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각 바른 글

아들은 남자가 지나 온 모든 것들과 화해하게 만들었다

지구빵집 2021. 1. 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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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남자가 지나 온 모든 것들과 화해하게 만들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가장 최근 것을 써야 한다. 그러니까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일과 최근의 생각, 가능한 한 가장 또렷한 기억을 글로 써야 한다. 오늘은 놀았던 게 아니라 일을 했다. 끊임없이 기록하고 묘사하고 남기는 일을 남자는 잃었다. 기억도 최근 것부터 일찍 사라지겠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거나.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야. 어디 글뿐이겠는가?

일을 할 때도 오늘 일부터 시작한다. 지난 일은 내버려 둔다.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우리 머릿속에 기억이 존재하는 방식, 심장에 마음이 존재하는 방식, 글을 쓰는 일관된 방식으로 일을 한다. 좋아하는 것,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아끼거나 주저하지 말고 낭비하는 순서는 늘 한결같아야 한다.

입대하기 삼일 전이다. 아침 일찍 남자는 상적동 사무실이나 학교로 나가야 했지만 억지로 아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어젯밤에는 아들과 국민 낙곱새(낙지 곱창 막창 새우를 볶아 먹기 좋게 포장해 배달하는 음식)를 시켜 술을 마신 터라 아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아이는 어젯밤 9시까지 읍내 오븐 마루에서 술을 먹고 놀다가 친구들과 자주 모텔로 다시 자리를 옮겨서 놀았다. 가장 안전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아침까지 놀다가 들어왔으니 오후에나 일어날 아이를 일찍 깨운다. 오늘은 아이가 입대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내는 평일이라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 

벽산 빌딩 3층 더 헤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는다. 어색한지 이발하는 동안 자꾸만 나를 뒤돌아 본다. 너무 짧게 깍지는 말아달라고 하지만 군대 가는 아이들 머리를 한 두 번 깎아본 적은 없는 미용실 사장님은 조금도 봐주지 않는다. 평촌 롯데 백화점으로 가서 모자를 사러 간다. 여러 곳을 다녀보아도 적당한 모자는 없다. 나이키 매장에서 검은 모자를 산다. 전자시계를 사러 지샥에 들렀다. 보통 2-3만 원짜리 시계를 사면 좋겠는데 아들은 꼭 브랜드를 고집한다. 거의 3시가 다 된 시간에 팔팔 낚지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는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비혼을 생각한다고 한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네 걱정 조금도 안 해. 말하자면 네가 내 전부야. 무엇이든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고 곤란해지는 게 삶이야. 운동하면 다치고, 돈이 생기면 취하게 되고, 차를 사면 사고가 나지.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그건 삶이 아니지. 무엇을 해도 곤란이 생기지 않게 하란 말이야. 경찰서나 병원에 가지 않고, 시비나 싸움에 휘말리거나 송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 너는 무엇이든 잘 배우는 아이야. 아빠가 가르치지 못해서 그렇지. 너처럼 빨리 배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무엇이든 잘 배우는 사람이야. 태도도 그만하면 좋다고 생각해. 스스로 본성을 누르고, 배려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추길 바라. 나와는 다르게 세상과 부딪히며 일찍 많은 것을 배웠으니 더 이상 네게 뭐라고 할 것도 사실 없단다." 

"네가 아이를 낳으면 너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모두 줄 거야. 책을 많이 읽어주는 일은 네가 하고, 할아버지는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치고, 딥펜을 사서 한글 펜글씨를 가르치고, 만년필도 사 줄 거고 영어 필기체를 세련되게 쓰는 법을 가르치고, 옷을 염색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조금 크면 너 어릴 때 낚시 가르친 것을 그대로 가르쳐야지. 우럭 루어 낚시며, 송어 플라이 낚시, 겨울철 얼음 빙어 낚시도 함께 다닐 거다. 산에서 살아남는 방법과 길을 잃었을 때 별자리를 보고 방향과 길을 찾는 방법, 두 손이 묶인 채 물에 빠져도 수영하는 방법도, 네가 잘 못하는 힘을 아끼고 물 위에 가만히 떠있는 방법도 알려줄 거란다."

"일찍 할아버지로 만들어 주지 않겠니? 무슨 수를 써도 괜찮아. 일찍이면 된다."

여기까지 말하는 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눈이 붉게 물드는 것을 느낀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낙지볶음을 뒤적인다. 아들은 눈치를 채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남자는 실감이 나지 않아 주로 장난을 치고 놀리기를 잘한다. 며칠 남지 않아서인지 남자는 심란하다.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혼자 지낼 용기도 바닥났다. 마음을 잘 추스른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가기 전부터 이러면, 막상 1사단 신병 교육대에 아이를 보낼 때는 펑펑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난다고 하니 그레이스 호텔 앞에 아이를 내려주고 남자는 학교로 간다. 학교는 방학인지라 조용하기만 하다. 수능을 마치고 논술 시험에, 예체능 실기 시험이 진행 중이지만 코로나 단계가 상향되면서 지나치게 조용하게 치러진다. 밝기도 하고, 온도 설정이 잘 되는 연구실은 정말 놀기에 좋다. 아침 일찍부터 밝은 햇살이 가득하다. 미루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일사천리로 한 마리씩 처리한다. 집중하면 좋은 이유가 마음의 산란이 없기 때문이다. 긴 시간 평온(serenity)을 유지할 수 있다. AD2 PBL 강의계획서를 수정 작성하고, 밀렸던 서평 3개를 작성해 단숨에 블로그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남자는 모니터로 읽기를 싫어한다. 프린트 한 10여 편의 논문중 3-4편을 읽고 요약을 한다. MagPi에서 무료로 내려받은 라즈베리파이 프로젝트 설명서를 빠르게 읽어본다. 활자, 사랑, 글쓰기, 책, 담배, 술, 운동, 커피 등 여러 가지에 중독된 사람이 오래 살기는 불가능하다. 죽음도 일종의 중독이기 때문이다.      

청주 부모님 댁에도 가고, 장인 댁에도 인사를 다녀왔다. 아들은 남자가 지나온 삶의 거의 대부분과 화해하게 만들었다. 아들은 눈치를 챘는지 모르지만 알 지도 모른다. 아니 알아야 한다. 아들이 남자가 지내온 대부분과 화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아들이 알기를 바랐다. 남자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다. 특이하다기보다 독특하고, 이상하기보다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남자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 떠나든가 말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기 싫겠지만 이놈아. 며칠동안 나는 잠도 못 자겠지. 너 가면 이사갈거다. ㅎㅎ  #입영열차안에서   #입영전야   #좋아보이는데   #대한민국육군   #갈때가더라도   #사진은찍자   #심란한건아빠다   #아들   #이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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