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는 아득한···.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라. 과거의 짐이 현재의 삶을 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굴레에서 벗어나라.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라. 과거에 얽매이지 마라. 표현해서라도 건강하게 과거와 결별하는 힘을 키우라.
● 강해지려면 익숙하지 않은 것에도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낯선 것에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으니 용감해질 수 없다. 우리 아버지들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 살아보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나약하고, 육체적으로 늘 피곤한 삶이다. 더불어 외로웠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익숙한 것은 가난과 배고픔이 전부였다. 마찬가지로 남자 아들은 아버지의 물리적, 언어적 폭력과 같은 나쁜 습관들을 그대로 배운다. 왜 아버지가 배운 습관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그때 홀로 세상의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까? 밖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집에서는 폭력과 욕설로 풀고 있던 게 아닐까? 우리의 아버지는 모두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하루 종일 낯선 것에 치여 꺾인 날개를 감추고 돌아와 연약한 대상, 자기가 벌어 먹여 살리는 어쩔 수 없는 가족에게 그가 당한 서러움을 풀려고 했던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러지 않았을까? 나도 처음이듯 낯설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 없어서, 옛날 아버지가 한 대로 똑같이 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당시 아버지들은 돈 버는 기계로 지내며, 자신의 삶을 모두 송두리째 가족들의 안전과 가족들의 먹을 것, 굶지 않고 가르치는 일을 얼마나 헌신적으로, 온갖 수모를 견뎌내며 지냈을까? 당연히 아버지들은 억울하다 싶겠다. 젊거나 늙어 가는 것이 선물이나 죄가 아니듯 누구의 과오도 아니다. 운이 나빴을 뿐이다.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니 노래하지 않는다. 고통인 시간은 길어서 노래하고 쓴다. 비극이 많은 이유다.
● 그가 함께 달리자고 하기 전에 내가 달리기를 하고 있었더라면, 그때 내가 마라톤이라는 운동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를 만나는 일은 내가 가장 원했던 일이니 만나기는 계속 만났을 것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겠지만.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러너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하지 않은 일로도 얼마든지 인생이 풍요로울 수 있다. 이전에 하지 않은 일로 말이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써 잡은 기회가 아니라, 이유는 모르지만 떠밀려서 잡지 못한 기회로 인생은 충분히 변할 수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변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일이다. 기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잡은 기회로 변하기도 하지만, 잡지 못한 기회와 하지 않은 일이 일으키는 새로운 변화와 가능성이 도처에 널려있다. 삶의 본성이다. 좋은 기운을 애써 만들 필요는 없다. 나쁜 기운을 살살 걷어내는 일을 하면 된다. 불법에서나 명상이나 기도하는 일의 공통점이 바로 좋지 않은 감정이나 어두운 기운을 조금씩 버리는 일이다.
삶이 그때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 두 번 다시 이런 삶은 오지 않으리란 것, 지금처럼 시간이 절실한 때는 인생에서 없었다는 것.
● 제대 후 학교에 복학을 하고 3학년(1990년)을 마칠 즈음 여자가 떠났다. 여자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여자가 생각했던 일들을 하기에는 집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여자는 돈을 벌어 유학을 가려고 생각했다. 정확히 여자의 선택은 여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을 정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는 젊었고, 시간도 많았다. 1992년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 달 후에 LG정밀 연구소에 취직하여 안양시 호계동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는 어느 날 그가 연구소로 찾아왔다. 여전히 비행기를 타고 있었고, 대학원 논문을 플로피 디스크에 담아왔다. 사회에 처음으로 나온 그가 한 때 살았던 곳은 공항동이다. 경기도 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할 때 3개 리를 병합하여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라 하였다. 3개의 자연 부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인구가 많은 송정리는 소나무가 울창했고 소나무 주변에 정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때 이곳에 김포비행장이 있으므로 공항동으로 개칭되었다. 대충 짐작하니 스물일곱 살 정도였다. 그의 집은 햇볕이 잘 드는 2층 방이었다. 집은 잠만 자는 곳이라서 햇살이 잘 들든 들지 않든 상관은 없는 일이다. 왜 그의 집에 갔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아마 용산에 볼 일이 있어 같이 나갔다가 가지 않았을까. 회색으로 칠해진 작은 철제 책상이 하나 있고, 구색 맞추는 작은 의자 위에 방석이 있었다. 침대는 없고, 장판은 노란색이고 멀리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풍경이 보이는 집에서 그가 내게서 받은 손편지를 하나씩 읽어 주었다. 우리가 왜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불처럼 일어나지 않았는지 아직도 의문을 가지고 있다. 둘 중 누구도 서로에 대해 감정을 정직하게 풀어낸 적이 없다. 남자는 대학 다니는 시절에 서툴게 여자와 지내온 상처가 깊어 다시는 상처 입지 않아야 하기에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여자가 지내온 같은 시절의 힘든 삶도 마찬가지라서 함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여자에게 일어난 일을 조금은 알던 남자는 남자대로 연구소를 다니며 일에 몰두하며 지냈고, 그는 공부와 일을 동시에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 공항동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에 대한 죄책감이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남자는 무심했고, 여자는 잊고 있었다.
● 여자는 의자에 앉아 명상 중이다. 주위의 것들을 모두 잊은 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생각하는 생각도 없는 상태이다. 남자는 천천히 의자 뒤로 걸어가 등 뒤에 가까이 선다. 뒤에서 앞쪽 이마에 손을 대고 뒤로 머리를 쓸어내린다.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려는 건지, 아니면 머리카락 아래의 목덜미를 만지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머리에 닿는 손가락이 부드럽다. 머리 정 가운데를 시작으로 여기저기를 조금씩 강하게 지압한다. 머리가죽과 뼈 사이를 떼어놓는지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그가 어쩌려는지 궁금하다. 양쪽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않는다. 브라의 끈을 등 뒤에서 어깨로 올라오면서 만진다. 여자는 힘껏 명상을 해보지만 자꾸만 그의 손이 신경 쓰인다. 남자의 손이 어깨와 목을 타고 턱 밑으로 내려온다. 목 가운데 쇄골이 시작되는 지점에 머무른다. 양쪽으로 얇은 쇄골을 타고 귀 밑까지 올라온다. 여자는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쇄골을 타고 위로 올라오면 목의 안쪽이 되고, 밖으로 넘어가면 여자의 가슴 위로 가까워진다. 남자는 몇 번 목 아래 식도 부근부터 만지기 시작해 귀 아래까지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가 머리를 그녀의 옆으로 가져와 숙이며 가슴 위로 손을 가져간다. 입으로 여자의 귓볼에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다. 잠시후면 귀를 깨물을 기세다. 여자는 명상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눈을 뜨고 남자의 얼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검은 머릿결을 만지는 남자는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는다.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목덜미에 느껴진다. 남자의 손이 파란색 슬리브와 얇은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남자의 손에 가득 들어오는 풍만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을 만진다. 뒤에서 고개를 숙여 꼿꼿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입에 머금고 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상반신에 흐르는 감각을 억지로 누르면서 신음을 참고 있었다. 처음도 아닌 여자는 처음이었다. 누구보다 늦게 성을 알게 된 여자는 마치 첫 경험을 하듯 야릇한 감각과 허리부터 저릿한 느낌에 '이런 게 상반신과 하반신이 절단되는 느낌인가?' 하고 생각한다. 남자는 뒤에서 여자를 일으켜 세운다. 여자의 허리를 팔로 휘감으며 의자 앞으로 가서 선다. 옷을 위에서부터 능숙하게 벗긴다. 여자의 허리를 지날 때 엉덩이를 만지고, 배꼽과 아래를 스치면서 지나간다. 여자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더 참을 수가 없었는지 강한 몸짓으로 밀고 들어온다.
● 그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아버지와는 다른 아버지였다. 청주 상고, 청주대학교 상대를 졸업하고 농협을 다니는 착실한 아버지를 두었다. 아니 가지고 태어났다. 아들이 아니었으니 아버지를 배울 필요가 없던 여자를 알고 있다. 남자는 그녀가 살아온 삶이 부러웠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여자는 늘 행복한 일상을 살고, 여자의 일을 즐기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믿었다. 바보처럼. 20살을 갓 넘기고 그녀를 만났을 때 어떻게 우리의 앞날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 후로 오랫동안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게 될 줄을 알았을까? 적어도 삶에서 제법 긴 시간을 말이다. 여자의 집은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 어둑한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야 나온다. 여자를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여자를 만난 적은 없다. 그의 아버지가 어렴풋 취하신 모습으로 들어올 때 마주치고, 여자의 여동생을 마주치고, 여자를 마주치지 않는 대부분은 집으로 오는 길에 친구네 집에 들러서 자고 온 기억이 난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없다. 1남 3녀의 차녀인 여자는 부모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을 버리고 일찍 돌아가셨다. 여자가 살아온 날들을 조금씩 듣고 있다.
● 서른 살이 되었다. 1996년 마지막 날 자정이자, 동시에 1997년 1월 1일 0시였다. 으레 친구들끼리 모여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친구 집이었고, 남자의 친구와 결혼한 여자의 친구인 여자도 물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친구와 여자의 친구를 서로 소개해 줘서 결혼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지 못했다. 여자 친구가 있는 사람은 함께, 혼자인 애들은 별 수 없이 혼자서 여럿이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자주 가는 식당의 밥맛이 점점 없어지듯, 무엇이든 횟수가 잦아지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술을 마시는 데 갑자기 티브이 소리가 들렸고 그 해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를 축하한다며 막 출산을 마친 엄마와 아이가 화면에 나왔다. 여자의 친구와 나의 친구인 놈이 웃으며 '그 여자네!' 하고 말했다. 내가 보니 여자가 방금 출생한 남자아이를 안고 있다. 친구들과 그 여자의 친구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보지 못했으니 티브이에 저런 모습을 하고 나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마지막 여자를 본 이후로 각자의 삶을 사느라 적어도 20년이 흘러갔다. 그와 나는 잊힌 풍경 중의 하나였다. 중간중간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우리는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다. 삶은 무엇으로 표현해도 실제 살았던 것보다 덜 본질적이다. 지나치는 바로 그 순간에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과 느낌을 아무것으로도 정확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 춤, 그림, 영화 등 무엇으로도 순간을 정확이 설명할 수 없다. 남자는 계면쩍은 웃음을 짓고 씁쓸한 표정이었다. 지금도 가끔 남자는 혹시 남자의 친구와 결혼한 그 여자의 친구가 나와 여자의 만남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자는 특히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을 가장 원한다. 그러나 여자의 친구는 늘 남자의 사랑을 바라기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에도 별로 여자에게 많이 의지하지 않았다.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바보같이 보일 정도로 여자에게 의지했다. 그런 모습은 여자의 친구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일 수 있었다. 싫다고 생각되어 일부러 나를 막은 것이 아닐까? 마시고 떠들면서 지낸 날이지만 친구들과 있었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見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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