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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먼저 늙어 곱디고운 아기가 되었다

지구빵집 2021. 12. 1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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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먼저 늙어 곱디고운 아기가 되었다.

 

"엄마가 어느새 아기가 되었네요. 엄마가 저 아기 때 키웠잖아요. 제가 엄마를 돌볼게요."

 

남자는 누워 있는 엄마를 안아서 일으켜 세우고 물을 떠다가 약을 드시게 하고, 다시 꼭 안아서 엄마를 뉘인다. 저번 주에 눈 수술을 하고 꼬박꼬박 안약을, 보니까 15% 식염수던데, 눈에 넣어준다. 엄마가 혼자 일어서지 못하거나 눕지 못하는 건 아직 아니다. 기억은 점점 흐려지는 상태인데 정신도 말짱하게 대화도 잘하고, 잘 걷고 잘 웃고 음식도 잘 드신다. 남자는 자신을 아기 때부터 키운 엄마를 똑같이 아기처럼 다루고 싶었다. 2학기 내내 부모님이 계신 집에 자주 들른다.

 

때로는 반짝반짝 빛나며 아름답고 성실하고 단정한 평화로운 날들이, 대부분은 어쩌면 암울하고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하고 아픈 날들을 번갈아 살아간다. 작은 누나가 일이 있어 인천 집으로 가는 날이라 남자는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가 주말 이틀 동안 부모님을 돌보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에 과천을 출발해 부모님 집에 도작하니 11시다. 어머님은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셨고, 아버지는 주간 요양보호센터 나가셔서 보이지 않았다. 부엌이며 베란다와 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을 죽 둘러보았다. 요양 보호사가 친절하신 분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집이 많이 깨끗해진 느낌이다. 작은 누나가 머무르기에 이 정도지 돌보는 사람이 없다면 엉망이었을 텐데. 이런 단정한 모습도 작은 누나가 자기에게도 생활이 있다며 인천으로 다시 돌아가는 12월 이후로는 어찌 될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잠깐 있으니 아까 엄마에게 전화한 막내 외삼촌하고 연정리 양계장 이모가 도지로 받은 쌀 20kg을 가지고 오셨다. 막내 외삼촌은 가덕에서 외할아버지 집안이 남겨준 다섯 마지기 땅에서 난 쌀을 누나와 형님들 집으로 배달하는 중이다. 엄마는 막내 외삼촌의 누나이면서 연정 이모의 누나다. 두 분 사이에는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브라질로 이민 가신 선화 이모가 있다.   

 

내려오기 전에 남동생으로부터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빼곡히 적은 메시지를 받는다. 약 챙기고 안약 넣고 하는 일이 전부다. 어릴 때는 원래 놀아주기, 산책하기, 구경 가기 이런 게 전부인데 나이 든 부모님에겐 그런 것도 없다.  

 

(오늘 와서)

1. 아버지 안약 2가지를 5분마다 한 가지씩 넣어주기. (아버지 잠바 주머니에 보관)
2. 어머니 방에 저녁 식후 약 오늘 날짜 먹기
3. 어머니 인공눈물 양쪽에 넣어주기 (거실 밥상 위에 어머니 것 케이스)
4. 주무시기 전 요실금 약 한 알 (엄마방 저녁 식후 약 통 안에 뚜껑 있는 약통)
(내일)
5. 내일 일어나자마자 식탁에 엄마 약  한 봉지 식전에 드시게.
6. 아침  식후에 엄마방 아침식사 후 약봉지 하나
7. 엄마 인공눈물
8. 아빠 안약

 

아버지와 엄마는 그런대로 있고, 누구라도 남자 나이의 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모두 비슷하다. 만약 살아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는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늙어간다는 것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글을 보았다. 부모님은 너무나 빨리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나 빨리 사라지기에 남자는 겁이 났다. 사라지게 두었다가는 후회할 것 같아서 남자는 서둘렀다. 사람들은 '다음에'라는 말을 잘한다. 아마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만 늘어낸 말이라서 그렇다. 다음에 밥 먹고, 다음에 커피 마시고, 다음에 또 얼굴 보자고 말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으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약속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20%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80%의 거짓말과 그럴싸한 약속을 한다.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은 20%도 채 안 된다. 사실 20%에만 정성을 다 해도 기본은 하고 살아가는 삶이다.

 

토요일 점심과 저녁, 일요일 아침과 점심을 챙겨드리고 남자는 집으로 가야 하나, 사무실로 가야 하나 생각을 한다. 주말에 할 일이 있는 남자는 사무실로 가기로 한다. 엄마는 이제 남자를 바래다주지도 못할 정도로 힘도 없고, 귀찮은 지 내려오지도 않고 방에서 잘 가라고 인사를 한다. 남자는 서운해한다. 서운한 마음은 남자의 마음이라서 밖에 나가 차를 운전하고 가는 남자를 배웅해 주는 것보다 지금 방에서 더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진하게 나눈다. 

 

 

오! 내가 살았던 최초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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