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챈스의 외출(Bing There), Step 저자 Jerzy N. Kosinski

지구빵집 2022. 7. 19.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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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진스키의 Step을 찾던 중 저자 설명을 찾아 옮긴다. 

 

 

작가 저지 코진스키는 1933년 6월 14일 폴랜드의 로드즈에서 출생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면서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유태인으로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부친은 가족을 분산시킨다. 외아들 코진스키를 살리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소련 국경 근처의 한 시골농부 부인에게 피난을 보내어 코진스키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 부인이 곧 사망하자 그때부터 여섯 살 짜리 어린 코진스키는 홀로 정처 없는 유랑길에 나서게 되고, 전쟁이 끝나 11살이 되는 1945년까지 6년 동안 참혹한 전쟁의 피해자로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과 박해를 받는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유랑생활 중 폴란드의 농촌을 떠돌던 어느 날 심술궂은 한 농부가 그를 변기통 속에 집어 던져 버린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살아나기는 했지만 이때의 충격으로 그는 실어증에 걸려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고달프고 처절한 삶 속에서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닥쳐왔으니 마침내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말 못하는 벙어리 소년이었던 그는 부모를 스스로 찾지 못하여 고아로 전전하던 중 어느 소련 장교의 주선으로 ‘고아 피난민 보호소’에 수용되어 지내게 된다. 그때 어머니의 얼굴을 빼다 닮은 그의 모습이 우연히도 어머니를 알고 있던 사람에게 발견되어 그가 부모에게 연락하자 수용소를 찾아온 그의 어머니는 겨드랑이 밑의 사마귀 점으로 코진스키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한다.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다시 부모를 만나게 된 코진스키는 벙어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특수학교에 보내진다. 그러나 오랜 떠돌이 생활로 너무나 허약해 진 아들의 건강회복을 위해 코진스키 부모는 벙어리 스키강사가 운영하는 산악휴양소에 보내 코진스키로 하여금 요양생활을 하도록 하게 한다. 그러다가 스키를 배우던 1947년 몹시 추운 어느 날 코진스키는 스키장에서 뜻밖의 사고를 겪어 두개골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는다. 3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우연히 언어기능을 다시 회복하여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정말로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과 우연의 운명이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폴란드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던 나치정권은 물러갔지만 곧 이어 폴란드는 소련 스탈린의 통치를 받는 공산 위성국가가 되어 버린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공포의 숙청과 처형에 따른 무서운 탄압이 시작되고 폴란드에는 철의 장막에 갇혀 버린 공산주의 공포정치가 새롭게 등장한다.

 

코진스키는 1950년부터 1955년까지 로드즈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하여 두 개의 석사학위까지 받고 22세 때에 폴란드 육군에 입대하여 저격수로 복무한다. 제대 후 그는 본격적으로 소련에 관해 연구활동을 하고 마침내 폴란드 과학아카데미에서 교수생활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만 존재 할뿐 인간의 자유가 처참하게 말살되어 버린 공산주의 체제에 저항감을 갖게 된 젊은 코진스키는 공산당 사회에 요령 있게 적응하지 못한다. 공산당의 일상적인 집회 참석과 충성적인 행동, 강요적인 자아비판, 타인에 대한 감시와 공격에 소홀하다는 당과 청년동맹의 계속되는 견책과 비판을 감당해 내기 어려워 그는 공산주의 체제의 조국 폴란드를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코진스키는 자신의 이상적인 목적지인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2년에 걸쳐 치밀한 준비를 한다. 미국으로 가는데 필요한 서류, 초청장, 재정보증서 등 필요한 모든 서류의 위조에 성공하여 24세가 되던 1957년 그는 마침내 미국으로 망명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이처럼 목숨을 건 필사적인 모험 끝에 그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고, 그로부터 그의 자유로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온 미국과 새로운 나라에서의 생활은 행복의 낙원이 아니었고 새로운 고난과 시련의 생활이었다. 한동안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기는 했지만 영어를 모르는 그는 당장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주차장 안내원, 트럭 임시운전사, 페인트 공, 청소부, 식당 종업원 등 그는 그야말로 미국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하층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체험을 하게 된다.

 

1958년코진스키는 포드제단에 컬럼비아대학의 박사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신청하여 허락을 받는다. 미국에서 그는 점차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는 했지만 물질만능주의적인 미국사회의 많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치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의 처절한 체험을 겪은 코진스키는 새로운 미국생활의 체험과 더물어 자신의 인생체험을 진지하게 문학작품으로 표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작가가 되려는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1960년 Joseph Novak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첫 작품으로 ‘The Future Is Ours'라는 넌픽션을 발표한 코진스키는 1962년 두 번째로 ’No Third Path'라는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독재성을 비판하는 넌픽션을 발표한다.

 

코진스키의 작품을 읽고 호감을 느낀 철강 재벌 어네스트 웨어의 미망인 메리 웨어가 적극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교제를 하게 되어 두 사람은 1962년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또한 그에게는 우연의 사건이다. 당시 메리는 40세였고 그는 29세였는데 부인인 재벌 미망인의 엄청난 재력에도 불구하고 코진스키는 화려한 상류생활을 피하고 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소박한 생활을 고집했다. 그러나 우연의 행복을 즐기던 그들의 결혼생활은 4년 만에 파경을 맞고 메리는 2년 후 사망한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자신이 겪은 소년시절의 비극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표현한 처녀작 ‘The Painted Bird'를 1965년 발표하여 코진스키는 미국에서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그 해 프랑스의 최우수 '외국소설상' 까지 받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Step' 은 1968년에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 미국 최고의 문학상인 'National Book Award'를 수상하여 코진스키는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확고해진다.

 

여기 번역한 ‘Being There' 는 1971년 발표된 코진스키의 세 번째 작품으로 그가 미국에 망명하여 체험한 현대 미국사회의 매스컴의 위력과 미국 정치사회에 대한 작가로서의 느낌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작가로서 인간사회는 역사적으로 종교와 정치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너무 속박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이건 TV, 라디오, 신문 등 대중매체에 의해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선동적이고 획일적인 집단사고를 유발시켜 강요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코진스키는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1969년 8월 그는 친구인 폴랜스키와 샤론 데이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를 받았으나 LA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게 된다. 그런대 그 날 챨스 맨슨갱단은 샤론과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총으로 무차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코진스키는 샤론집에 늦게 도착한 덕택에 우연히 목숨을 건진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너무도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코진스키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예일대와 프린스턴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73년 ‘The Devil Tree' 1975년에 ’Cockpit', 1977년에 ‘Blind Date', 1979년에 ’Passion Play', 1982년에 ‘Pinball', 1988년에 ’The Hermit of 69Street'를 연속적으로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충실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989년 이후 코진스키는 소설보다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Warren Beatty의 소개로 ‘Reds'라는 영화에 소련군 장교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인 ’어느 정원사의 일생‘은 미국에서 영화화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코진스키는 이 때 자신의 소설을 영화 각본으로 구성하여 1970년 미국 극작가협회와 영국영화 및 TV예술아카데미로부터 그 해의 최우수 영화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자서전적 요소가 많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영어능력에 대한 일부 시비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좋은 평판을 받았고 일반 독자들에게서도 호평을 받았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폴란드계 유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국제 PEN클럽 미국대표로 선출되어 활약하기도 했기 때문에 명실공히 미국 사회의 저명인사가 된 것이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코진스키는 심장질환으로 고통을 겪다가 1991년 58세의 나이에 자택의 욕실에서 감행한 자살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가 그동안 이루어 놓은 사회적 명성 때문에 그의 자살은 미국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망 이후 포스트모던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가고 그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 가치도 더욱 더 확고해지고 있다. 

 

 

Jerzy Kosiński  이미지 출처: https://alchetron.com/Jerzy-Kosi%C5%84ski

 

 

Yes24 작가 소개 

 

커트 보니것, 토머스 핀천 등과 함께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1933년 폴란드 우치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 와중에 부모와 떨어졌고, 비참한 전쟁고아로 떠돌다가 전쟁 후 실어증에 걸린 상태로 부모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종전 후 우연한 사고로 다시 언어능력을 찾은 뒤 우치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역사학 석사학위를 받고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됐지만,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폴란드 공산정권의 억압과 감시를 견디다 못해 24세 때인 1957년 서류를 위조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미국 망명 후 영어를 거의 못하는 상태에서 청소부, 트럭 운전사, 주차장 안내원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 불과 몇 년 만에 영어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포드재단 펠로십 장학금으로 바르샤바의 폴란드과학아카데미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동시에 사회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조셉 노박이라는 필명으로 에세이집 『동지여,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를 발간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소설 『계단』으로 전미도서상을, 『정원사 챈스의 외출』로 미국 문학예술아카데미 문학상을 수상하며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특히 『정원사 챈스의 외출』은 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작가 자신이 각색한 시나리오로 미국작가조합과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올해의 각본상을 수상했다.

 

1991년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하기까지 그의 생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 소설을 방불케 한다. 무명 시절 그의 작품에 매혹된 철강 재벌 미망인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했다가 2년 만에 파경을 맞았고, 핀천과 브라우티건 등 동세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과 달리 사회 저명인사로서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며 NBC [투나잇 쇼] 등 방송 프로에 자주 출연할 만큼 매스컴에도 호의적이었다. 자신의 소설을 직접 영화로 각색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워렌 비티 주연의 영화 [레즈]에 비중 있는 조연(소련군 장교)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사회 저명인사라는 화려한 명성의 이면에는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일부 언론인들로부터 거짓말을 일삼는 허언증 환자다, 영어권에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책에서 내용을 훔쳤다, 영어 잘하는 대필 작가를 고용해 작품을 발표한 게 아니냐는 의혹 제기에 시달렸고, 사생활 면에서는 난폭한 운전과 섹스 행각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에 관한 BBC 다큐멘터리(1995)의 제목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저지 코진스키’였다. 그를 아끼는 지인들은,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끔찍한 전쟁고아 경험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가 전쟁고아였던 게 맞느냐는 의혹의 시선도 존재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에서 스타 작가, 매스컴의 총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미국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페르소나로 유명한 야누시 카민스키 감독에 의해 영화(<래빗 가든>)로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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