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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달리지 못한 것에 대한 달콤한 복수

지구빵집 2019. 5. 1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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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오늘을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날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담배를 끊기로 하고 정확히 14일이 지난 2월 말부터 부상으로 달리지 못했다. 어떻게 입은 부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게 중요할 이유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을 설득할 때에는 중요한 이야기가 된다. 그는 정확히 두 달 하고 15일 동안 달리지 못했다. 오늘은 정말 그동안 달리지 못한 것에 대해 복수라도 하는 심정으로 잘 달린다.

  선배들은 남자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남자의 침울한 표정이나 다리를 열심히 주무르는 행동을 보고 알았다는 게 아니라, 부상을 겪고 나서 뛰지 못하는 시간이 오래 지나고, 회복하는 과정을 그대로 겪었기 때문에 안다는 말이다. 정말 선배들이 겪는 일은 나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오랫동안 달리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침울한 상태로 지내고,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천천히 부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남자도 거쳤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날, 수요 훈련에 나와서 줄을 맞춰 달리는 동료들이 멀찌감치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스로 위로하며 천천히 걷는다. 토요일 많은 회원이 나와 그룹 지어 운동하고 달리기 시작할 때에도 남자는 뒤에서 천천히 2킬로미터를 달리거나 걷다가 마음을 접는다.

  이런 게 삶인지 모르겠지만 허벅지에 입은 부상 덕분에 해마다 그냥 지나치는 봄 꽃구경을 지겹게 하고 다녔다. 운동을 쉬니 자연스럽게 여자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저녁때 대공원이나 경마공원으로 봄꽃을 보러 갔다. 바쁜 일정에 잠깐 금요일 오후에 시간을 낸 여자와 노총각을 데리고 양재천을 걸었다. 토요일 정모를 마치고 동료와 낮술에 취하며 꽃 축제 구경을 하루 종일 다녔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가 필요한 일이라서 일어난다. 우리는 아주 넓고 큰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좁고 갑갑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안 되는 일뿐만 아니라 잘 되는 일에도 핑곗거릴 찾고, 자신의 실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수를 잘 찾아내고,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리려 하고, 희 것과 검은 것으로 구분 짓고 선 그리고 경계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다. 삶이 그렇게 좁고 갑갑하고 자유가 없다면 왜 신이 생명을 만들었을까?     

  과천 이마트 8층에 있는 퍼스트정형외과를 꾸준히 다니고, 참고 지낸 남자는 어느새 다 낳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역시 그는 버릇처럼 단계적이고 절차를 지키고 기계처럼 해 나간다. 4월 말부터 조심스러운 회복훈련을 시작했다. 2킬로미터를 천천히 뛰고 올 때는 걸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운동했다. 다음은 5킬로미터를 아주 천천히 달렸다. 또 일주일 동안 3번을 달렸다. 그다음은 8킬로미터로, 그다음은 10킬로미터로 같은 훈련을 빼먹지 않고 했다.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빠르게 뛰지도 않았다. 선배가 조언하면 조언한 대로, 지키라는 모든 것을 지키고, 하라면 하라는 그대로를 민첩하게 해 나갔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 데 유독 달리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지켜나갔다. 남자는 러닝에 대해 배우고, 마라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하나하나 얻어 가면서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사람 같았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남자는 말했다. 드디어 평생 처음으로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남자는 오늘을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날로 선언하듯 달린다. 꽤 오랜시간을 회복하고, 훨씬 더 많이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상태가 좋아 보인다. 관문체육공원까지 다녀오는 13킬로미터를 단숨에 달린다. 내일 과천 마라톤 하프 코스를 뛰어야 하지만 남자에게는 상관없다. 당장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에게 내일 일이 무슨 영향을 줄까. 천천히 내일 대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과 달린다. 이야기는 조금 하고 남자는 달리는 走路와 왼쪽 다리에만 집중한다.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배가 아닐까? 담배를 끊기도 하고, 훈련을 쉬는 그 기간에 얼마나 먹어대서 살이 쪘는지 보는 사람마다 약간, 아주 약간 나온 배를 보고 한마디씩 한다. 친절한 관심을 보여주니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참담함을 느끼게 해 준, 형편없이 망가지고 무너진 러너의 자세와 뱃살과 호흡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다시 심장을 입에 물고 달려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반드시 해야만 하고 일어나야 하는 일로 가득 차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見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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