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달리기, 얼마나 더 달려야 할까.
입추가 막 지났다.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가을 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여름을 보낼 준비를 한다. 한 여름 뜨거운 햇살을 충분히 받았고, 우리 몸을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만들었고, 능소화와 배롱나무꽃이 피어나고 저무는 것처럼 지겹게 실패했고, 땀에 젖은 싱글렛과 손수건, 느릿느릿 바람을 보내던 부채와 함께 보낼 시간이 되었다. 비록 때가 되어 보내야 할 것은 보내지만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사실, 흘려보내면 다시 또 여름은 돌아온다는 사실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영화 콜 오브 와일드(2020)는 잭 런던의 베스트셀러 '야성의 부름'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얼음 썰매를 몰며 우편을 배달하는 페로는 벅에게 말한다. "우리가 해냈어! 봤지, 벅? 우린 우편물을 나르는 게 아냐. 삶을 나르는 거야. 희망을 나르고, 사랑을 전달해." 전신 전보가 들어와 썰매를 끄는 팀이 해체되고 야생으로 돌아간 벅은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삶이란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헤쳐나가며 그 경험을 통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를 가진 일이 된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더 달릴 때지, 그냥 흘려보낼 때는 아니다.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별로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일들을 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 모한다스 K. 간디
8월 3일. 화. 12km
현자가 부상에서 회복하고 훈련날이면 빠짐없이 나와 달리고 있다. 순자 선배는 더 쉬어야 하는데 워낙 부지런한 성격이라 천천히라도 달린다고 나왔다. 서초 힐즈 아파트 시작하는 지점은 과천과 서초구의 경계다. 거기서부터 버드나무가 양재천을 따라 줄지어 있는데 매미들이 많은지 버드나무 잎에 반사되어 들리는 매미소리는 귀가 멀 정도다. 오늘도 매미가 겁나게 우는 눈부신 주로 양재천을 따라 영동 1교를 왕복한다. 천천히 가고 올 때 제법 빨리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관문 체육공원에 도착하고 나서 현자가 많이 힘들어 보인다고 말했다. 정말 너무 달렸나 보다. 앞으로 조금씩 달리기로 한다. 당분간은 쉬기로 한다. 좀 늙어 보인다는 말이나 시커먼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근력운동을 주로 하고 햇빛을 조심하고 많이 달리지 않기로 한다. 세월이 확 흐른 느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직 갖고 싶은 것도 많은데 벌써 힘이 빠진 건지.
8월 7일. 토. 대공원 번개 6km
오래간만에 나온 춘식(식자), (성수)수자 선배와 달렸다. 식자 선배는 아침 일찍 나와 6바퀴 18km를 달리고, 수자 선배는 4바퀴 12km를 달렸다고 했다. 7시 전에 나와야 하는 데 7시 40분에 나와 느긋하게 3km 코스를 두 바퀴 달렸다. 당분간 힘이 다시 생기고 거리가 반갑게 느껴질 때까지 짧은 거리를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독은 끊기가 힘들어서 얼마 동안 달리지 않고 참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사람은 편한 것을 잘 받아들이니 모르겠다.
8월 10일. 화. 10km
단순히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길 위에서 삶을 살고, 희망과 함께 달리고, 동료에 대한 애정과 타인에 대한 예의, 우리의 의지와 함께 달리는 것이다. 현자와 만나 영동 1교까지 왕복한다. 주암교를 지나서 영동 1교에서 달려오는 금자(영금) 선배를 만났다. 오랜만에 보니 얼굴이 핼쑥 말라 보인다. 일 때문에 바빠서 그렇다고 한다. 다시 가던 길로 달려간다. 한국 교총 건물을 지나 주유소 앞 길까지 달리면 5km 거리인데 조금만 달리기로 했지만 욕심이 앞선다. 더 가려다가 현자를 영동 1교로 보내고 다시 관문 운동장으로 달려간다. 거리를 조금 줄이니 집으로 돌아와서도 지치지 않고 가볍다는 느낌이 든다. 1월에 군대 간 아들이 처음 휴가를 받아 집에 왔다. 5일 정도 짧은 휴가지만 아들은 생각보다 근사하고 멋지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씩씩하고 듬직해 보였다. 물론 반나절 지나니 군대 가기 전 팔자 좋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저 반갑기만 하다.
8월 19일. 목. 12km.
호흡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들쑥날쑥한다. 차분하고 일관되게 소리 나지 않는 호흡이 아니라 힘을 쓰는 게 달라지니 주로를 달릴 때 마음처럼 소란스럽다. 순자 선배와 현자와 영동 1교를 돌아오는데 현자가 말해준다. 호흡, 자세, 시야, 팔을 치고 정확하게 한 걸음을 옮기는 것까지 한 가지라도 틀어지면 바로 겉으로 표시가 난다. 우리가 누구인가는 우리의 태도가 말해주듯이 달리기는 달리는 자세와 호흡이 달리는 수준을 말해준다. 안정적인 호흡을 한다고 해도 속도가 조금 빨라지면 호흡은 몇 배 더 가빠지고 웩웩 소리를 내며 달리게 된다. 중간중간 힘내라고 짧은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잠시 돈 떼인 문제를 생각하기만 하면 호흡은 여지없이 발걸음보다 멀리 달아난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네가 나 따라오려면 멀었어.' 순자 선배가 끝까지 늦추지 않고 운동장에 들어오며 말했다. 늘 그렇게 새파랗게 살아 있으면 좋겠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약해지고, 무성한 수풀이 사그라드는 일이 필연이라면 끝까지 도전하고 꺾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일은 존재하는 것들의 의무다.
8월 21일. 토. 대공원 9km
이번 여름은 빗속을 달리는 우중주 雨中走가 잦았다. 푸른 몸이 힘들어 잠시 쉰다고 생각했고, 아들의 휴가로 게으름을 피웠더니 약간 살 만해졌다. 엊그제부터 다시 달리니 조금은 욕심도 살아나고 밀린 일들을 하고 싶다. 피어나고 저무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의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쉽게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존재의 권리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직은 사랑해야 할 것도 많고, 실패할 것들도 많이 남았다. 이미 뜨거운 여름이 다 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또 돌아올 여름이다. 온전히 살아남고 버텨야 한다. 뜨거운 여름에는 눈 내리는 겨울과 얼음을 생각하고, 그런 겨울에는 햇살에 녹아내리는 아스팔트와 여름 과일을 생각하며 버티는 게 우리가 사는 단순한 원리다.
오래간만에 구자(윤환구) 선배가 참석했다. 진자와 순자, 미자 선배와 함께 비가 내리는 대공원을 달리는데 시원했다. 세찬 비바람 속을 달릴 때는 바람의 저항이 심하지만 꽂히는 빗줄기는 온몸의 감각을 살아나게 한다. 방학이 끝나가고 8월도 금방 가버릴 정도로 짧게 남았다. 백신도 맞아야 하고 강의 준비와 납품 일정으로 바쁠 생각에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다. 훈련은 가능하면 빠지지 말고, 무너진 루틴을 복구하고, 정확한 일정에 따라 지내기로 한다.
끝났다.
코로나 19 백신 1차 접종이 있어서, 달리러 나가기도 전에 비가 온다고, 몸무게가 너무 많이 빠져서 힘들다고 제법 봐줄 만한 이유를 대며 잔꾀를 부렸더니 어느새 8월 훈련이 끝났다. 거의 13번 훈련 날 중에 5번을 달렸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 한 번이라는 사실과 아까 건너뛴 점심은 다시는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더군다나 우리 몸도 단 하나면서 그 몸으로 단 한 번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좀 더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 뙤약볕과 화가 난 듯 솟아오르는 짙푸른 수풀이 지겹다고 어서 가라고 등 떠민 게 후회가 된다. 고단한 여름을 헤치고 나온 몸은 아직도 푸른지 모르겠지만 괜히 여름에게 미안하다. 너무 많이 달려서 몸이 혹사당한 느낌이 들어 몸에게도 미안하다. 힘들면 정해진 훈련 시간을 건너뛰어도 되지만 마음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욕심을 부렸는지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게으름을 피웠다. 한 주간이라도 달리지 않을 때는 속으로는 겁이 나기도 한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이 헤매지나 않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음악가나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실력과 감각을 좀 더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 일정 기간 완전히 휴식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풋내기나 몽땅 쏟고, 태워버리고 한 순간 불타오르고 꺼져버린다. 한 순간 영광과 부와 명예를 몽땅 가지고 젊은 시절 은퇴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노련한 전문가는 한순간 완전히 일에서 떠나 있는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에 매달리려는 감정을 극도로 누른다. 그러다 보면 정말 다시 악기를 연주하고 골프채를 휘두르고 싶다는 욕심이 들면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 그런 자세로 다시 전념하니 오래간다. 평생을 전문성을 쌓는 일에 지치거나 떠나지 않고 유지한다. 누구나 자신의 일을 하고, 평생 전념하고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해야 한다는 면에서 마찬가지라고 본다.
늦은 장맛비가 내리고 9월로 접어들면 이젠 포니테일, 우중주, 싱글렛, 계곡, 민소매, 작열하는 태양을 마주할 수 없지만 내년에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에 또 가슴이 떨린다. 9월이 되면 시간은 다른 때와 달리 어마어마하게 빨리 흐른다. 가을이 오면 2021년 남은 날들은 진짜 훨씬 빨리 없어진다. 겨울을 지나고 봄과 여름을 보내는 시간은 그나마 긴 편인데, 이상하게도 8월을 넘기면 순식간에 12월을 맞이하고 일 년을 보내야 한다. 아마도 기분 탓인지(쓸쓸하고 폐허를 보는 일은 싫어서), 실제 그런지(정확히 8개월과 4개월) 모르지만 올해 남은 날들이 얼마나 빨리 갈지.
삶에 무엇이 와도 평온함을 잃지 말자. 산맥처럼 쌓인 문제 전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눈앞에 한 끼 해결하는 일, 달리고 윗몸일으키기 200번 하는 일, 개발해서 납품하는 제품 5대, 오늘 오후 온라인 강의 두 시간, 자료 작성하는 한 페이지를 완벽히 하는 일에 전념한다. 바람이 선선해지고, 노을이 주황으로 물들고, 단풍이 넘실대는 계절에는 더 자주 주로를 질주하기로 한다.
훈련 일지
8월 3일. 화. 12km. 영동 1교 황복
8월 5일. 목. 일하느라 빠짐.
8월 7일. 토. 6km. 대공원 번달.
8월 10일. 화. 10km. 양재천 주로
8월 19일. 목. 12km. 영동 1교 왕복
8월 21일. 토. 9km. 대공원 번개 달리기. 우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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