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큰 누나를 제외한 남매 4명이 돌아가면서 청주에 내려가 부모님을 돌본다. 스스로 거동을 못하시거나 아직 많이 아픈 상태는 아니라서 4번 정도 끼니에 맞게 밥을 차리고 함께 외출을 하거나 병원을 다녀오거나 하는 일이 전부다.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일보다 숨겨진 일이 훨씬 어렵고 많다. 숨겨진 일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점점 가벼워지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잔소리 심하고 성격 괴팍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고속버스 터미널 건너편 푸른 병원에서 재활 치료 중인 큰 누나 면회를 가야 한다.
남자는 토요일 아침 일찍 양재천을 달리고 돌아와 10시에 출발한다.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막막하고 어서 시간이 지나기만 바란다. 우울한 마음이 조금씩 더 생기고 아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막히지 않고 일찍 도착하면 점심은 챙겨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휴게소에 들러 잠깐 쉬면서 핫 6 캔을 사 흡연구역으로 간다. 이 시간과 습관이 너무 좋다. 청주대학교, 한경대학교, 부모님 집에 올 때 한 번, 다시 과천 집으로 돌아올 때 한 번씩 하는 일이다. 일단 운전할 때 졸리지가 않다. 청주 세종 인터체인지로 들어오는 플러터너스 가로수 길을 지나오면 우울한 기분이 조금은 맑아진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 도착하니 아버지가 점심을 차려 어머니와 드시고 계셔서 할 일은 없었다. 오랜만 티브이를 보고 책도 읽고 낮잠도 잔다. 다른 곳에서는 갖기 힘든 시간이 세상 편하다. 두 분은 움직이는 일이 다 싫어서 그런지 마트에 장 보러 가자는 일도, 충주 해물찜 식당을 가자는 말도, 괴산 찻집에 가자는 말도 다 싫다고 하신다. 마트에 들러 파, 복숭아, 두부, 깐 마늘, 키위, 요구르트, 소고기, 고추장, 라면, 사각 어묵, 계란, 견과류를 산다. 무엇을 할지 아무 계획도 없고, 무슨 요리를 하려고 장을 보는 게 아니라서 집에 필요한 것, 없는 것들을 살펴보고 말 그대로 그냥 장을 본다.
이승희, "그냥"
그냥이라는 말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아니면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잠을 털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잠 속에서 생을 마쳐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냥 속에는 그냥이 산다는 말은 맞다.
그냥의 집은 참 쓸쓸하겠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처럼 그렇게.
그냥이라는 말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깊은 산그림자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둔 강물 혹은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사귀 같은 것들이 다 그냥이다. 그래서 난 그냥이 좋다.
그냥 그것들이 좋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들의 물살이 가슴에 닿는 느낌이 좋다.
그냥 속에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는 일처럼.
― 이승희, '그냥' (창비시선 258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그냥'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말이다. 단어 자체로 신비로운 말이다. 까닭 없고, 계산이나 뚜렷한 근거 없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다. 이승희의 시를 읽노라면, '그냥'이란 말이 자연(自然) 그 자체의 본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깊은 산 그림자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둔 강물 혹은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사귀 같은 것들이 다 그냥이다."라는 통찰에서 그냥이 가진 의미가 보인다. 누가 만들거나 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것,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자라고 죽고 하는 것, 그게 자연 아닌가 싶다. 사는 것도 그렇다.
저녁을 챙겨드리고 계속 쉬거나 잠깐 나가서 친구를 만나고 오기도 한다. 충북대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할 때도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 일 없이 계속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빈둥대며 노는 일이다. 아침을 준비하러 일어났더니 아버지는 벌써 챙겨 드시고 방에서 주무시는 모양이다. 밥을 차리고 드시라고 하니 이미 먹었다고 하신다. 아버지와 마음 간격은 계속 멀어진다. 도저히 가까워지지 않는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심한 잔소리, 버럭 소리 지르는 것들, 누구에게나 무례하게 구는 것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젠가는 후회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은 죽기 전까지 진정한 화해가 불가능하다던데 모르겠다. 남자가 조금 더 화해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달라진다면 또 모를 일이다.
일요일 오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큰 누나가 있는 병원으로 간다. 뇌혈관 질환이 오고 6개월이 지나고 있어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그렇다고 당장 퇴원을 할 상태는 아니다. 어눌한 말에서 몇 마디는 들을 수 있고, 오른쪽 다리에 의지해 천천히 걷기도 한다. 퇴원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고, 다음에 올 때는 맛있는 음식을 사 오라고 한다. 어머니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듣고만 계신다. 누나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질문에 연달아 '몰라, 몰라' 한다. 부모는 가장 덜 행복한 자식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아주 정확하다. 큰 누나를 보는 부모님 마음이 딱 그렇지 않을까.
점심때가 되어 남자는 돌아가려고 한다. 시간이 늦어지는 만큼 막히는 길이 늘어나니 떠나려면 일찍 떠나려고 한다. 가벼워지는 어머니와 점점 무거워지는 아버지를 남기도 떠나는 길이라서 마음은 무겁다. 다음 주면 작은 누나나 남동생이 와서 돌봐줄 것이다. 시간이 왜 사랑과 관련이 없을까?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시간의 흐름은 변함없이 늘 작동한다.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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