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역사의 중심은 인간이 아닌 매체. 프리드리히 키틀러

지구빵집 2022. 6. 20.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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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는 달리, 매체는 맹목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는 우연을 예측할 수 없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Friedrich Kittler 

 

독일의 매체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문자를 배우는 방식이 개인의 사고에, 그리고 더 나아가 한 시대의 문화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통찰했다. 키틀러에 따르면, 낭만주의 시대 독일 문학에 어머니, 여성, 자연에 대한 찬미가 나타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는 1800년을 전후로 어머니의 역할이 크게 확대됐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당시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 계급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 어머니의 새로운 가정적·사회적 책무로 요구됐다. 이들은 어머니가 낭독해 주는 최초의 소리를 듣고 낯선 단어의 발음을 익혔다. ‘가르침을 속삭이는 어머니’라는 관념이 새롭게 발명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낭독을 통해 아이들이 배운 문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문자는 숭고한 내면의 소리, 즉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 이면에 담고 있다고 여겨졌다. 아이들은 문자를 처음 읽을 때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까닭에, 성장한 뒤에도 독서를 할 때마다 행간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된다. 괴테와 같은 남성 작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이 글쓰기를 통해 어머니의 목소리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괴테는 이 시대의 대표작인 ‘파우스트’를 이렇게 끝맺는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 

 

키틀러는 매체의 변화를 역사를 진행시키는 유일한 동력처럼 기술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인간과 기술이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을 논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키틀러의 통찰에 따르면, 현대의 디지털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매체의 역사에서 정보 처리 기술은 끝없는 순환을 통해 스스로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인간의 설 자리를 축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없이 사물끼리 소통하는 사물인터넷의 시대에 이와 같은 고찰은 매우 시급하다. 이렇듯 키틀러는 역사 속에 인간의 빈자리와 매체가 늘 존재했음을 다시 일깨우며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기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기사참고.

 

 

축음기, 영화, 타자기, 프리드리히 키틀러 저

 

 

1943년 독일 작센주 로흘리츠에서 태어났다. 196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입학해 독일어문학, 로망어문헌학, 철학을 공부했고, 1976년 스위스 작가 콘라트 페르디난트 마이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독일문학사 전공 교수자격 취득 논문으로, 한 시대의 문학과 문화를 뒤틀어 매체사로 재구성한 『기록시스템 1800/1900』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뒤이어 나온 『축음기, 영화, 타자기』는 앞선 문제의식을 계승해, 최초의 아날로그 기술 매체들의 태동기였던 1900년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며 새롭게 탄생들이 기술들이 가져온 혁명적인 변화들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이 책을 통해 키틀러는 다시 한번 논쟁을 일으키고 세계적인 매체학자로서 입지를 넓혔다. 1987년 독일 보훔 대학 현대 독일문학 교수로 부임했고, 1993년부터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 문화학 및 미학 교수로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베를린 매체 학파”를 이끌게 된다. 2000년 이후에는 그리스 철학과 음악, 수의 근원적 개념으로 거침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사유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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