대상은 없지만 사랑한다는 행위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설정해 둘 필요가 있는 어떤 대상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든 것이라고, 산속에 혼자 앉아 오직 마음만을 닦아온 사람에게도 삶은 힘든 것이라고 일러준다. 견성암이 그 여자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고통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자신의 자리는 자신이 만들고, 자신의 권리는 자신이 찾아야지. 무엇보다 사람은 어딘가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세상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지.

 

어느 신문사나 다 그렇겠지만, 신문에서 잡지로 발령이 나는 것은 그리 영예로운 일이 아니다.

 

말이 없는 사람은 대체로 두 부류다. 단순히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과, 자의식이 강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 이제 그 여자는, 모임 같은 데서 한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 그가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인지, 아니면 터무니없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을 터놓지 못한 채 사람들과 융화되지 못하는지를 가려낼 수 있다. 그 여자가 말이 없던 시절, 그 여자의 내부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있었으므로.

 

일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그것을 힘들어한다. 좋고 싫음이 너무 분명해서 어떤 일로 한번 실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여간해서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향해 웃어 보이는 일도 어렵다.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사람을 알아본단다.

 

언제나 주인보다도 더 높은 소리로 짖는 개의 속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만.

 

‘나는 책에 속았다.’ 그 여자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결함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격언을 너무 믿었던 데 있다. 더구나 그 습관은 이미 열두 살 때부터 몸에 배어 있다. 혼자 세상을 터득해 나가면서, 무료할 때도 책을 읽고 문제에 부딪힐 때도 책부터 찾는다. 책 말고는 누구도, 그 여자의 무료함이나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이 없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세상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배우기 전에 먼저 책 속의 현실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식탁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배웠을 세상을 그 여자는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배웠다. 그 여자가 아는 세상은 모두 책에서 배운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무엇이든 책에서 찾으려 하는 버릇이 있다.

 

죽음을 꿈꿀 때는 죽음에 관한 책을 사서 읽는다. 그저 죽어버리면 그만일 것을, 자살에 관한 책을 무더기로 사다 읽는다. 운동을 할 때는 그저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될 것을, 또 득달같이 관련 서적을 찾으러 간다. 이 사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궁금하면 직접 세상에 나가보면 될 것을, 사회학에 관한 책을 구해 읽고 작가 연보나 자서전을 읽는다. 사랑과 성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는 직접 사랑을 해보거나 성에 뛰어들면 좋을 것을, 또 그것에 관한 책만 사다 읽는다. 모든 문제는 거기 있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 그 위대한 명제에 속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급기야, 더 위대하고도 장중한 결론을 내린다. ‘나는 책에 속았다.’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는 손주나 책을 많이 읽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른들의 마음을 이제 그 여자는 이해한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현실 속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과 허구들, 그 인물들의 사유의 극단 같은 것을 너무 많이 익히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면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 늘 소설에서 배운 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소설적인 행동이란, 모든 소설들이 그렇듯이, 의식이 극단화되고 감정이 예민하게 얽히고 주인공은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고 마는, 그런 행동이다.

 

생각해 보면, 그 여자의 삶이 그토록 소설적인 갈등과 긴장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모두 스스로 만든 결과일 것이다. 어떤 선택의 순간에,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에, 늘 소설 속에서 배운 척도를 들이댄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떻게 소설적이지 않겠는가. 모든 게 자업자득이다.

 

그 여자는 혹시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게 되면, 절대로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나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일찌감치 감수성을 개발하거나 자의식을 강화시키는 교육도 시키지 않을 것이다. 굵은 신경을 가지고, 사물을 그저 사물로만 받아들이고, 전자오락이나 운동을 좋아하는 튼튼한 아이로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날 한 일을 반성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너무 많은 교훈을 들려주지도 않을 것이며, 일찍부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각도 키워주지 않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런 생각들 역시 그 여자가 아직 버리지 못한 자의식일지도. 그 여자는 하나하나 세상과 불화하는 요소를 찾아낸다. 이상주의적인 어머니의 가치관, 책에서 세상을 배운 오류. 그것들 위에 또 하나 잘못된 점을 집어낸다. 그 여자의 어떤 기질. 그 여자는 열두 살 이후,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해서 혼자 결정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처리하는 버릇이 들어 있다. 그건 자주성일 것이다. 그 여자는 늘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왔다. 아니다 싶은 길에서는 미련 없이 돌아서고 전망이 불투명한 때에도 그 일이다 싶으면 끝까지 버틴다. 교직을 그만둘 때도, 그 후 희망 없는 실직의 나날을 견딜 때도, 입사 권유를 두 차례 사양한 것도, 일상의 이런저런 일들을 스스로 판단해서, 혼자 결정하는 것. 그건 자주성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마, 그 자주성이 그 여자를 버텨준 힘이고 성장시킨 양분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그러나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선배에게 물어보면 10초 만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혼자 해결하겠다고 종일토록 시간만 허비하는 일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한 번의 손짓으로 알 수 있는 집 찾기를, 약도를 보며 한 시간씩 헤매기도 한다. 살면서 그런 일은 자주 있었을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물어보면 될 것을, 스스로 알아내려고 맛보다가 똥을 먹은 일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어울려 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자주성이나 독립심은, 말을 바꾸면 곧 독선이나 배타성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렇다. 그 여자는 고집불통이고 독선적이었다.

 

그 여자는 세상과 불화하는 자신의 모든 요소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 땅에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불합리함을 인정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도덕적 금욕주의적 척도를 버려야 하고, 무엇이든 혼자 하려는 독선적인 태도도 고쳐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때까지도 극복하지 못했던 어두움, 그 고통스러운 상처의 후유증을 빨리 치유해야 한다. 자의식과 감수성까지 버린 마당에, 또 그토록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버리다가는, 나중에 자신의 존재마저 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버리는 것. 그리하여 아무것도 없는 곳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즉시색이다.

 

그 여자는 도통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편안한 곳, 그러나 세상이 환히 보이는 마음의 자리에 도달하고 싶다. 안으로는 그런 것들을 개선해 나가면서, 겉모습도 바꾼다. 아직도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 어려 보이는 얼굴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 문제가 된다고 판단한다. ‘그 나이에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던 선배의 의견도 수용한다. 드디어 화장을 시작하고 부인복 전문 브랜드의 옷을 고르고 액세서리를 한다. 그 여자의 겉모습이 갑자기 달라지자 다들 한두 마디씩 한다. ‘돈 벌어서 다 옷 사 입는 모양이지?’ 선배의 말이다. ‘김정숙 씨는 왜 그렇게 아줌마 같은 옷만 입지?’ 동료의 말이다. 그 여자는 늘 웃고 만다.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2백 자 원고지 1백 매 분량은 될 만큼 그 행동의 배경과 이유와 목적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늘 자신을 들여다보며 살고, 머리가 아플 때까지 생각하고, 내적 정당성을 찾아야만 실천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누구에겐가 해명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 말은 자칫 궁색한 변명이거나 자기 합리화로 들리기 십상이다. 다들 그 여자의 변화에 대해 의아해한다. ‘정숙아, 네 의상은 직업여성 같아. 커리어 우먼이 아니라 왜 있잖아, 어떤 특별한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들.’ 친구는 그렇게 말한다. ‘김선배, 늘 약혼 전야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후배도 있다.

 

그 여자는 매번 웃고 만다. 한 살이라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 위해, 이 세상과 어울려 살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서투름이다. 그런 식으로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태도로, 조금 더 완만하고 능숙한 개선을 꾀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토록 갑자기 대척지로 옮겨 서다니, 입가에 웃음이 고인다.

 

그 여자는 드디어,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나고, 책들이 심어준 환상에서 벗어나고, 내부에 있는 고집과 독선을 버린다. 감수성을 무디게 하고 자의식의 껍질을 깨려 노력한다. 그러면서 비로소 세상 속으로 들어서는 길을 찾아 나선다. 그제야. 왜 통속적이라는 말을 그리도 부정적으로 인식했는지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통속이다. 이 세상의 본질과 통하고, 이 세상의 흐름을 관통하는, 바로 그 통속의 길이다. 통속적이 되리라. 스물일곱에야, 겨우 그런 다짐을 한다.

 

변진섭으로서는 그 여자가, 가장 처음 만난 기자였을 것이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자본의 논리이고, 모든 산업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군수산업이든, 미용산업이든, 문화산업이든, 언론산업이든, 대중음악 잡지를 발행하는 것도, 야한 미혼 여성지를 내는 것도, 강경한 논조의 시사 종합지를 내는 것도, 결국은 이윤을 얻는 데 목적이 있다. 매체에 따라 그토록 입장이 다른 기사를 싣는 것도, 각 매체의 독자들이 원하는 취향에 맞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여자는 그 의문을 명쾌하고 산뜻하게 마무리 짓는다.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대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모든 산업의 궁극 목적도 받아들여야 한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함을 인정해야 한다.

 

대중이라는 말은 프랑스 산업혁명 이후에 생겨난 말이다. 시민들이 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기 시작하자, 그동안 그들을 지배해 온 귀족들은 그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대중이라는 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도 대중문화라는 말로 지칭한다.

 

문화는, 귀족의 치마폭에서 나온 돈으로 연명하기보다는, 시민들 사이에서 그들의 정서를 담아내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대중문화라는 말에 담긴 뜻을 찬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여자가 연예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대중음악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유포시키는 사람들은 모두 기성세대라는 점이다. 대중문화를 만드는 음반 제작자도, 그것에 거대한 환상을 담아 파는 유통업자도, 그것을 유포시키는 방송인이나 언론 종사자도, 모두 기성세대다. 실제로 가수 개인이나 그 주변의 뮤지션들은 연예 제작자나 영향력 있는 매스컴에 의해 존폐가 좌우된다. 그들의 음악적 개성이나 음악적 생명조차도. 청소년들은 그저, 어른들이 주는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또 하나 슬픈 일은, 가요에 대한 심의제도라는 것을 일제시대 때 처음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30년부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의 의지를 보이는 모든 곡이 금지곡으로 분류되기 시작한다. 최초의 금지곡은 1930년, 채규엽의 <봄노래>다. 지금 공연윤리 심의위원회가 그 제도의 연장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우울하다. 이제 그 여자는 모든 걸 이해한다. 대중문화의 뿌리에서 그 가지까지. 모든 것을 수용한다. 연예인들이 간혹 대마초를 피우거나 마약을 복용하다 적발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그것까지 이해한다. 그 기사의 논조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이 우울해질 정도로. 그 일을 견디려면, 그 과중한 압박감과 과다한 스케줄, 아슬아슬한 관계들을 견디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과중한 스케줄과 누적된 피로로 힘이 하나도 없을 때, 그러나 당장 무대에 올라가야 하고,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불러야 하고, 그냥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이 요구하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세계를 제시해야 한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누군들 대마초 정도 복용하지 않겠는가.

 

연예 일을 하던 시절, 가수들 사이에서 그 여자의 별명은 ‘입가의 점’이었다고 한다.

 

그 여자는 불쑥 노래를 시작하여, 낮고 느리게 노래하다가, 정전처럼 아무 때나 끝낸다.

 

그 여자는 음악에 관한 한 코스모폴리탄이다. 트로트에서 클래식까지, 판소리에서 하드 록까지. 정선아라리에서 오페라까지를 모두 사랑한다.

 

위대한 음악가 중에 여성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그 여자는 겸허하게,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음악은 책처럼 그 여자를 속인 일이 없다.

 

그 여자는 이제 거의 치유된 것 같다. 마음 내부의 상처도 치유되고 세상으로 통하는 길도 알아낸다. 세상의 불합리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던 자신의 문제를 개선해 나간다.

 

그 여자는 이제, 사진과 사람이 다르다. 글과 사람이 다르다. 목소리와 사람이 다르다. 심지어는 소문과 사람이 다르다, 그런 얘기들에 그리 놀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어느 한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백치인 상태가 있는 법이다. 아니, 다르게 말하자. 누구나 자신이 관심을 갖는 분야 이외에서는 백치가 되기 마련이다. 관심 분야에 대한 집중이 크면 클수록 그 이외의 부분은 더 소홀하게 취급될 것이다. 그 여자에게도 완전히 백치인 분야가 둘 있다. 그 여자는 우선, 수리나 이재에 관해 완전히 백치다.

 

그 여자가 백치인 또 하나의 부분, 그건 사랑과 성에 관한 부분이다. 소설을 쓰는 일이나 과학자가 되는 일은 혼자서 노력하는 만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이 너무나 유동적인 어떤 대상과의 공동 작업이다. 감정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고, 의중의 캄캄한 속을 짚어나가야 하고, 적당한 때에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지 않은 때에 맞추어 마음을 열어 보여야 한다. 그것도 적당한 만큼만. 그러나 그 적당 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늘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모든 행위가 자주,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만 여겨진다. 그 여자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두운 감정의 복마전의 양상을 띠면 벌써 물러난다. 한 남자를 놓고 두 여자가, 혹은 한 여자를 놓고 두 남자가, 호전적인 긴장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진저리 친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말에 놀란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지 어떻게 싸워서 얻는 것인가. 너무 유동적이고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감정의 영역을, 어떻게 싸워서 얻는가.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성도 잘 모른다.

 

성과 사랑은 다른 것이다. 사랑은 정신과 영혼의 문제이고, 성은 육체의 문제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랑은 허리 위의 문제이고 성은 허리 아래의 문제이다.

 

결혼을 하지 않을 거면 어떠한 관계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 내미는 어떤 관계도 거절한다. 주변에는 그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 여자 역시 그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섣불리 관계를 시작했다가 막상 결혼하자는 말을 꺼낸다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는가, 더구나 상대방이 받을 상처를, 그런 마음으로 손 내미는 어떤 관계도 외면한다.

 

그 여자는 짝사랑을 한다. 대상이 누구든, 사랑한다는 마음을 품고 있을 필요가 있다.

 

사랑은 감정의 이끌림이고 성은 육체의 이끌림이다. 정신과 육체가 전혀 별개의 영역에 있듯이 사랑과 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성이란, 잠을 자거나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일 뿐이다. 자주 설사를 하는 사람과 늘 변비에 시달리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체내에 쌓인 욕구를 배설해야 한다. 그건 큰창자에 똥이 쌓이거나 오줌보에 소변이 고이면 화장실에 가고 싶은 욕구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누는 똥의 양이 비슷하듯이 한 번에 방출하는 정액의 양도 비슷하다. 그건 10cc다. 록 그룹 중에 텐 시시라는 이름을 가진 그룹이 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중얼거리는 그 여자에게 동료는 웃으며, 머뭇거리며 설명해 준다. 한 번에 10cc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속담을 그 여자는 싫어한다. 그건 지렁이에게도, 지렁이를 밟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모욕적이어서 오히려 슬퍼지는, 그런 얘기다. 지렁이가 슬픈 것은 밟히며 살도록 태어난 그의 생태적 속성 때문이다.

 

밟히면 고작 꿈틀거리기나 하면서, 지렁이의 꿈틀거림이 얼마나 큰 저항이고 얼마나 큰 존재의 외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속담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지렁이를 밟는 발 역시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그 발은 분명 세상을 밟고 밟힘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발은, 다른 발에게 밟힐 확률이 높다. 그가 세상을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불이익을 당해도 그는 밟혔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깨문다, 하고. 그러나 그 속담은, 이 세상의 밟고 밟히는 관계에 물고 물리는 관계까지를 첨가해 놓았을 뿐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그 속담은 잔인하고 공격적인 사람이 만들었을 것이다. 지렁이를 무심히 밟을 수 있는 사람만이. 어쩌면 사는 게 지루하고 무료한 사람이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심히, 그러나 놀이를 즐기듯이.

 

결혼한 후에도 절대로 과거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돼. 혹시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와 묻더라도 딱 잡아떼야 해. 그런 일을 묻는 남자들 심리에는 아내가 그 말을 부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강하기 때문에, 딱 잡아떼면 남자들은 그 말을 믿는대.

 

평생 한 사람을 속이고 사느니 차라리 결혼을 안 하고 말겠다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여자는 모든 고통이 끝난 자리에서, 모든 것이 스스럼없이 풀려나가는 지점에서 문득 죽음을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아주 서늘한 마음으로, 이제 죽어도 좋겠구나. 이제는 죽어도 아무것도 아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겠구나. 구천을 떠도는 중음신이 되지는 않겠구나. 삼십 세에 그 여자가 꿈꾸는 죽음은 십 대에 꿈꾸었던 죽음, 이십 대에 꿈꾸었던 죽음과 다르다. 십 대의 죽음이 어른들에 대한 울분과 복수심에서였다면 이십 대의 죽음은 절망과 굴욕, 사방이 모두 막힌 방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삼십 대의 죽음은 해방이다. 그 여자를 묶어왔던 모든 것들이 풀려나가면서 그 여자의 존재조차 함께 쓸려나가는 일탈감, 그런 죽음이다.

 

서른이 되면서, 그 여자는 또 한 가지 변화를 겪는다.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결혼하여 출산을 경험한 친구들의 정신적 성숙을 유심히 보면서, 얼마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 여자가 이십 대 후반 내내, 자신을 다스리려,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해 온 그 모든 일들을, 결혼한 친구들은 출산의 1년 동안 완성해 내는 것도 같아 보인다. 그제야 그 여자는 자신이 청승맞은 노처녀, 스산한 독신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 여자는 가슴이 떨린다는 말에, 얼마간의 성적 충동이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 여자는 이제 안다. 사랑을 할 때, 그 여자의 가장 큰 결함은 상대방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열두 살 이후, 남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말해본 적이 없는 그 여자는 사랑을 할 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먼저 만나자고도, 영화를 보자고도, 야외로 나가자고도, 그 여자는 아무것도 먼저 제안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노란 셔츠, 그도 버거웠을 것이다. 심지어 그 여자는 자신의 속맘조차 드러내지 않았으니. 상대에게 무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가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여자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저 마흔 개나 되는 테이프를 주면, 그걸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줄 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그 사랑이 다 끝난 이후에, 그 일을 돌이켜보며 깨닫는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제주도에 있는 어느 호텔 옥상에는, 첫날밤을 치른 신랑들이 피운 담배꽁초가 그득하다고 한다. 신부에게 처녀막이 없다는 이유로 건물 옥상이 꺼지게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이 정말 있는지, 알 수 없다.

 

비록 어긋나기는 했지만, 아름다웠던 일이라고 지금은 기억한다.(노란 셔츠와의 추억)

 

목이 아프도록 울음을 삼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울 줄 알아야 한다.

 

원고를 한 번 날려 보내면, 다시 쓰는 일은 처음 쓰는 일보다 더 어렵다. 먼젓번 원고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면서, 그러면서 선명하게 떠올라주지는 않으면서, 머릿속을 혼동스럽게 한다.

 

그 여자는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아니, 거절할 이유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랑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에 빠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한다는 해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 그 남자는 아마 사랑에 빠진 자신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욕심과 자기애를 생각해 보면 그랬을 거라고 짐작된다. 아니, 그랬기를 바란다. 그랬다면 그가 덜 고통스러웠을 테니까. 그리고 그 여자, 그 여자는 사랑하는 행위 그 자체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토록 먼 곳에 있는 잿빛 바바리를 그토록 오래 사랑한 것은 자신 때문도 아니고 잿빛 바바리 때문도 아니다. 그 여자는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필요했다. 막막하고 팍팍한 현실을 이겨보기 위해서. 그 후 나이 든 어른들을 짝사랑했던 일도 분명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제 안다. 사랑하는 대상을, 순수하게 그 대상만을 사랑하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강가에 오래 앉아 있으면 몇 가지 깨달아지는 게 있다. 그토록 먼 길을 걸어온 강물이 아직도 저리 맑은 것은 강물이 가지고 있는 자정능력 때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자연은 자연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점이다. 이리하여 또 하나 깨달아지는 건, 머잖아 바다에 닿으리라는 점이다. 그 여자가 늘 좋아했고, 그 여자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던 바다, 그 바다와 하나가 되리라는 점이다. 다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자신의 시체가 떠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것이 더욱 늦어지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그 여자는 이제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들은 평균 수명이 길다고 한다. 그들은 이 세상을, 이 세상의 역사를, 직접, 더 오래 지켜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여자도 오래 살고 싶다. 살면서, 이 세상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

 

그 여자를 키운 것은 8할의 친구나 2할의 문학과 음악이 아니라 세월이었다고. 바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파도처럼. 그 여자를 향해 몰아쳐오던 그 세월이다.

 

그 여자를 키운 것은 10할이 세월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가 인생에서 배운 단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세월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여자가 지금도 일관되게 어른들을, 노인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 하나다. 세월의 부피와 질량의 웅장함에 대한 존경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세월이다. 시간의 퇴적층처럼 쌓여 정신을 기름지게 하고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바로 그 세월이다. 그러므로, 세월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누구고, 그 사람만큼 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 그 사람과 똑같은 세월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그 여자는 지금도 문학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다. 문학이 무엇을 하겠는가. 문학은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돈이 되지도 않고 따뜻한 저녁 밥상도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문학을 생각하면, 오래 함께 산 부부 같은 마음이 된다. 이제는 되물릴 수도 없으니...

 

그 여자는 처음에 철망 주의를 절망 주의로 읽는다. 절망 주의, 형이상학적인 팻말이군. 바다 앞에서는 절망하지 말 것, 감히 바다 앞에서는 절망에 대해 말하지 말 것, 그래, 바다만큼 깊은 심연을 제 속에 거느리고 있는 자가 있는가. 아니 바다 앞에서는 절망뿐 아니라 희망에 대해서도, 광활함에 대해서도, 어떠한 낙관주의나 허무주의, 박애주의에 대해서도 말해서는 안 된다. 바다 앞에서는.

 

바다만큼 많은 희망의 태양을, 바다만큼 많은 허무의 풍랑을, 바다만큼 많은 생물을 키우는 박애를 제 안에 가지고 있는 자가 있는가. 그러므로 바다 앞에서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말해서는 안 된다. 바다 앞에서는 침묵하여야 한다. 바다는, 그 모든 것을 품에 간직하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한 바다는, 이제 단 하나의 방식으로 제 마음을 보여준다. 그건 높은 파도나, 물굽이를 따라 나는 갈매기나, 아름다운 푸른색 따위가 아니다. 그건 부력이다. 바닷물의 부력, 모든 물체를, 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질량만큼 떠오르게 하는 힘, 부력. 그건 바라가 가지고 있는 애정이고 모든 것을 극복한 자의 의연함이다.

 

그 여자는 바다의 부력을 믿는다. 아무리 바닥이 없는 허방에 빠지더라도, 아무리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지더라도 다시 떠오를 수 있는 힘. 그건 바다가 가르쳐준 부력이다. 제가 빠진 심연과 절망의 무게만큼 물 위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것. 절망이 크면 큰 만큼, 어깨에 얹히는 운명의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운 만큼 바다는 더 많은 부력을 행사한다. 그것이 바다의 마음이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래도 세상이 고정하고 온유하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 여자에게는 바다가 좋다. 감기에는 쌍화탕이 좋고 두통에는 펜잘이 잘 듣듯이 그 여자에게는 바다가 좋다.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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