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구빵집 2021. 1. 2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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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숨을 쉬듯 누군가를 손가락질 하지만 당신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자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p.16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바라건대,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낯선 나와 마주치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믿는 순간 편견의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지고, 믿는 순간 맞은편 차량과 추돌한다. 한 고비 돌 때마다 가능한 길게 클랙슨을 울려야 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흑화한 다음에 하는 말들도 다들 비슷하다네. 후배들에게 마치 후일담처럼 말하지. “그때 많이 배웠다”고. ‘그때’는 자신이 승진 명단에서 누락됐거나, ‘조직의 쓴맛’을 봤을 때를 말하네. 그럼, ‘많이 배웠다’는 건 무슨 뜻일까? 자신이 흑화한 것이 아니라 성장한 것이라고 말하는 거라네. 진정한 ‘프로 직업인’으로 거듭났다는 거지. “ 「사람은 어떻게 흑화하는가」중에서

 

“한없이 약한 인간도 악마가 갖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가족, 친구,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아무도 미끼를 물지 않았다」중에서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쉽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의심하라,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중에서

 

“한번 노예의 마음이 되면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는 것만이 분노조절장애가 아닙니다. 분노가 너무 잘 조절되는 것도 분노조절장애입니다. 보일러가 섭씨 20도에서 30, 40도로 치솟는 것도 문제지만, 20도에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내는 게 인간입니다.”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중에서

 

“개기는 것은 불필요한 행위로 보인다. 개겨봤자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개겨서 과연 달라지는 게 없는가. 달라지는 게 분명히 있다. 개기는 사람 자신이다. 개기면서 결심이 단단해지고 확고해진다. 다시 싸워야 할 때 웬만한 충격엔 흔들리지 않는다. 실패의 의미도 달라진다. 실패했을지언정 원칙을 지키고 주장함으로써 가치 있는 실패가 된다.” 「지더라도 개기면 달라지는 것들」중에서

 

“너무 바빠서 ‘생각을 못 하는’ 측면도 있지만, 생각을 하면 괴로워지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하게’ 된다. 생각을 하면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부 평가나 승진과 관련 없는 ‘쓸 데 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일을 잘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좀비공정」중에서

 

“자기 기준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간혹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일순 기준이 무너진다 해도 괴로워하며 다시 그 기준을 일으켜 세운다. 자기 기준이 없는 사람은 늘 정리되지 않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상황에 맞춰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자기가 한 행동에 기준을 맞춰갈 수밖에 없다.” 「하찮아지느니 불편해지려고 한다」중에서 

 

반복이지만 그래도 좋은 말을 옮긴다. 출처는 알라딘, 여기는 독자가 좋은 글을 뽑아서 올리는 기능이 있어서 많은 글을 뽑아 올 수 있어서 좋다. 

 

-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p.14)

- 우리 인간은 ‘같음’보다 ‘다름’에 주목해 나누고, 차별하려 든다. (p.15)

- ‘나는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p.16)

- 낯선 나와 마주치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p.17)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진짜 선수들은 안다. 모든 혁명가는 원칙의 방패와 현실의 칼로 무장한 철학자다. (p.219)

 

흑화는 절대 나쁜 게 아니네.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니까. 남들보고 왜 날 안 봐주느냐고, 언제까지 졸라댈 건가.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지 않겠나. 그게 더 성숙한 자세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쁘게 살면 안 된다˝ 맨날 그 타령이지. 토머스 웨인 같은 작자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거지. 생각해보라고, 자네가 왜 무시당하고 사는지. 그건 만만하기 때문이네. 자네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말대꾸도 제대로 않겠나? 정말 별거 아니라고 여기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만약에 자네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는 못할걸? 네버(Never). 절대로.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프로이트는 유머가 사람이 좌절했을 때 생겨나는 몇 가지 반응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미끼를 물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됐다는 건 이 사회의 오래된 우화다. 성폭행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는 현실이 우화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밤늦게 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지 마라.˝ ˝인적이 드문 곳에 가지 마라.˝

이런 말들은 모두 미끼를 문 자의 책임이라는 전제 위에 있다. ‘미끼를 물어버린 자의 책임’ 논리는 이 땅의 모든 사건,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된다.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이 물음들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다. 무고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모함이다. 인간을 성욕의 제물로 삼은 자의 잘못이고, 독성물질이 들어간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자의 잘못이고, 바다에 떠서는 안 될 배를 띄운 자, 구조하지 않은 자의 잘못이고,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른 자의 잘못이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

모두가 피해자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사이 가해자는 유유히 암흑 속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다시 범행할 대상을 찾아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러다 그의 눈앞을 스치는 누군가가 피해자가 된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이유는 피해자 환원론에 있다.

 

˝크면서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한 걸까, 죄책감을 갖기도 했고…. 그런데 대학에 갔을 때 ‘당신은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 성폭행 생존자‘라는 상담사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생존자, 범죄의 고통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낸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견뎌낸 한순간 한순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괜찮다. 다 괜찮다. 인간은 악(惡)에 패배할 수 있지만 영혼까지 내주진 않는다. 악이 인간을 현혹해 죽일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 악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이 가질 수 있는 건 인간의 거죽뿐이다. 악마가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건 오직 죽은 자의 데스마스크뿐이다. 한없이 약한 인간도 악마가 갖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가족, 친구,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P. 51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가 진짜 필요한 건 가까운 사이에서다. 걱정하지 말라고? 자녀나 후배 직원과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사람이라고? 잠시 시간이 있다면 주차장에 가보라. 그리고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새겨진 문구를 읽어보라. 사물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

 

P. 127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악(惡)들이 거악(巨惡)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닌가. 거악은 한두 사람의 악인이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의 작은 악들이 모인 결과가 아닌가.

 

그러므로, 진실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낫고, 누가 낫지 않고를 따지지 않는 일이다. (p.236)

 

우리가 손가락질하는 악인은 과연 진짜 악인인가. 그에게 침을 뱉고 지나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가. 소설은 그렇지 않다. 고 말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것이다.

 

악(惡)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두말할 것 없이 요시노를 죽인 살인자는 유이치다. 마스오에겐 법적인 책임이 없다. 그것으로 계산을 끝내기엔 한쪽은 뭔가 모자라고, 한쪽은 뭔가 남는다. 유이치의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은 처음에 증오를 촉발시켰던 마스오가 가해자의 범주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과연 정의롭냐는 거다. 꼭대기의 돌은 무사한 대신 밑변의 돌만 사라지는 게 옳으냐는 거다.

악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다. 위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로 내려가듯이 악은 계속해서 피라미드 계단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는 상사에게 되돌아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아래에 있는 부하에게 내려간다. 스트레스 질량 보존의 법칙일까. 갈 곳을 찾지 못한 스트레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대상은 눈앞의 불특정 다수다.

˝네가 뭔데 왜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어깨를 치고도 왜 사과를 하지 않는 거야?˝

멱살잡이를 하고, 주먹다짐을 한다. 거리에서 분노를 풀 용기조차 없는 자들은? 아내와 자녀에게 푼다.

˝뭐가 그리 재밌나?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렇게 다른 사람이나 비웃으며 살면 되겠어? 아버지는 마스오를 향해 움켜쥐었던 스패너를 바닥에 던지고 돌아선다. 소설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증오 따위는 날려버리고도 남을 만큼 서글펐다.

그가 철없는 악인, 마스오를 보고 느낀 것은 서글픔이다. 서글픔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됐을 때 가지는 감정이다. 한국 사회에도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서글픔을 안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서글픔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바꿀 순 없을까. 악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 보내는 시스템을 어떻게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까.

 

소설이 막바지로 치닫는 상황에서 두 개의 장면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는다. 장면 하나. 유이치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쫓기는 사이 가족들은 취재진에 포위된다. 기자들에 쫓겨 버스에 오른 유이치 할머니에게 버스 기사가 말한다.

˝아줌마가 잘못한 거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

˝당신이 그렇게 키웠으니까 그렇게 됐지.˝ ˝그러니까 죽은 거지.˝ 가해자 가족도, 피해자 가족도 선입견의 먹잇감이 된다. 스스로도 가슴 깊이 죄책감의 주홍글씨를 새기게 된다. 그러나 버스 기사의 말대로 할머니는 잘못한 게 없다. 손주를 자식처럼 키웠을 뿐이다.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선의는 일어설 힘을 준다.

우리는 ‘너를 위한다 ‘는 속삭임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비교 우위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닐까. 후배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장이나 이사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문제는 많은 이들이 진짜 너를 위해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 는 것이다. ‘너를 위해 ‘로 시작했다가 어느덧 나를 위해‘로 바뀌었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P. 16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나쁘다. 알고 짓는 죄는 반성할 수나 있다. 모르고 짓는 죄는 반성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우리는 숨을 쉬듯 누군가를 손가락질하지만 당신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자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말한다. 독일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히만이 아니라고 해도 이 물음을 비켜갈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악(惡)들이 거악(巨惡)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닌가. 거악은 한두 사람의 악인이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의 작은 악들이 모인 결과가 아닌가.

〈주기도문(主祈禱文)>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바라고 희망한다. 그 악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오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위험을 인식하고 늘 깨어있지 않다면, 내부의 악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와 손을 잡고 있을 것이다. ˝난 내가 할 일을 했다˝고 말하며,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하며.

 

당신이 거리에서 누군가와 - 이를테면, 생존권의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움켜쥔 이들과 마주쳤을 때 서늘한 두려움이 앞선다면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 마음속에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이고, 다른 친구‘가 곁에 없다는 의미다.

 

<주토피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토끼 주디도, 여우 닉도 아니다. 나무늘보 ‘플래시‘다. 주디는 용의 차량에 대해 차적 조회를 하려고 DMV(차량 관리국)에 갔다가 플래시를 만나고 학을 뗀다. 말할 때도, 키보드를 두드릴 때도, 농담에 웃을 때도 시속 1미터의 슬로비디오로 움직인다. 마지막 장면 에그가 다시 등장한다. 주디가 시속 185킬로미터로 달리는 스포츠카를 쫓아가 차를 세운다. 과속 딱지를 떼려는 순간 차창이 내려가며 플래시의 겸연쩍은 얼굴이 나타난다.

‘나무늘보는 느리다 ‘는 편견에 대한 통쾌한 반박이다. 나무늘보의 몸이 느린 건 사실이지만 모든 일에 느린 건 아니다.

 

성격은 오히려 급할 수도 있다. 편견은 결정적으로 틀릴 때가 많다. 당신이 당신의 편견에 기대어 살다 간 큰코다치는 날이 반드시 온다.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프로이트는 유머가 사람이 좌절했을 때 생겨나는 몇 가지 반응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 커트 보니것, <나라 없는 사람>에서 재인용

 

잊지 마세요. 당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고통받은 만큼만 진실입니다.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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