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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식스 젤 카야노-25,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까?

지구빵집 2018. 11. 1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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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마라톤 대회가 며칠 남지 않았다. 남자는 더 늦기전에 입욕을 하고 나와서 가만히 발톱과 손톱을 깍는다. 마라톤 레이스에 나서기 일주일을 앞두고 늘 하는 일이다. 약 한 달 전에 거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마지막 점검을 위해 손기정 마라톤 풀코스를 즐겁게 달렸다. 그리고 서서히 운동량을 줄이고 가볍게 뛰면서 대회일을 기다린다. 2주 정도 남겨 놓고는 마음 편하게 몸 상태를 아주 좋은 정도로 끌어 올리기 위한 준비를 하며 지낸다. 주중에 가볍게 6킬로미터를 달리고 마지막에 100미터 인터벌을 4회 정도 한다. 복근 운동이나 근육 운동을 하던대로 한다. 대회날이 가까울수록 새로운 운동법, 새 신발, 새 양말, 몸에 좋은 음식은 하지 않는다. 선배들 말대로 '늘 하던대로' 지낸다. 운동선수도 아니고 대단한 기록을 내기 위해 단련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신발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기린 목이 되어 기다릴 정도로 늦게 도착했다. 글을 써서 제출하여 돈을 벌거나 선물을 받은 게 두 번째다. 받은 신발은 온통 검은색 아식스 젤 카야노-25 모델인 240밀리미터 크기 러닝화다. 선물을 받은 여자는 무척 좋은 가보다. 조금은 비싼 신발을 공짜로 얻어서 그런가. 저번에 여자는 운동복 위에 가볍게 입는 싱글렛을 사주었다. 나는 춘천마라톤 출사표 이벤트에 글을 올려 당선되었다. 부상으로 받은 신발을 그에게 보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일, 눈에 안보이는 좋은 것들을 가르쳐준 일, 무엇보다 집중하는 방법을 알려준 일들이 고마웠다. 오래도록 먼거리를 잘 달릴 수 있기를 바랬다.

 

"편하고 좋아! 사다 놓은 주황색 끈으로도 매 봤어. 덕분에 좋은 새 신발 신어보네. 고마워^^" 여자가 말했다.

 

"사진 많이 보내달라고 했지? 그리고 발목까지 나오는 사진도 보내달라고 했지? 왜 발목까지 나와야 하는데?" 여자가 말했다.

 

무엇이든 궁금한 사람이다. 신발 크기와 받을 주소를 보내고 신발을 받을 때까지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출사표 당선 사실을 알리면서 말했다. 신발이 도착하면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여자의 가는 발목을 보고싶었다. 겉으로 봐서는 잘 모른다. 여자의 가는 팔목하고 똑같이 발목도 엄지와 집게 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무린 안쪽에 쏙 잡혔다. 이건 눈으로는 잘 안보인다. 손목이 가는 지 눈으로는 모른다. 발목이 가는 지 운동화 위로 드러난 발목을 보는 것만으로는 잘 모른다. 허리가 가는 지, 가슴이 큰 지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판단하기가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살면서 너 때문에 제일 많이 웃은거 같아." 남자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여자가 말했다.

 

"잘 달려봐. 아주 머얼리. 하늘 끝까지. 장애물이 없다고 생각하고 달려."

 

"그러다 사라지면 어떡해?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면 어쩌지?" 여자가 말했다.

 

"그럴일은 없어. 아무리 빨리, 멀리 달려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할테니." 남자가 말했다.

 

"사무실이니? 별일 없지?" 여자는 매번 묻는다. 남자가 어디에 있는 게 중요한지 모르겠다. 잘 지내냐고? 잘 못 지낸다고 말해볼까? 하고 생각한다. 아무일 없지만 아무일이라도 생기면 좋겠다. 기다리기 지루하다. 늦은 시간이다. 여자도 수업을 마치고 이제 막 집으로 와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신발을 신어보는 중일터 나도 저녁을 먹으러 가야한다.

 

"새 신발이라 좋은데 이거 신고 대회는 못나가는 거 알지? 몇 번 뛰고 나서 장거리를 뛰어야 하거든. 아직까지 밥도 안먹고 사무실에서 머하시나?" 여자가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오늘 포천으로 회의한 내용들 정리중이야. 4시간 운전하고 다녀오니 힘드네. 일도 잘 안되고. 몸 상태도 좀 메롱이야. 서브4 달성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남자가 말했다.

 

"다음에 나가면 신발 보여줄께."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벌써 난독증이라도 걸린 건지. 늘 대화를 띄엄띄엄 한다. 버릇인가? 하고 남자는 생각한다.

 

짧은 이야기를 했다. 고마웠다.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지, 꼭 갚아야 하는 건지는 미래가 알려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이젠 좀 잊고서, 떠나서 막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지루하고 변함없는 일상을 견뎌왔다는 사실이 후회된다. 늦었지만 어쩔 수 없다.  

 

 

사진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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