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서재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한성희 저

지구빵집 2022. 2. 16. 08:50
반응형

 

 

 

40년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온 정신분석 전문의가 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37가지 심리학의 지혜를 담은 책. 저자는 딸이 공부를 위해 떠난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문득 깨달았다. 오랫동안 진료실을 찾은 수많은 사람에게는 해 주었지만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는 해 주지 못한 말들이 많다는 것을. 그는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하며 깨달은 통찰과 40년간 일하는 여자로 살면서 얻은 교훈, 그리고 엄마로서 딸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고르고 골라 이 책에 담았다.

 

그래서 이 책의 조언들은 경험하지 않은 채 지식만으로 풀어쓴 어설픈 충고나 분석과 해법이 빠진 설익은 위로에 머물지 않는다. 여자로 사는 동안 부딪치게 되는 일, 사랑, 인간관계 문제에 대해 진정성과 현실성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못된 딸이 돼라’, ‘아무도 너에게 슈퍼우먼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을 때 벌어지는 일들’, ‘남자를 만날 때 꼭 기억해야 할 니체의 질문’, ‘지금 불안하다면 인생을 잘 살고 있다는 증거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면 인생의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어설픈 이기주의자가 아닌 단단한 개인주의자로 살아갈 것’ 등 세상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견지해야 하는 삶의 태도들이 가득하다. 

 

책의 내용 일부를 아래에 발췌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이란 없다.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내가 참 싫어하는 말이 있다. 삽질하다. 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헛된 일을 하다.'라고 적혀있다. 가장 빠른 길을 놔두고 한참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하거나, 결과와 전혀 상관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한마디로 결과를 내는데 도움이 안 되는 쓸데없는 일이 바로 삽질이다. 그런데 과연 세상에 헛된 일이라는 게 있을까? 바람 한 점에 날아가 버리는 모래성을 쌓았다고 해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래성을 쌓아 본 사람만이 모래성을 잘 쌓는 데 필요한 모래와 수분의 양을 가늠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줄이는 법 또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험이 가져다주는 진짜 지식인 것이다.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한성희 저

 

 

인생에서 삽질이 꼭 필요한 이유

 

최상의 선택을 하기엔 경험과 자원이 너무나 부족한 청춘들에게 이런 삽질마저 없다면 어떻게 인생의 퇴적층을 쌓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우리는 가야 할 길을 걸어가기도 바빠요. 괜히 삽질했다가 손해 보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하며 삽질을 손실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 이를 손실 회피라고 한다. 똑같은 결과 라도 획득한 가치보다 손실된 가치를 훨씬 더 크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당장의 눈앞의 결과와 상관없다고 해서 삽질을 손실로만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의 성장에도 저해가 된다. 어디선가 이런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난다. "전문가란 자기 주제에 관해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잘못을 이미 저지른 사람이다." 나도 그에 동감한다. 지금은 삽질이 손실로 만 볼 수도 있지만, 삽질의 콘텐츠가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순간 그것이 성공을 이끄는 동력이 될 수도 있고, 미처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한 평의 땅도 같이 못한 청춘일수록 삽질은 꼭 해야 할 신성한 노동이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모르겠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뭔지도 모르겠다면 일단 뭐든 해봐야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이건 내가 남들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이건 내가 잘 못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등등의 결론 말이다. 그처럼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선택을 하는 데도 유리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삽질만 안 했어도 더 빨리 취업에 성공했을 텐데... 하며 삽질 경험을 저평가하거나 부인하는 데에는 목표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고속도로가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어서다. 물론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 데에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놓고 보자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효율적인 정답이란 없다. 다만 각자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삶의 노하우가 생길 뿐이다.

 

스물다섯에 알게 된 인생의 비밀 한 가지

 

딸아, 나는 어렸을 적에 인형 옷 만드는걸 참 좋아했단다. 뜨개질을 좋아해서 목도리도 뜨고 조끼도 뜨다가 나중에는 옷 본을 가지고 원피스를 직접 만들기도 했지.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뜨개질이나 바느질은 한번 잡으면 그만 두기가 어렵다. 끝까지 완성해 내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수업을 들으면서 바빠진 뒤로는 더 이상 옷 만드는 놀이를 할 수 없었다.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바느질하며 몇 시간을 내리 보내는 건 정말 쓸모없는 일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그때 쌓은 바느질 실력이 다 큰 다음 엉뚱한 곳에서 쓰이더구나.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처음 환자의 상처를 봉합하는 시술을 하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은 칭찬을 듣게 되었던 거다. 진짜 처음 해 보는 게 맞느냐면서, 천을 자르고 이으며 바느질하고 놀았던 경험이 커서 그렇게 쓰일 줄 누가 알았겠니?

 

나는 그때 인생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쓸모없는 일이란 하나도 없음을. 그러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삽질이 훗날 또 어떻게 쓰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야. 펑키 스타일의 아이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서른 살이 되던 무렵 선망의 직업인 교사를 그만두고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미술이나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었던 그녀의 선택을 두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며 말렸다는구나. 그러나 지금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아 패션계 정점에 서 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결과적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디자이너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선택이 옳았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그녀가 디자이너로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그래서 다시 교사로 돌아갔더라도 디자이너로 활동한 경험은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남았을 거야. 꼭 해보고 싶던 일을 했고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즐거웠으니 말이다. 최소한 인생에서 재밌게 누릴 수 있는 일을 하나 찾은 거니까. 그녀가 만약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괜히 시간만 낭비하게 되면 어쩌나, 교사직을 포기하고 선택한 길인데 후회하면 어쩌나 하면서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결과다.

 

세상에 쓸모없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마흔이 넘어서 데뷔한 이래 1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고 박완서 선생이 말했다. "인생은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에 있는 게 아닙니다." 박완서 선생은 인생을 등산의 비유했다. 힘겨운 오르막길은 길고 산의 정상에서 맛보는 환희의 순간은 지극히 짧은 데, 그게 만약 인생이라면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실제로도 선생은 글이 써지지 않을 때에도 군사분계선을 지키는 보초병보다 더 끈질기게 원고를 붙잡고 있었다. 과정을 즐기지 못했다면 절대로 견뎌낼 수 없는 순간에 연속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흔히 삽질이라고 하면 이곳저곳 파다 그만두는 걸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 과정 자체에 지향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매우 인색하다. 직업이든 취미든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노력한 만큼 반드시 결과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한번 해보는 일에 쉽게 도전하지 못한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청춘에게 끼라는 말이 통했고, 모험이야말로 젊은이들의 특권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고들 하는구나. 플랜 a 가 실패하면 플랜 b를 시도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말이다. 그럴수록 시행착오가 적은 길, 남들이 이미 검증해 놓은 길을 택하는 게 안전하다고 여기게 된다.

 

해보고 싶은 일을 한번 해보는 경험이 당장의 과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를 시도해 본 경험, 그 씨앗이 뒤늦게 마흔 살이 넘고 50이 지나서야 꽃을 피울 수도 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요즘 마흔 중반에 이르러 은퇴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분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만약 그들이 젊은 시절에 어떤 씨앗을 어디에 심을 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보고 엉뚱한 곳에 삽질이라도 해봤다면 어땠을까? 씨앗 하나 심을 만한 작은 웅덩이 라도 봐 놓았다면 어땠을까? 설사 퇴직을 앞두고 있어도 인생 2막에 심어야 할 씨앗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적어도 이제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요.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지 않았을까?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사이토 시케타가 말했다.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일수록 쉽게 일어선다. 반대로 넘어지지 않는 방법만을 배우면 결국에 일어서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삽질에 부재가 주는 가장 큰 폐해가 뭘까? 삽질로 각종 유기물이 자라는 환경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삽 뜨는 법조차 모른다. 삽질의 부재는 경험의 부재이며, 경험에 부재는 그 사람 능력의 크기를 제한해서 설사 포클레인이 바로 옆에 있어도 절대로 웅덩이를 팔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 마흔이 되고 쉬흔이 넘으면 지킬 것이 많아져 쉽게 삽을 들 수 없게 된다.

 

프랑스의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는 "나는 현명한 외면보다는 열정적인 실책을 더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많은 것을 시도하면 실수도 많겠지만 그만큼 인생의 후회도 적다. 더군다나 세상의 모든 조건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완벽한 선택은 없다. 그러니 손실이 적은 선택지를 기다리느라 주저하거나, 기회비용이라는 말에 움츠러들지 말자. 지금 마음껏 삽질해 보고 퍼낸 흙으로 삶의 토양을 기름지게 가꾸어 나가렴. 그렇게 해서 쌓인 경험이야말로 너만의 독특함이자, 내 인생의 진정한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40년 동안 일하며 배운 것들

 

내가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 지 3년쯤 지났을 때가 떠오른다. 고백하건대, 나는 내가 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직장생활을 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성공하겠다고 이를 악물어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나는 늘 욕심 같은 건 없다고,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즐기며 살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정말 사람 일은 모르나 보다. 기대했던 승진에서 밀려서 무척 실망했다고 했을 때 고비가 오나 싶었는데, 오히려 나는 그걸 계기로 확실히 자기 계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원래 3년 차가 고민이 많을 때란다. 3년 차가 되면 일이 손에 익어 반복되는 업무가 많아지고 후배와 선배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치이면서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는 정체성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데, 그것을 직장인 사춘기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하거나 이직을 위해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아예 퇴사를 하고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도 생긴다.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나도 어느덧 일을 한 지 40년이 되었더구나. 그동안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있었고, 하고 싶지 않지만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라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고, 가끔은 너무 힘들어 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너는 그런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만 현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선배 의사들도 여럿 계신 걸 보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너에게 해주고픈 이야기는 몇 가지 있구나.

 

1. 일단 견뎌라.

 

예전에 명문대에 다니는 한 남학생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병역특례로 어느 산업체에서 근무했는데, 이 사람들이 말끝마다 욕을 한다고 그러더구나. 살면서 욕먹을 만한 일을 한 적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잘한다는 칭찬만 듣던 그는 그곳에서의 생활이 지옥 같았다. 욕설을 참아가며 일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지. 그는 병역 특례로 간 회사만 아니었으면 바로 그만두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3년간 근무를 마치고 학교를 졸업해서 막상 다른 회사에 취직하고 보니 세상에 별의별 상사가 다 있었다. 그런데 남들은 다 힘들다고 하는 반면 그는 별로 힘든 줄 몰랐다. 말끝마다 욕설을 한 예전 상사들 덕분에 이런 상사는 이렇게 대하고 저런 상사는 저렇게 대하는 요령을 나름대로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견뎠던 3년의 세월이 그렇게 약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나와 안 맞는 상사나 동료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지금 있는 직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안 맞는 상사나 동료 때문에 고민이라면 나는 일단 견디라고 말하고 싶다. 죽어라 견디다 보면 알게 된다. 정말 그 사람만 안 맞는 건지, 아니면 나의 태도를 고쳐야 하는 건지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직장을 옮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 드러난다. 물론 견디라는 말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그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슬럼프에 빠져 있거나 일과 자신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천직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만약 누군가가 천직을 찾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남보다 눈이 밝거나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여태껏 지루한 시간을 잘 견뎌냈기 때문에 가능성이 더 크다. 누구나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또 내가 하는 일은 지겨움의 반복이지만 남이 하는 일은 다 재미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그 안에서 재미를 느끼려면 어느 수준 이상의 궤도에 올라서야 한다. 마치 악기를 배울 때 기초 단계가 힘들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자유자재로 악기를 다룰 수 있어서 연주를 즐기게 되듯이 말이다.

 

이처럼 기본기를 닦는 과정을 레디니스 READINESS라고 한다. 레디니스란 학습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기에 필요할 신체적, 정신적 준비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과정을 생략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재료 손질이 되어야 요리를 할 수 있고, 연수를 받아야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일을 계획할 때도 이 과정을 중요한 위치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지루한 시간을 잘 견뎌내고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하는 일들이 모두 성취감과 희열을 줄만한 것은 아니다. 비효율적인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쓸데없는 서류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고, 끝없이 반복되는 관리업무도 많다. 그런 입장에 놓이면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탕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그저 실 가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자진해서 원하는 일을 늘려야 한다. 살다 보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럴 때는 툴툴거리며 마지못해 하는 것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해치우는 편이 훨씬 빨리 끝나고 기분도 좋다.

 

2.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마라

 

언젠가 통화할 때 내가 그랬지.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너무 힘들 거 같다고. 내가 왜냐고 물어보니까 내가 일하는 것은 업무시간의 구분이 분명하고 미리 정하지 않은 저녁 술자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한국에서 일하는 내 친구는 그렇지 않다며 힘들다고 했다지. 일이 많아 야근은 기본이고 윗사람들의 권위주의도 심하고 예기치 않게 술자리에 끌려갈 때도 많다면서. 네 말처럼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위아래로 치이는 한국의 대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 환자가 그런 경우였는데 그냥은 스트레스가 심한 나머지 서른두 살에 원형탈모증을 앓고 있었다. 머리 중간에 하얗게 비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가 더 속상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녀한테 준 조언은 다 한 가지였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싶다면 상수와 변수부터 구분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꿀 수 없는 외부 요인은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수 부분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냥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리고 난 뒤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변수에 집중해야 한다. 이때 변수를 쪼개고 쪼개서 할 수 있는 만큼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스트레스에 짓눌려 압도당하는 사태는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날은 스트레스가 설상가상이라는 말처럼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한다. 오전에 일이 터졌는데 오후에 더 큰일이 터지는 식이다. 이런 날은 아무리 평정심을 되찾으려 해도 쉽지가 않다. 스트레스를 쪼갤생각은커녕 스트레스에 압도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중환자실을 떠올린다. 그것의 있는 환자들이 365일 고통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픈 와중에도 강약이 있고 위험한 순간을 맞이 하다가도 그게 지나가고 나면 한동안은 괜찮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지금 죽을 만큼 아파도 언젠가 고통은 끝난다. 그때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 말이 참 싫었지만 요즘은 힘들 때면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쁜 일이 연속적으로 터질 때는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내 힘으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은 그처럼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괜히 바꾸려 하면 스트레스만 더 심해질 뿐이다. 그러니 어찌할 수 없는 상수는 바꾸려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렴.

 

3. 몰입의 즐거움을 익히면 그것이 너를 춤추게 할 것이다

 

일이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하는 후배에게 선배들이 간혹 말한다. 세상에 재밌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든 직장인이라면 평균적으로 하루 3분의 1 이상을 일을 하며 보낸다. 그런데 그 일이 마지못해 하는 것,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괴로울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이들은 일만큼 괴로운 게 없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견디지 못하는 것은 무료함과 무의미함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한 인간을 완전히 뭉개 버리고 파괴하고 싶다면 무시무시한 살인자라도 벌벌 떨 만한 가장 끔찍한 형벌을 내려라. 전혀 무익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적어도 삶의 목표가 9시에 출근해서 별일 없이 6시에 무조건 퇴근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든 그것을 좀 더 생동감 있게 하려는 것, 그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동감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삶의 의미이자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푹 빠졌던 경험을 떠올려 보렴. 그때는 주변에 소음도 들리지 않고 1시간이 꼭 10분처럼 흘러간다. 번지 점프대 위에 서서 뛰어내리기 직전 오로지 뛰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하듯 모든 감정과 목표와 사고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 이를 몰입의 상태라고 한다. 비록 몰입 상태에서는 행복조차 느낄 겨를이 없지만 지나고 나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취감과 보람이 찾아온다.

 

단조로운 일상에 강렬한 체험을 선물하며 몸은 피곤할지언정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몰입은 과제와 실력 사이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찾아온다. 실력에 비해 과제가 아주 쉽거나 너무 어려우면 몰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텔레비전을 볼 때 별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은 과제가 너무 쉬워서다. 반대로 초등학생에게 대학 교재에 나은 수학 문제를 풀라고 하면 당연히 포기하고 만다. 가장 심도 있는 몰입은 도전을 자극하는 과제에 강력한 동기가 결합됐을 때 이루어진다. 한동안 크게 유행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몰입의 가치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촌스럽고 발성도 안 좋고 춤도 못 추던 참가자가 몇 개월 사이에 상상도 못 할 만큼 성장한다. 좀 더 높은음을 내기 위해 발성 연습을 하고 자신 있는 춤을 선보이기에 발이 붓도록 연습하는 등 매주 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 덕분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러한 몰입의 경험을 통해 참가자들의 삶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몰입은 우리를 배움으로 이끌고 성장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기억에 남는 제자 중 하나인 형도 씨도 그랬다. 동료 전공의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서 환자를 살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공부 모임을 만들어 전공서 초독해를 이끌었다. 이렇게 즐겁게 일에 몰두했던 그는 지금 대성공을 거둔 의사가 되었다. 자기 병원을 차린 외에도 환자 입장에서 필요한 게 뭘까를 탐색하고 연구하며 그로부터 새로운 치료 방식을 만들어 실천에 옮기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 스스로 도전하고 싶은 목표를 세우고 실천했기에 그는 즐겁게 일에 몰입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밋밋해 보이지만 반복되는 과정에서 오는 놀이적 즐거움이 쌓여 천직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놀이에 대한 본능이 있다. 놀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준다. 아이들의 놀이 세계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빠지지 않는다. 또한 그 안에는 호기심과 자발성이 있으며 창의적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놀이를 반복한다. 어른들의 일에도 놀이적 요소가 반영된다면 더 이상 일이 억지로 해야 할 무엇이 아닐 수 있다. 비록 의무로 시작했다고 해도 성취감과 희열을 경험하면 그것이 긍정적 피드백이 되어 일에 자발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몰입은 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나 또한 그동안 일을 하면서 힘든 적이 많았다. 그래도 끝내 그만두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몰입이 주는 생동감이 즐거운 보상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구나.

 

그러므로 딸아, 나는 네가 일을 하면서 무엇보다 몰입의 즐거움을 익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신나게 춤추며 일했으면 좋겠다.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인 버나드 쇼도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직업을 의무로 생각하고 억지로 하는 자다." 나는 네가 그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인생 별거 없다. 그냥 재미있게 살아라. 노트 온 스캔들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니? 주디 덴치가 열연한 50대의 외로운 올드미스 바바라 코베트가 주인공인 영화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바라가 동료 교사에게 이렇게 고백했지.

 

"어렸을 때 난 나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 이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고 꿈꿨지. 하지만 언젠가는 주제를 알게 되는 법, 내 인생을 혼자서 끝내게 될까 봐 두려워."

 

남들에게 외로움을 들키기는커녕 워낙 깐깐하고 지독하게 행동했던 주인공이 던진 대사여서 그런지 그 말에 마음에 콕 박혔다. 내 인생이 끝나는 날, 나는 과연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아쉬워할까? 순간 어머니가 떠 올랐다. 지금은 내 곁에 없는 어머니가 말이다. 너의 외할머니가 나에게 알려준 한 가지, 너도 알다시피 내 어머니는 6.25 전쟁을 겪었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30여 년 동안 홀로 외로이 사셨다. 젊어서는 6명의 아이를 키워내느라 새벽부터 잠들 때까지 아이들 뒤치다거리에 한시도 쉴 틈이 없었지. 하지만 어머니는 힘든 내색 한 번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내게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질경이처럼 끈질기고 강인한 생활력,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 같은 것들이다. 나는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 심장이 안 좋으셨던 어머니가 몇 해 전 병치레 끝에 조용히 숨을 거두시고 난 후 남편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장모님을 참 많이 닮았다고, 힘들다 하면서도 계속 뭔가를 하고 있고, 또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하려는 모습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니냐고."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어릴 때는 늘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다고만 생각했던, 그래서 나는 다르게 살리라 여겼던 어머니의 삶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도 그런 삶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과 가난 속에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불평이나 하소연을 하지 않으셨고 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셨다. 네가 어릴 때 너를 키워주기도 했던 내 어머니는 내가 힘들다고 투덜댈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인생 별거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 어쩌면 어머니는 살 수록 어려운 게 인생이지만 그럴수록 삶의 재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게 아닐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삶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마라. 채 열 살이 안 되었는데도 삶의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부모는 말한다. 우리 애가 IQ는 125인데 공부는 40명 중에 35 등 하고 있고 꿈도 없대요. 그래서 아이를 치료해 달라고 병원에 데려 오는데 그 아이는 정작 시큰둥하다.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기에 학교에 가서도 시큰둥, 집에 가도 시큰둥이다. 삶의 재미를 잃어버리면 하루하루가 그저 견디는 날일 수밖에 없다. 엄마 아빠가 잔소리하니까 움직이고 선생님의 뭐라고 하니까 움직이는 로봇에 지나지 않게 된다.

 

모든 인간은 엄청난 호기심과 삶을 향한 에너지를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아이는 무엇이든 궁금해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을 탐험하려 한다. 뭐든 만져 보려 하고, 깨물어보려 하고, 맛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무한한 호기심으로 세상을 배워 나간다. 그런데 무리한 교육과 선행학습, 지나친 경쟁의식은 아이로 하여금 삶에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지친 사람은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쉬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길 리 만무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논어의 한 구절이 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그만큼 즐기면서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 그 에너지야말로 삶을 이끌어가는 강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것들과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도 점점 많아진다. 그러면 누구나 삶의 무게 지치게 되고 새롭게 배우는 것 또한 스트레스가 되고 만다. 그럴수록 삶에 대한 호기심을 놓지 않고 재미있게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무엇이든 기꺼이 즐겁게 행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어머니도 나에게 재미있게 살라는 말씀을 하신 게 아닐까 싶다.

 

딸아, 나는 너에게 나중에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바라건대 나는 나에게 멈춰 있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려 했으며 순간순간 재미있게 생동감을 지니려고 애썼던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에서 한 번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소중한 시간을 불평이나 한탄으로 날려버리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그리고 남들을 이기거나 남들에게 지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내 몫만큼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그러니 딸아, 할머니 말씀처럼 삶 속에서 재미를 놓치지 말아라. 생각지도 못한 고난이 찾아와 너를 시험할 때, 누군가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떨칠 수 없을 때, 사는 게 죽기보다 힘이 들 때 그 말을 떠올리면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