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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가 없으면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지구빵집 2020. 12. 1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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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보낸 한 학기는 100년 정도 함께 지낸 것처럼 길었다. 그만큼 아이들과 나에게 즐거운 일이 많았고, 그나마 겨우 마스크를 쓰고 눈동자를 자주 본 정도인데 정도 많이 들었다. 아이들은 잘 따랐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행동을 통해 경험하는 일이 모두 우리 것이다. 우리가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성과를 내든 실패 하든 모두 우리 것이다. 팀워크가 잘되어도, 실망감에 얼굴을 붉혀도 남김없이 우리의 것이니 감당해야 한다.

남자는 2학기 종강과 작품 발표회 준비로, 다른 하나는 동호회 총회 준비를 하는 바람에 시쳇말로 무엇이든 갈아 넣으면서 지내고 있다. 섬뜩한 단어와 문장을 싫어하는 남자는 이제야 갈아 넣는다는 표현을 한다. '시나리오를 준비하지 않으면 적들에게 휘둘린다.'는 문장을 '시나리오가 없다면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라고 바꾸는 사람이다. 아침에 슈트를 입으며 '전사의 갑옷'이라 말하고, 모든 상황을 손자병법이나 삼국지를 들이대며 사는 사람에게 인생이 전쟁터면 일직 전사하는 게 행복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애초에 출전하기도 싫은 일이 아닐까?라고 누군가 쓴 글을 읽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마라톤처럼 힘든 여정을 누가 기꺼이 감당하며 인생이란 대회에 출전하고 싶을까? 아마도 의미가 약간은 다를 것이다. 끝까지 참고 인내하고 살아야 하는 게 삶이라는 표현과 고통스러운 삶의 여정에 나서는 일은 아니지 않으냐 하는 표현이 중복되었다.

갈아 넣으면서 지내다 보니 시나리오가 시시각각 변한다. 시나리오가 하나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처음 겪는 엄중한 상황이 가장 많이 변하고, 강의실이 바뀌고, 회의 장소가 하루마다 바뀐다. 참석 인원이 줄고 꼭 필요한 사람은 없다고 간주한다. 행사는 계속 축소되고 작아지고 줄어든다. 시나리오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Plan A부터 b, c... z까지 있으면 좋은 일이지만 모든 일을 걱정하며 사는 인생만큼 불쌍한 일은 없다.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언제나 처해진 상황에 맞게 따르고, 즐기고, 적응하면 우리는 살아남는다. 

아들은 오후 3시에 일어나 짐을 싸고 6시가 넘어 KTX를 어디선가 타고 포항으로 여행을 떠났다. 잘 도착하고, 바다를 가고, 잠 잘 곳을 잡았다고 알려왔다. 아이는 늘 남자의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살아간다. 아들이 허락한다면 그와 함께 오래 머물고 싶다.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태도가 좋다는 이야길 자주 해." 남자가 말했다.

"훌륭한가 보네." 여자가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잘 배우는 애들은 없을 걸. 행동하면서 세상을 배우는 아들과는 달라." 남자가 말했다.

"재미있나 보네." 여자가 말했다.

"아들에게는 태도가 좋다는 말을 못 하겠어. 아니 별로 태도가 좋지 않은 거 같아. 아닌가?"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나이를 이렇게 먹고도 지지고 볶고 사는 데 태도가 좋아? 스무 살 아들이 이 정도면 태도 좋은 거야." 여자가 말했다.

"그렇구나." 남자가 말했다.

 

아이는 항상 믿을 만하다. 아마 다음 주엔 남자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겐 태도가 좋다고 말하고, 한 가지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표현을 잘하는 남자는 세심할 정도로 이야기를 자주 하는 데 아들에겐 별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들에게는 항상 멋지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하는 소리나 해댄다. 한시가 급한 아이에게 삶의 원리 같은 것들을 말하려고 하는 남자는 아이에게 기피 대상이다. 입영을 앞둔 남자아이는 놀아야겠다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 남자와 밤에는 화투를 치며 놀아주고, 참치회, 닭발, 쭈꾸미 볶음같은 야식을 시켜먹는다.  

인간은 무엇이든 잘 배우는 동물이다. 다른 동료의 행동과 생각을 잘 따라 하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기할 정도로 잘 인지하고,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동물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선택한 대로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그렇지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일은 사실 없다. 세상은 항상 우리가 생각한 의지를 방해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의도하는 일은 항상 어긋나고, 계획은 실패하고, 약속은 깨지기 마련이다. 시나리오가 필요한 이유다. 가능한 한 많이.

 

 

외국 사진인데 자신이 본 익숙한 모양의 먹이를 준 주인을 바라보는 고양이. ㅎㅎ 고양이 똥 모양의 과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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