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좋은 일이 안 생겨도 괜찮으니까 슬픈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그런 나이, 그런 계절, 그런 날들이 이어진다.(김애란 - 바깥은 여름)
여자는 잘 개어놓은 수건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명예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여자는 마음에 안 드는 모든일을 잘 참아냈다. 참는 만큼 쾌락을 얻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사랑했다. 어디로 여행을 떠나기라도 하면 집안은 연인을 기다리는 호텔룸처럼 깔끔하게 치워졌다. 출산 예정일 전날에 병원으로 가기 전에도 그랬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보니 집안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었고 깨끗했다. 하루에 두 번씩 여자는 몸을 닦는다. 시간이 길어도 늘 하는 일이다.
간만에 눈이 펑펑 내렸다. 올 겨울의 마지막 눈이라고 일기예보는 말했다. 우리는 올해의 첫 눈이라며 히히덕 거렸다. 천둥 번개와 함께 무섭게 쏟아지는 눈을 맞고 있는데 여자가 골반을 씰룩 거리며 다리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도 덩달아 손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조금은 술에 취해 말했다.
"이제 좋은 시절 다 갔어. 앞으로 외로워질 날 들 뿐이네. 자주 봅시다." 라며 슬픈 이야기를 했다.
같이 듣고 있던 우리도 조금은 섭섭했다. 그래도 당신 곁엔 우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잘지내" 하고 악수 하면서 헤어졌다.
우수가 지나는 계절엔 특이한 현상이 있다. 비는 내리지 않는데 늦은 오후가 되면 도로가 촉촉히 젖어있다. 비가 땅에서 솟아난다. 겨우내 땅속에 얼었던 물들이 서서히 녹으면서 땅 위로 솟는 일이다. 길지도 않다. 딱 열흘 정도 이런 촉촉한 땅을 밟고 지낸다. 우리가 보는 모든 물건들도 촉촉해진다. 지붕, 벽, 콘크리트 기둥, 놀이터 쇳덩어리들까지 모두 얼어붙었던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촉촉함을 잃어버리면 봄이 시작된다. -見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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