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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서재

세월 -김형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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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인상 깊은 문장을 모은다. 이 남자는 언제나 스와이프 파일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스와이프 파일은 테스트와 검증을 거친 광고 및 세일즈 레터의 모음입니다. 스와이프 파일을 보관하는 것은 광고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프로젝트의 아이디어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세월 김형경 지음, 푸른 숲 

내가 이 ‘자전적 소설’을 쓴 이유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는 걸, 그 여학생은 그때 깨닫는다. 울적한 얼굴을 마주 보며 이별의 시간을 연장해 나가는 건 고통스럽다.

 

첫 월급을 탈 때, 그 여자는 또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앞으로 모든 수입의 10%는 책을 사는 데 쓰리라. 그 여자에게는 늘 책이 필요하다.

 

어떤 대상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바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자신이 가진 것의 10%는 내놓아야 하는 모양이구나 생각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살아가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성격이 곧 운명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하지만 그 여자는 다르다. 그 여자가 여행을 하는 것은 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행위다.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으로부터, 늘 다스리기 힘든 자아로부터, 아주 멀리 달아나는 행위다. 그러므로 여행하는 곳이 어디인가는 중요하지 않고 그곳에서 무엇을 보는가 하는 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시만이라도 그곳에서 무엇을 보는가 하는 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잠시만이라도 자신을 벗어나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나는 책에 속았다.’ 그 여자의 삶에서 가장 심각한 결함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격언을 너무 믿었던 데 있다.

 

사랑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에 빠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한다는 해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

 

-작가의 말-

 

마흔 살이 넘기 전에는 자기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

 

내가 이 ‘자전적 소설’을 쓴 이유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나 자신을 잘 알게 되었고, 인간에 대한 환상을 걷어치웠고, 세상의 단면을 좀 더 선명히 보는 눈을 얻었다. 여러 측면에서 자유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만약 내게 부여된 어떤 재능이 있다면, 그동안은 그것을 문학 자체보다 내가 심리적으로 살아남는 일에 더 많이 사용해 왔음을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든 것이고,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한두 가지의 상처는 안게 마련이다. 다만, 내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그걸 기록할 수 있는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안았을 것이다. 행운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고,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동안의 고통에 대해서다.

 

고작 세 권에 불과한 이 이야기를 모든 나이 든 분들께 바치고 싶다. 내 부모와 조부모, 외조부모를 비롯해, ‘내가 살아온 날들을 책으로 묶으면 열 권, 스무 권은 될 거다’고 말씀하시는 모든 어른들 앞에 고개 숙여.

 

-본문-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결코 세상을 껴안을 수 없습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미래야. 넌, 네 얘기를 쓰지 않으면 앞으로 소설을 세 편 이상 쓰지 못할 거야.

 

아버지는 감정적이며 서정적이고, 어머니는 이성적이며 서사적이다. 그럼에도 두 분 다 비현실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수상을 보는 사람들은 말한다. 손이 작은 사람들은 통이 크다고.

 

덧붙이는 것도 빼는 것도 색칠하는 것도 없이, 그대로 적어 내려가기만 한다.

 

그 이야기를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다.

 

그 여자는 일인칭으로 쓰는 일이 고통스럽다. 슬 때마다 얼마 못 서 중단하곤 하는 것은 문장마다 그것이 제 일이었음을 환기시키는 일인칭 대명사가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 여자는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 대신 ‘그 여자’라는 삼인칭을 택한다. 그러고 나자 그 기억들과 지금 이 글을 기록하는 손길 사이에 얼마간의 거리가 생긴다. 그 거리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면 싶다.

 

호랑이는 암놈이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수놈이 마른풀을 가져다 바닥에 깔고, 암놈은 그 위에서 새끼를 낳는다. 그리고, 새끼가 아주 어릴 때 위험에 처하면 어미는 새끼를 먹어버린단다.

 

한 가지 대상을 붙잡고 너무 깊이 들여다보는 버릇은 좋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 그 여자에게 그런 버릇이 남아 있다. 그 현미경을 본 이후.

 

생선은 비린내가 나서 싫고 미역국은 입 안에서 미끌거려서 싫고 두부는 물컹물컹해서 싫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건 변소 냄새가 나는 청국장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싫은 건 어머니가 없는 밥상에서 밥을 먹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식은 부모 무릎 밑에서 키워야 한다.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애가 뭐야?’ 애는 창자란다. 창자가 끊어질 만큼 슬프다는 뜻이지 ‘

 

슬플 때 울음을 참는 게 가장 나쁘다고, 슬플 때는 울어야 한다고, 누군가 한 번만 가르쳐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울음을 참는 행위야말로 예술의 출발이다. 는 명제를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부터, 목이며 가슴이 아프도록 울음을 참았던 그 시절부터 제 삶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흠뻑 사랑을 베풀던 아버지는 아이를 자의식이 강한 아이로 만들었다. 동화책을 읽어주고 시조를 외워주던 어머니는 아이의 감수성을 예리하게 벼려놓았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 후로, 끊임없이 척락(어렵거나 불행한 환경에 빠지다)의 길을 걷게 되는 아이가, 바로 그 자존심과 감수성 때문에 무수히 고통받게 될 줄을 알았더라면, 부모는 결코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여자는 가끔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 혹은 다른 이야기도 듣는다. ‘지독해, 어떻게 두세 달씩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 있지?’ 그때마다 그 여자는 답답하다. 그들이 말하는 외로움이나 지독함이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해명해도 그들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게 또 답답하다. 열두 살 이후, 그 여자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혼자서. 더러는 동생과 함께 산 때도 있었지만 더 많은 날들을 혼자 살아왔다. 벽에 기대앉아 맞은편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올려다보며 하루 종일을 보내기도 하고, 햇빛 아래 가만히 앉아 대여섯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늘 혼자서. 방학 때면 며칠이고 책만 읽기도 하고, 때로는 복사뼈가 헐어 고름이 나도록 혼자 스케이트를 타러 다닌다. 지금도 그 여자는 외롭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잘 알지 못한다. 머리 위의 해가 서산을 넘어갈 때까지 혼자 창가에 앉아 있는 것. 하루 두 끼를 꼬박꼬박 혼자서 먹는 일, 매일 밤 혼자 잠자리에 들면서 거실과 화장실에 일부러 불을 켜두는 것, 그런 게 외로움인가. 적어도 그 여자에게는 그건 외로움이 아니다. 그건 그저 일상일 뿐이다. 열두 살 때부터 지속되어 온, 그 여자의 당연한 일상이다. 마찬가지로, 방 안에 틀어박혀 며칠이고 책만 읽는 게, 일이 있어 두세 달쯤 외출하지 않는 게 왜 지독함인지도 알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집 안에 있는 일이, 힘겹게 자신과 싸우는 일이기도 한 모양이지만, 그 여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집에 혼자 있는 일에 익숙하고, 그런 때가 가장 마음 편하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열두 살 때부터 지속되어 온, 그 여자의 당연한 일상이다. 무리를 짓지 않고 늘 혼자 다니는 습성을 가진 호랑이에게 물어보라. 외롭지 않으냐고. 몇 날이고 횃대에 앉아 알을 품고 있는 암탉에게 물어보라. 답답하지 않느냐고. 그 여자 대신 호랑이와 암탉이 대답해 줄 것이다.

 

옥상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지금도 그 여자는 햇볕이 따뜻한 창가에 앉아 있는 일을 좋아한다. 정신의학에서는 일조량이 부족하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동지에서 춘분까지, 일조량이 적어지는 시기에는 우울증 환자가 급증한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광도의 빛을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쬐게 하는 시술도 있다고 한다. 슬플 때나 우울할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가만히 햇볕 속에 앉아 있곤 했던 아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했던 것 같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몸이 정신을 탁 쳐서 잠 속으로 빠뜨리는 본능처럼, 그 아이에게 햇볕을 쬐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햇볕 속에 오래 앉아 있었던 덕분에 시력이 나빠져 2년 후 안경을 써야 했던 점만 빼면.

 

날마다 다른 길로 들어가, 날마다 다른 세상에서 논다.

 

지금도 그 여자는 문학의 가장 첫 번째 기능이 자기 위안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과학을 좋아하는 것은 아버지의 피고, 소설책을 열심히 읽는 것은 어머니의 피다.

 

‘그거, 콤플렉스지? 수리감각 없고 비과학적인 사람이 과학용어 사용하는 거.’

 

기다림은 마음만 상하게 만든다.

 

여성 동성애자들이 남성 기피자들이고 남성 동성애자들이 여성 혐오론자라는 편견에 대해서도 논외로 하자. 다만, 동성에게 그토록 강하게 이끌리고 강하게 도취되는 그 정신의 영역에 대해서는 이해한다. 사실, 사랑이란 그 대상이 누구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도취의 세계이고 도취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환상의 세계일 것이다.

 

어디서든, 보경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보경이만 있으면, 보경이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집착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여자는 고통에서, 미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체념하는 법을 익힌다. 어떤 물건에도, 어떤 대상에도 마음이 묶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욕심을 버리는 일. 스스로 마음을 접는 일, 평온한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런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열세 살 때 깨달았을 것이다. 지난날에 대한 집착을, 그것이 아름다운 형태로든 쓸쓸한 형태로든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사진이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것은, 지나가버릴 어떤 순간을 영원히 잡아두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고착시키는 기능을 한다.

 

지금 그 여자는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거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과거의 어느 시절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 여자는 사진을 잃었을 때, 어린 시절을,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모두 잃어버렸다.

 

두 차례의 분실 사이에는 10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인생이 10년 단위로 되풀이되는 것이라면, 그 여자는 1992년에 또 한 번 사진을 잃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후 그 여자는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으므로.

 

지식을 몇 자 더 아는 것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해.

 

이별은 짧을수록 좋다는 걸, 그 여학생은 그때 깨닫는다. 울적한 얼굴을 마주 보며 이별의 시간을 연장해 나가는 건 고통스럽다.

 

그 여자는 이제 기억의 오류에 대해 안다. 아무것도 예전 같은 것은 없다. 기억 속의 그 시간, 그 공간, 그 사람. 그런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 가보았던 곳이 좋아, 예전에 먹었던 음식이 맛있어,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좋아, 다시 찾는 일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실망하고 만다. 시간 때문이다. 시간이 그 대상을 바꾼 게 아니라 우리가 변하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보았을 때의 바로 그 정서, 그곳을 찾았을 때의 바로 그 기분,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바로 그 입맛, 그것이 없어진 것이다. 자신이 변하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것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을 그리워하는 일이 얼마나 몸을 상하게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손에서 힘이 빠진다.

 

마음을 잃어버린다.

 

아내와 이혼한 사람도 자식을 사랑하며, 다른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사람도 자식을 사랑하며, 자식을 혼자 하숙시키는 아버지도 자식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은 단 하나, 이제는 아버지가 가족을 모두 버렸다는 점이다. 여학생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가족 중 하나일 뿐이다.

 

어른이 된 그 여자는 지금도 몹시 힘든 일이 있을 때 잠에 빠져드는 버릇이 있다. 지친 신경이 몸을 탁 쳐서 잠 속으로 밀어 넣는 건지, 지친 몸이 정신을 끌고 잠 속으로 들어가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한동안은 그런 자신을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해도 해결책이 있을까 말까 한데 그런 상황에서 잠을 자다니, 문제를 정면에서 천착하지 않고 늘 잠 속으로 도망치는 자신의 비겁함과 아둔함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것이, 그 여자가 살아가기 위해 본능적으로 터득한 또 하나의 생존방식이었다는 것을. 몹시 슬플 때 햇빛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처럼, 몹시 힘들 때는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자고 일어나면 풀리지 않던 문제의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몹시 힘들어했던 문제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여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생존방식들을 그렇게 본능적으로 터득하며 살아간다.

 

낙엽은 조금씩 물드는 게 아니라 일순간에 빨갛게, 혹은 노랗게 변한다. 서리나 가을비가 내리고 난 다음에. 사람은 조금씩 늙는 게 아니라 일순간에 갑자기 늙는다. 깊은 병을 앓고 난 다음에, 혹은 가을에서 겨울을 넘어가는 어느 해에.

 

모든 왕조의 마지막 왕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무엇이 있다. 국력이 약해지고 민심이 돌아서고 농사는 흉년이 들고... 그런 나라의 왕이란 얼마나 큰 고통일까. 가끔 의자왕이나 경순왕이 안쓰러워지는 때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사과를 먹을 때마다 사과 껍질로 얼굴이며 손등을 문질러주곤 하던 어머니. 그렇게 하면 살갗이 트지 않고 고와진다고 한다. 지금도 그 여자는 사과를 먹을 때, 사과 껍질로 손등을 문지르는 버릇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사과 껍질을 살을 문지르면 처음에는 사과즙이 묻어 끈적끈적하지만 그것이 마르면서 살갗이 부드러워진다. 두 손등을 마주 비비면 마치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기분이 된다.

 

여학생은 이제 돈을 매개로 해서도 애정이 자랄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 여자는 지금도 할머니들을 좋아한다. 모든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둥글고 따뜻한 손을 좋아한다.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를 좋아하고,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주름을 좋아한다. 아마 그건, 성인이 될 때까지 19년의 성장기 중 2/3를 할머니들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그 여자에게 어떤 보수적인 기질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할머니들 손에서 자란 탓일지도 모른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자주 이 세상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건 할머니들의 손에서 양육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여자도 나중에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 누구보다도 더 둥글고 따뜻한 손을 가진 할머니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집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삶의 많은 부분을 소모하며 산다는 것을.

 

그 여자는 모든 예술의 척도를 감동에 두고 있다. 영화를 볼 때도, 그림을 볼 때도. 그것이 가슴에 닿아 얼마만 한 울림을 만드는지를 척도로 삼는다. 가슴에 닿아 울림을 만드는 데 있어서, 음악을 따라올 만한 예술 장르는 없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도 철저하게 영감과 상상력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특별한 분야이며, 그래서 가장 재능 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분야라고 믿는다. 그 음악 중에서도, 대중가요가 갖는 힘은 특히 직설적이고 불가항력적이다. 그 여자는 대중가요를 좋아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성, 사랑이라는 이름의 비극성.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일은 너무 힘들어. 만날 때는 그 어색함을 없애려고 애쓰고, 간신히 어색함이 없어질 만하면 다시 헤어져야 하고.

 

사랑이란 그 대상이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다. 목사가 창녀를 사랑할 수도 있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의 불가해성, 사랑의 무목적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이었던 초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을 텐데, 그것이 폭력과 더불어 시작된다. 아마 그때 여학생의 무의식 속에는 성적인 어떤 일들이 공포와 충격으로 연계되는 납득할 수 없는 연상작용이 깃들어 벼렸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성을 그토록 부정적이고 불길한 것으로 인식한 것을 보면.

 

이해는 하지만 아직도 그 여자는 술 취한 사람을 두려워한다. 길을 걷다가 한적하거나 으슥한 곳에서 술 취한 사람을 만나면 저만큼 비켜서 지나간다.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아무에게나 적의를 드러내고, 자잘한 혹은 큰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과 같은 술자리에 앉아야 할 때는 되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그들의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잘 알면서도, 도무지 그런 행동들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술 취한 사람이 뭐가 무섭니? 술 취한 사람은 바보야’ 술 취한 사람이 무섭다는 그 여자의 고백에 한 친구는 그렇게 대답한다. 그제야 그 여자는 제가 무서워하는 것의 정체를 알아낸다. 바로 그 무지의 상태다. 이성도 양식도 모두 사라진, 그 날것이고 맹목적인 본능의 상태를 무서워하는 모양이라고.

 

왜 여자는 조상을 공경해서도 안 되는가.

 

그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를 만들어냈다는 구약성서 창세기를 믿지 않는다. 그 글을 기록한 자는 분명 남자였을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도 믿지 않는다. 남성 속의 여성적 요소는 아니마, 여성 속의 남성적 요소는 아니무스라 부른다.

 

아니마는 생명, 영혼, 정신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니무스는 적의, 원한, 증오로 풀이되어 있다. 그런 용어를 만들어내고, 그런 사전을 편찬한 사람도 어쩌면 남자였을 것이다.

 

그 모든 남성들조차, 그들을 태어나게 하고 가르친 사람이 바로 여성이라는 사실을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이 끝나면 곧바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제목도 이미 정해두었다. ‘담배 피우는 여자’

 

난, 내 몸에 외부로 통하는 또 하나의 기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나는, 남자의 몸에서 정자가 뽈뽈뽈 기어 나와서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어.

 

그 여자가 지금도 일관되게 나이 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어느 만큼 살기 전에는, 어느 나이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식물을 옮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으로 옮겨 심어도, 터전이 바뀌는 모든 식물은 일시적으로 시든다는 것을. 때로는 시들시들하다가 그대로 죽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나누어도 반이 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 나누면 네 배쯤으로 불어나는 슬픔도 있는 법이다.

 

그 여자가 명절 때 하는 일이란, 상점이나 식당들이 문 닫을 것에 대비해 음식이나 반찬거리를 사다 놓는 일이다. 그 준비가 되지 않아 우유와 사과만 먹으며 보낸 설날이 있고, 라면만 먹으며 보낸 추석 연휴가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원칙에 철저하다. 24시간 편의점이 생겼을 때 그것이 외국 자본의 국내 상륙이라는 점을 염려하면서도, 그 여자는 은밀히 다행스러워한다. 이제 최소한 명절에 굶는 일은 없겠구나. 그러나 24시간 편의점도 연휴 이틀째부터 먹을 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연휴에는 그저 문만 열고 있을 뿐 새로 들어오는 물건이 없다.

 

선생님도 그저 하나의 직업인일 뿐, 완전한 인격을 갖춘 인간의 모범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가장 큰 약은 시간이라고, 나이 든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그걸 비겁함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한다. 가장 좋은 약은 시간이라는 것을.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에서, 늘 그렇듯이 현실론이 승리한다.

 

어떤 질문은,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것이 그의 코 앞에 주먹을 들이미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귀신이 오히려 해코지하는 거 아니야. 오히려 귀신은 자손들이 예쁘다고 쓰다듬어보고, 잘 되라고 어루만지지. 그렇지만 귀신이 원과 한이 많은 거친 손으로 만지면 산 사람은 탈이 나, 병이 나든가, 하는 일이 꼬이든가 그러는 거야.

 

바다는 언제 보아도 너그럽고, 언제 보아도 다정하고, 그러면서도 늘 다른 모습, 다른 색깔로 제 모양을 드러내 보이는 바다. 바다의 얼굴이 그토록 여러 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들뿐일 것이다.

 

너무 긴 여행은 좋지 않다. 그 여자는 그때 이후로도 많은 여행을 하는데, 긴 여행의 중간에는 늘 그런 질문과 맞닥뜨리곤 한다. 여기에 앉아, 앞 좌석의 흰 시트를 바라보며 문득, 대체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런 느낌과 맞닥뜨리는 경험은 황망하고 낯설다. 여행이 자기 성찰에 좋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런 점들 때문일 것이다.

 

그 여자에게도 어머니의 피가 있다. 부둥켜안고 울면서 질척거리는 이별이나, 감정을 온통 드러낸 채 준 것과 받은 것을 겨루는 애정싸움에 질색하는 기질은 바로 어머니에게서 왔을 것이다. 이별이 잦고, 그렇게 헤어지면 다음에 만날 때까지의 공백이 긴 삶에서, 그런 기질을 타고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반복되는 그런 삶이 그런 기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편리한 잠. 언제나 정신이 긴장된 순간에 몸을 탁 때려서 의식을 마비시키는 잠.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보이는 잠.

 

절망 속에서, 죽어버려야겠다고 아주 손쉽고도 감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버지의 피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살아가고, 꾸역꾸역 살면서도 맡은 일에는 늘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어머니의 피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고 놀 때 신명을 내는 것은 아버지의 피고, 그러고 돌아서면 무언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건 어머니의 피다. 두 피는 늘 비슷한 질량, 비슷한 농도로 그 여자를 지배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아버지의 피가 겉으로 나오고, 때로는 어머니의 피가 전면에 나선다. 이십 대를 보내는 동안, 그 여자는 내내 내부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두 피의 갈등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제, 그 여자는 두 피를 내부에서 조화롭게 섞을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피는 그 여자의 낭만적인 기질을 가져다주고, 어머니의 피는 절망 속에서 몸을 추스르는 힘을 준다. 아버지의 피는 일상을 가꾸는 일을 하고 어머니의 피는 이상을 간직하는 일을 한다. 두 피는, 그 여자의 삶에 적당한 균형감각을 가져다준다.

 

가면은 아무리 오래 써도 얼굴이 되지 못한다.

 

살아가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런 노력 속에서 문학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애정을 공고히 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지금 문학에 대한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 여자를 지탱한 것은 문학에 대한 환상이다. 문학이 거대하고 힘 있는 무엇이라는 환상. 제가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위안을 받고 앞날을 결정했듯이, 모든 문학에는, 그리고 앞으로 제가 할 문학에도, 그런 위대한 기능이 있는 줄 알았다. 그건 환상이다. 그러나 그게 환상인 줄 모르고 환상 속에 빠져 있을 때가 행복했다. 지금은 모든 환상이 깨어지고, 환상과 함께 열정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고통뿐이다. 그럼에도, 이제 돌아서 나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다.

 

서른 여성의 나이는, 무엇을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다. 할수록 글 쓰는 일이 어렵고, 늘 얼마간의 자신 없음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 여자는 자주 이 길에서 도망치고 싶다.

 

어떤 평론은 문학작품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분명 작가가 의도하고 쓰지 못했을, 그러나 작가의 무의식이나 본성 속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평론은 발견해 낸다.

 

문학평론은 허공을 떠도는 문학작품에 근사한 옷을 입혀, 어딘가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위치를 설정해 준다. 그저 줄거리만 따라 읽던 소설 읽기에서 벗어나 작품 속에 깃들어 있는 다른 요소들을 읽게 되는 것, 그것은 평론서들을 읽은 영향이다. 그건 영화를 보는 방식이 바뀌는 경험과 비슷하다. 그저 줄거리를 따라가고 주제만 의식하던 영화 보기가, 영상언어를 읽어내고, 카메라 워크와 조명, 음악, 심지어는 로케 장소와 분장까지를 염두에 두고 보게 되는 쪽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 그게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점도 있을 테지만, 아무튼 그 여자는 문학평론에 빚진 바가 많다.

 

어떤 음악이든, 그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이나 정서에 영원히 지배당한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서 느꼈을 법한 모든 부정적인 요소가 그녀에게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모든 남자들이 여자는 그저 여자, 어머니나 창녀이기를 바란다. 아내가 도덕 선생이나 기숙사 사감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친구들이었다고...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싸울 때, 어떻게 그렇게들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알아내는지 모르겠다.

 

버림받았구나... 이제 아버지는 나를 버렸구나. 그동안 아버지가 나를 키워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였구나.

 

그 여자는 노래를 좋아하지만, 노래는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여자는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느끼는 허탈감이 의외로 크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있다. 그 허탈감은 바로 그 작품을 준비하고 공연하는 동안 느끼는 성취감과 비례하는 것 같다.

 

직장인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 남편의 얼굴, 선배의 얼굴, 후배의 얼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얼굴은 더욱 면이 많은 다면체가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면체이고, 어느 방향에서 그를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인식은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다면체의 얼굴, 심리의 중층구조, 지금 그 여자는 그런 것들을 이해한다.

 

그 여자가 자신을 지나치게 차갑게 바라본다면 그 남자는 자신을 지나치게 뜨겁게 사랑한다. 이만큼 살면서 그 여자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어떤 집을 방문하면 자신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책상 앞이나 책장에 세워둔 것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벽에 걸어놓은 경우도 있다. 그들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옷차림에 세심하게 신경 쓰는 멋쟁이들이고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점에 대해서는 남에게 말해도 자신의 실수나 나쁜 습관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자신을 너무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집에 사진이 담긴 액자는 물론 제대로 된 큰 거울도 없다.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물건들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 모두를 아주 차갑게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나 나쁜 습관까지도 웃음거리의 소재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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