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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하게 늘 다 빼앗기기만 할거니?

지구빵집 2020. 2. 1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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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에는 항상 시작이라는 게 있다. 현재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억이 나지 않거나, 마치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색이 변하기 시작하는 분명한 시점이 있으니 맞는 말이다.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마음이 언제부터 변하는지 꼭 집어 말할 수 없으니 '변했다'라고 써야 한다. 놀람, 슬픔, 어색함, 민망함, 애틋함 등과 같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시작과 끝을 명시하기 어려운 말이다. '사랑했다.'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써야지 '사랑하기 시작했다.'라고 쓰거나 '사랑이 끝났다.'라고 쓰면 어색한 말이다. '사랑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시작과 끝이 정해진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끝난' 사랑은 모두 아프다.

 

"매일 멍청하게 다 빼앗기기만 할 거야? 뺏기는 게 지식이나 돈, 시간뿐이라고 생각하니?" 여자가 말했다.

 

"네가 빼앗기는 것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시간, 지식, 재능 모든 것이라고. 네 주변에 있는 것, 네가 관계 맺고 있는 것,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 네가 버린 것, 만나지 않는 사람, 다른 환경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 놓고 간 것까지 전부, 전부 다란 말이야. 이해 못하겠어?" 여자가 말했다.

 

"네가 결점이라고 생각했던 게 결점이 아니라면? 네가 보는 눈높이가 맞는데도 자꾸만 다른 데를 쳐다본다면? 네 생각이 정말 맞는 생각인데 너는 자꾸 바꾸려고 한다면 말이야. 그래도 네가 뺏기는 게 없다고? 말도 안 돼." 여자가 말했다.

 

"자꾸 나를 바라보지 마. 그 지적이고 맑은 눈으로 너 자신을 보라고."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갑자기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 아니, 내가 보고 살아온 것은 뭐지? 하고 생각했다. 제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더 이상 뺏기기 싫었다. 아니 몰랐으니까 또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 놈의 배울 게 그리 많은 건지. 아마도 억지로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좋아하는 선배가 좀 큰 사업을 벌이다가 5억 정도 털린 날, 식구 모두 데리고 나가서 한우를 사주었는데 우연히 합석하는 바람에 신나게 먹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배가 그러더라. 집안에 가장은 바깥일이 힘들수록 집에서 의연해야 가족이 안심한다고. 그래야 자기도 주눅 들지 않고 다른 일에 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멋진 말이다. 내가 한참 일이 안 풀려서 힘들 때 가끔 술 마시러 찾아갔는데 어떤 날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어차피 때 되면 다 죽는다.'라고. 이 말을 언듯 들으면 위로인가 싶은데, 선배가 말하는 의미는 삶이란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고, 모든 일은 죽는 것보단 작은 일이니 그런 작은 일에 휘둘리며 신세 조지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감동이 밀려왔고 힘을 조금 얻고 세상으로 나갔다. 사랑을 잃고 죽는 사람은 드물지만, 소화불량으로 죽는 사람은 훨씬 더 많다.

 

"일을 못해도 되고, 가진 것을 뺏겨도 되고, 시간을 연장시키려고 수를 쓰느라 툭하면 말하는 게 배운다는 말이겠지. 멍청하기가 이를 데 없어." 남자가 말했다.

 

"넌 행동방식이 정해져 있어. 다 보이고, 다 예측 가능하고, 다 읽혀." 여자가 말했다.

 

"네가 갖고 싶은 것, 마음, 베푸는 것 모두를 뺏기는 거랑 뭐가 다른데? 자꾸 그러면 한심한 거야. 다 부어주냐? 감추고 덜 보여줘야지 다 보여주고 말이야.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를 제대로 봐. 당당하게 요구해."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같은 길을 달리고, 같은 규칙을 지키고 있어. 이런 걸 한 배를 탔다거나 같은 처지에 있다고 말하지." 남자가 말했다.

 

"넌 왜 항상 그렇게 단순한 거니?" 여자가 말했다.

 

"타고난 게 그래." 남자가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삶은 없었을 거야. 꿈도 못 꾸었을 거야." 여자가 말했다.

 

"나도 그래" 남자가 말했다. 

 

남자가 가장 먼저 끊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몰랐다. 일상으로 행해지는 생활 일부분 일수도 있고, 남자가 잘 빠져드는 중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일지도. 사람은 악몽과 고통이 삶을 지배할 때 사랑하고 성장하고 변화한다. 부족함을 채우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게 인간의 일이다. 

 

"그러면 또 고립이니?" 여자가 말했다. "도망칠 거야?"

 

"아니 잠깐 떠나 있는 것뿐이야." 남자가 말했다. "당분간 말이야."

 

"너는 떠나지도 못하면서 항상 도망치려고 해. 절대로 달아나지 마!" 여자가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가 화내는 것 보니 배가 고픈 모양이네. 생선 요리 잘하는 데가 있어. 당근이랑 같이 먹어야 해. 물론 와인도 한 잔 할 여유는 있어."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그게 좋겠다. 아주 좋아."

 

"넌 알면 알 수록 미스터리야. 후후" 남자가 말했다. "미스터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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