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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서재

아니 에르노 사건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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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79)는 1964년 임신중절을 한다. 대학 시절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그녀가 배가 불러오는 걸 기다리는 것 이외에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그리고 199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경험을 글로 쓰게 된다. 이 강렬한 임신중절에 대한 고백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에 소개된다. 이 사이엔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할까. 

 

아니 에르노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는 프랑스에서 낙태가 불법이던 시대였다. 1970년대 여성들이 거리에서 벌인 긴 싸움 끝에 1975년 프랑스는 낙태가 합법화된다. 그땐 매년 250명의 여성이 불법 임신중절 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올해 4월,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위헌이라고 결정한다. 만약 이 같은 결정이 없었다면, <사건>은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지난 시대 이야기다. 그 시대에 그런 일을 겪은 것이고, 작가이기에 글로 쓴 것이다. 같은 일을 겪고, 없어지고, 사라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다. 그 말미에 자기에게 남겨진 유일한 일은 그 경험을 글로 남기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무가 지워진 걸까?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 글을 쓰게 만들었을까? 인간의 정신이란 하도 사나워서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다.  

 

 

어느 월요일 부모님 댁에서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카디건을 짜기 위해 어느 여름날에 사들였던 뜨개질바늘 한 짝을 가지고 왔다. 두 개의 길고 선명한 파란색 바늘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혼자 해보기로 결심했다. p.37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38

 

온 힘을 다 주었다. 수류탄이 터질 때처럼 문까지 물이 튀었다. 작은 아기 인형 같은 형체가 붉은 줄 끝에 매달려 성기에서 대롱대롱했다. 이것이 내 안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걸 가지고 내 방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손으로 쥐었다. p.64

 

우리는 태아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 친구가 방에 가서 빈 비스킷 봉지를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그 안에 그것을 넣는다. 나는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안에 돌멩이가 있는 것 같다. 변기 위에서 봉지를 뒤집는다. 변기 물을 내린다. 일본에서는 중절한 태아를 미즈노코, 물에 아이라고 부른다. p.65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아파왔다. 모유가 올라가서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다. 삼 개월 만에 죽은 태아를 먹일 수 있도록 내 몸이 젖을 만들어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연은 부재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계속 일을 했다. 가슴을 천으로 둘러매 줬다.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마치 가슴을 안쪽으로 집어넣으려는 듯 점점 납작해졌다. p.71

 

모욕과 두려움 그리고 우리가 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p.72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 사건에 대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유일한 죄책감을 지웠다. 재능을 받았지만 낭비해 버린 듯 경험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이유를 넘어서서 무엇보다 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p.79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현대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다.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과 거기서 벗어나고자 분투하는 내면을 생생하게 그려낸 <부끄러움>, 1941~2006년 프랑스 사회를 한 여성의 시각으로 기록한 <세월> 등으로 세계적 작가로 자리 잡았다. 생존 작가로는 최초로 프랑스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됐다. 

 

참고

거장의 임신중절 고백, 그 강렬한 울림 

 

 

사건, 아니 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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