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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품사에 대하여> 명사로 고정하고 사는 오류를 수정하다. 류시화

지구빵집 2018. 1. 1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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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품사에 대하여>

-명사로 고정하고 사는 오류를 수정하다-  페이스북 류시화님 글

   

스물두 살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는 몇 권의 시집으로 명성을 얻어 어딜 가나 시인, 혹은 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나 역시 그것을 당연히 여겨 스스로도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시인'의 품사는 삶, 사랑, 여행처럼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그 명사들은 현재진행형일 때만 의미를 갖는다. 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시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시인이 아니다. 다른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독자이고, 버스를 타면 승객이며, 병원에 가면 환자이고, 식당에서는 손님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연인, 아들에게는 아버지, 함께 사는 강아지에게는 반가운 주인이다. 그런가 하면 힌디어 선생에게는 학생이고, 외국에서는 배낭 여행자이다.


사실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은 역할에 따른 약속 명사일 뿐이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 의사이며,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교수이다. 밖에 나오면 그 역시 승객이고, 길 가는 행인이며, 관광객이고, 손님일 뿐이다. 만약 그가 의사, 교수라는 명사로 자신을 고정시킨다면 그는 그 정의에 갇혀 존재의 수많은 가능성과 역동성을 잃게 된다.


인도 출신의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는 다음의 우화를 이야기한다.


 한 여인이 중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는데 아득한 곳에서 어떤 음성이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들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네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여인은 알 수 없는 음성과의 대화 후 병에서 회복되었고, 그 후 삶이 달라졌다. 자신이 규정 지은 한정된 나에게서 벗어나 더 역동적인 존재로 살게 된 것이다.


내가 나라고 여기는 나의 자아 이미지는 다른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암에 걸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암환자와 동일시하며, 암환자로 살다가 암환자로 생을 마친다. 암에 걸리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동일시된 그 '암환자'가 존재의 다른 가능성들을 부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 승려 아잔 브라흐마는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말기 암환자인 여성 수행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병실 문에 '방문객 절대 사절! 아잔 브라흐마는 예외.'라고 크게 써붙였다. 


모두가 그녀를 오직 '암환자'로 대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암환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로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은 아잔밖에 없다고 했다. 


그녀를 찾아간 아잔은 곁에 앉아 한 시간여 동안 농담을 해서 그녀를 웃겨 주었다. 병원에 입원한 누군가를 방문할 때는 환자가 아닌 그 인간 자체와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아잔은 썼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정의내리는 사람을 나는 안다. 아마도 인생의 어느 시기에 부당한, 혹은 부당하다고 스스로 해석하는 피해를 당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피해자이며, '피해 의식'이 있다고 습관처럼 말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중학교 때부터 외국에서 유학해 명문 대학을 다녔으며, 이십 대에 이미 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머리도 좋고, 원하는 일을 하고 살면서 왜 자신을 끝없이 피해자라고 여기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자신의 불행한 어린 시절, 실패한 경험, 상처 입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아가는 일은 흔하다. 또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신을 '못생긴 사람', '뚱뚱한 사람', '늙은 사람', '못 가진 사람'과 동일시한다.


정년퇴직 후에도 계속 교수라는 자아 이미지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일 년 동안 장관을 한 후에 평생 장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역할 놀이가 끝났을 때가 진정한 '나'를 만날 기회인데도 말이다. 자신의 '시인', '교수', '의사', '부자', '유명인'이 손상당하면 자신의 존재가 손상당한다고 여긴다. 


자신을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동일시하는 이도 나는 많이 보았다. 다른 에고를 버린 대신 '깨달은 사람'이라는 에고로 대체한 것이다. 


수행을 지도하는 사람이 '나는 스승이다'라는 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아 이미지에 붙잡힌 것이라고 붓다는 말했다.


유명인 중에도 자신의 '유명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만나 온 배우 김혜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오히려 명성을 세상에서 입힌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여긴다. 네팔 산악지대를 스릴 넘치는 버스 지붕에 앉아 끝없이 깔깔거리며 내려오던 순수함과 머리 긴 사두 앞에 앉아 인생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던 순진함이 나에게 각인된 그녀의 모습이다.


깨달음의 출발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물음은 '나는 무엇이 아닌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역할을 존재로 착각할 때 공허가 싹트며, 이 공허감은 더 많은 외부의 것들로 채워져야 한다. 자신을 치장하는 것들을 빌려오고 권위를 빌려오고 지위를, 심지어 성형한 미모를 빌려와야 한다. 그때 그 존재는 지푸라기 인형과 같다.


사실 존재는 자신이 한 가지로 규정되는 것을 부자유하게 여긴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안에는 무한히 역동적인 세계가 있다. 


별들의 운항이 있고, 새들의 지저귐이 있고, 꿈과 환상이 있다.


 우리는 먼지인 동시에 광활한 우주이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고, 빗방울이고,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치장, 소유, 지위를 다 떼어 내도 우리의 본래 존재는 거대한 호수만큼 투명하고, 우주만큼 역동적이다. 


<인생 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말한다.

"인생의 시작에 있든 끝에 있든, 절정기에 있든 절망의 나락에 있든, 우리는 언제나 모든 상황을 초월한 존재이다. 당신은 당신이 앓고 있는 병이나 직업이 아니라, 당신 자신일 뿐이다. 


삶이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순간의 '있음'이다. 만약 내가 '시인'이라는 호칭을 존재의 고정된 틀로 쓰고 다닌다면 그것은 죽은 명사가 된다. 죽음만이 유일하게 동사가 될 수 없는 고정 명사이다.


 내가 시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때 인간과 인간, 존재와 존재로 만나는 일이 가능하다.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으로.

   

글_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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