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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중 통렌수행법과 나는 특별하지 않다.

지구빵집 2017. 12. 20.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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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렌수행법. 

 

당신이 아는 사람 중,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를 시각화하며 명상한다.

그 고통은 질병이나 상실이나 우울, 고통, 불안, 공포일수 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신다.

이때 그 사람의 모든 고통이 어둠, 검은 연기, 타르, 두텁고 무거운 구름이 형태로 내 콧구멍에 들어와 심장으로 내려간다고 상상한다.

그 고통을 가슴에 간직한다.

그리고 숨을 내쉰다. 이때는 당신의 모든 평화, 자유, 건강, 善,  德을 치유와 해방의 빛이라는 형태로 그 사람에게 보낸다.

그가 이 모든 것을 받아서 완전히 자유럽고 편안하며 행복해졌다고 상상한다.

이런 식으로 호흡을 몇번 더 한다.

그 사람이 있는 장소를 상상하고, 들이마시는 숨에 그곳의 모든 고통을 받아들인 후, 그에게 당신의 모든 건강과 행복을 보낸다.

그 다음 그 지방 전체, 나라 전체, 지구 전체, 우주 전체에 똑같은 방법을 시행한다. 도처에 있는 존재의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는 대신 건강과 행복, 덕을 보내는 것이다. 


  처음 이 수행을 소개받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보통 감정적이며 부정적이다. 나도 그랬다. 검은 타르를 받아들인다고? 놀리는 건가? 병들면 어떡해? 미쳤군, 위험한 일이라고! 칼루가 우리에게 통렌을 가르쳤을 때도 이런 일이 발생했다. 청중 가운데 한 여자가 일어나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상대가 정말 병든 사람이라서 내가 병들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사실상 이것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칼루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잘됐다, 제대로 먹히는군!' "이것이 요점이었다. 그 말은 자아가 여전히 살아 있는 우리 모두를 겨냥한 말이었다. 우리는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자신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수행한다. 상상이라도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인 순 없는 일이지.


 통렌은 그런 자기관심, 자기조장, 자기방어를 확실히 잘라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자신을 타인과 교환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완전히 잘라버린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것, 즉 자신을 다치게 함으로써 자아와 타인이라는 이원성을 허물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비심을 단순히 말로 떠들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가슴으로 받아들여 그 대가로 고통을 해방시키는 일, 그것이 진정한 자비이자 대승의 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세상의 죄를 기꺼이 받아들여 죄, 혹은 당신을 변형시키는 불교도들의 행위였다.


 요점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는 하나뿐인 진아를 위해서 자아와 타인을 교환할 수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유일한 진아에게 그 둘은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와 타인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인 진아 자각, 순수한 비이원적 자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떠안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 안에 가두게 되며, 이것은 곧 탈출구없이 우리 자신을 고통 속에 가두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자아와 타인이라는 이원론을 부숴야 한다. 윌리버 브레이그가 말했듯,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을 때 '자아'가 아직 소멸되지 않고 남아있어서, 내 자신이 자아의식의 손에 넘겨지지 않도록" 말이다. 


 통렌을 수행하면서 실제로 병드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통렌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직면해서 움츠러들지 않게 된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게 되고, 오히려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방시킴으로써 고통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아를 보호하려는 경항에서 벗어남으로써 당신 안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모든 고통을 느끼거나 모든 성공을 즐기는 하나의 진아만이 있음을 인식하면서 자아와 타인의 긴장을 풀기 시작한다. 진아만 있을 뿐 인데 어떻게 타인을 시기하겠는가? '나는 타인의 장점을 즐거워한다'라는 말은 통렌의 '긍정적 측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 비이원적 자각에서 보면 그것은 내것과 동일한 것이다. 위대한 '평등의식'이 계발됨으로써 한편으로 자만과 오만을,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와 시기심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가운데 pp.358-360 

[출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중 - 통렌수행|작성자 까루나


사진 출처 : http://live-fish.tistory.com/95



나는 특별하지 않다.


트레야 윌버 


   만세! 생리가 시작됐다. 어쩌면 켄의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황은 틀림없이 좋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또 달리고 싶은 욕구를 느낄 만큼 에너지도 회복되었다. 정말 풍요롭고 즐거운 순간이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더불어 내가 전보다 훨씬 온화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나는 이전처럼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내 인생이 안정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중략)


  작년에도 좋은 일은 있었다. 그 하나는 나의 완벽주의가 상당 부분 없어졌다는 것이다. 괜히 문제를 일으켜 자기비판만 하는 것은 그 완벽주의라는 광대 때문이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부풀리면서,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해왔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타호에서 집안일을 하면서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똑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성향이 많은 문제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이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신을 파괴하는 경향이 줄어들었다.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더욱 여유를 가지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물은 반드시 바르게 있어야만 된다는 가치관, 즉 내 고집 때문에 그 모든 슬픔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심리적인 세계뿐 아니라, 이 물질세계도 수많은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저 그런 정도'로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에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고 한다면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항상 너무 사소한 것에 집착해, 그것의 본래 의미나 전체 모습을 놓치곤 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을 줄이는 대신, 그저 그런 상태로 일을 하기 위해 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지켜보기로 했다. 동시에 더욱 수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중이다.


  나는 예전보다 좀더 겸손해진 자신을 느낀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생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문제라고 하는 것은 대강 이런 것들이다. 친구 관계, 결혼 생활, 대인관계, 나 자신의 의심이나 두려움, 금전 문제,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 자신의 천직에 대한 불확실성, 우리 부부가 떠안고 있는 괴로움의 의미 등...,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문제다. 예전의 나는 언제나 언덕 위의 하얀 집에 사는 소녀처럼 '나는 예외다',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문제들 덕분에 내가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몇 백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전형적인 고민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내 마음엔 겸손이 싹텄다.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여기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또 한 가지 멋진 변화가 있다. 요새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더욱 깊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이 여러 문제를 통해 성장해가는 존재의 일부분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특별하지 않아"라는 말이 "나는 고립돼 있지 않아"라는 의미인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사는 것에 내 관심을 좁힌 것같기도 한다. 비록 내 안의 성취욕을 만족시키진 못하더라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평소 성급하고 초조해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눈 앞에 보이는 나무를 하나씩 잘라낼 뿐, 다른 사람이 자를 나무는 손도 대려 하지 않고, 난 그저 가까이 흐르는 냇물에서 물을 길어 온다. 다른 시냇물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 자신에게 치료할 시간을 주는 것, 개방적이고 조용한 공간이 지나가도록 그냥 내버려둔 채, 그곳에서 무엇이 나올까 그저 지켜보고 있다.

  산책이나 하이킹은 내게 중요한 일이다. 몸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석양의 섬세한 아름다움이라든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태양 빛을 반사해내는 물방울을 바라볼 때, 나는 만족감을 느낀다.


  요즘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건강함을 과시하는 것은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정원 안의 바위 등을 모두 파내버리고, 그곳에 양상추나 콜리플라워, 완두콩, 시금치, 당근, 무, 오이, 토마토 씨를 뿌리는 일을 매일 하다시피 한다. 씨앗은 모두 다른 모양이다. 그토록 많은 유전 정보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씨앗도 있으며, 언뜻 보기엔 씨앗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괴상한 모양을 한 것도 있다. 파종은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 그중 몇 가지는 파종 시기가 너무 늦었기 때문에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무엇이 생산될 것인지 걱정하지 않는다(재배자인 내가 이렇게 말하다니!). 내가 정성스럽게 마련한 토양 속에서 씨앗이 싹트는 것을 지켜보는 일, 씨앗ㄷ르이 제각기 개성을 주장하면서 잎으로 잎으로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 각각의 작물이 본래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을 관찰하는 일 자체가 즐겁다. 완두콩은 빙글빙글 철망을 감고 올라간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가장 즐겁다.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일구는 일은 중노동이지만, 그 자리에서 작물이 생장하는 것을 바라볼 때의 만족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를 치유한다. 이 일을 통해서 난 다시 생명을 실감하게 되었다. 더욱이 식물을 돌보는 것은, 내가 타인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받는 것을 요구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수고를 끼치는 것보다 자신이 한 일이 외부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보는 일, 그리고 나를 소중히 대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켄을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돌이켜보면, 난 지금까지 목마른 사람처럼 인생의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찾아왔다.  그런 일에 얼마나 많은 열정과 노력을 퍼부었던가. 그때를 생각하면 손을 뻗어 발돋움하는 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마음의 평화나 지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현재 나는 오로지 불교의 길을 걷고 있다(물론 그렇다 해도 누구에게라도 배울 생각은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깨달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생에서 깨달음을 성취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내게 그런 수행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아직 시기상조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어디론가 가려고 애쓰지 않는 일이다. 오로지 나무를 자르고 물을 나르면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바라지 않고 목적을 갖지 않기. 다만 살아가는 것, 일어나는 일에 맡겨두는 것이다. 


* 켄 윌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김재성 외 옮김, 한언, 2006, 223~226쪽.

[출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 중 - 통렌수행|작성자 까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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