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날들이 궁금하면 건강보험 자격득실 확인서를 살펴본다.
가끔 집으로 배송하는 국민 연금 가입 내역서를 살펴본다. 최초 가입일이 1992년 4월 2일이다. 그러니까 막 청주에서 안양에 있는 연구소로 취업해 입사한 달부터 납부했다. 지금까지 사업장에서 251개월, 아들을 키우며 개인 사업할 때 지역가입자로 87개월을 더하면 338개월을 납부하였고, 앞으로 만 60세까지 계속 납부하여 400개월을 더 납부해야 한다. 순조롭게 납부할 경우 2032년 7월에 신청을 하면 다음 달 25일부터 매월 연금이 나온다고 한다.
보통 의료보험 납부 증명서와 국민연금 가입 내역서를 살펴보면 어디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았는지 상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 긴 세월 이일 저 일을 하고, 9시부터 6시까지 직장 생활, 때로는 개인 사업도 하고, 밥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 의미가 있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하든, 참 초라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면 그것뿐이다. 남자는 특별한 능력도 없고, 잘 태어난 가정에서 많은 지원을 입은 것도 없고, 잘 생기지도 못했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크게 안 다치고, 법의 심판을 받을 일도 없고, 삶의 큰 고난 같은 것도 없이 살아온 얼굴을 바라보며 위로한다. 아직 남은 삶이 많고 저무는 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잘 살아왔다고, 대견하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준다. 슬픈 일이다.
가끔 취업에 필요한 서류 혹은 세무 신고 자료를 제출하다가 건강보험 자격 득실 확인서라는 자료를 발급받아 제출한다. 그럴 때도 지금처럼 한 동안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게 된다. 더 볼만한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 보험 자격을 얻고 잃었던 그 해에, 나이가 몇 살이던 해에, 무슨 일로 자격을 잃고 또 얻었는지 즉, 어떤 직장을 얼마나 오래 어디서 다녔는지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러면 함께 일했던 동료며, 상사, 회사 대표까지 생각이 나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지난 일은 다 따뜻하고 용서가 되고 아련하니 기분 나쁜 일은 드물고 아쉬움만 새록새록 솟아난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인가 싶다. 남자는 '그런 게 인생이지.'라는 말을 자주 하기로 했다. 하면 할수록 참 다정한 말이다.
삶에서 대부분은 그냥 지나간다. 반쯤은 힘들고 반은 즐겁다. 반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반은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삶 전체가 전체가 고통이라고 하고, 사는 일 자체가 먹고살기 위한 것이기에 고통스러운 것 같기도 하지만 지나고 보면 모든 일들이 그저 왔다가, 그저 온 것처럼 간다. 무엇을 뾰족하게 남기는 것 같지도 않고, 또 삶에서 누리는 것들을 몽땅 뺏어가지도 않는다. 해가 지면 다시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불면 비가 오고, 더운 계절이 가면 시원한 계절이 오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질서와 책임,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들은 늘 변하니 매 순간순간 집중해서 잘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되돌아보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자주 그런 시간을 가지면 좋겠지만 어디 사람이 그런가. 그럴 때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어쨌든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나무 그늘 아래로 도서관에 다닌 지 삼 일이 되었다. 나무 위에서는 매미 소리가 따가운데 이 놈들이 지금은 높은 곳에 있지만 알을 낳을 때는 점점 나무 아래 땅으로 내려와 쉽게 잡을 수 있다. 그런 게 인생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기분이다. '시간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순간이 사실 누리고 싶어도 누리지 못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걸로 끝이니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많고 바쁘게 되면 또 그런 삶이 지속되고 역시 기분 좋은 날들일 게 확실하다. 감사할 뿐이다.
"헛소리는 가차 없이 잘라내고, 중요한 일을 미루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음미하세요. 인생이 짧다고 생각될 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 Paul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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