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각 바른 글

마음이 외롭고 답답할 때가 가끔 생긴다.

지구빵집 2018. 6. 2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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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참 많다. 하나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디테일까지 고려하면 이건 일을 넘어서 예술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이 늘 예술인 이유다. 

 

ART 디자인 선생님과 소프트웨어 교육 선생님 모시고 회의를 했다. 인형의 구성 모습을 보고 밑그림을 확인하고 5가지 센서(소리, 초음파 거리, 조도, 인체감지)와 구동부가 들어갈 위치를 확인한다. 센서 연결선의 길이를 확인하고 조립방안을 서로 협의 한다. 말이 제일 많은 건 내몫이다. 잘난척 하지 말자. 경청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보드가 들어가기에 면적이 좁다. 자크를 가로로 달아야 겠다. 4시간을 인형 색칠을 하는데 좀 긴 시간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봉제인형을 만드는 교육담당 선생님은 소프트웨어 교육에 치중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아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거나 중요한 역할을 맏지 못할 때 누구나 드는 마음이다. 

 

6월 16일~17일 메이커 프로젝트 코딩캠프에 아두이노 소프트웨어 교육을 하신 선생님 신상자료를 부탁하고 나서 언듯 보니 84학번 선배님이시다. 그것도 정통 전자계산학과 출신, 지금의 컴퓨터 공학이나 소프트웨어 학과 정도 되겠다. 실력이 탁월한 건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여린 꽃처럼 보이던 분이었는데 의외였다. 요번 주 23~24일 수업은 반응하는 인형만들기 메이커 활동을 한다. 하루는 선배님이 강의하시고 하루는 디자인 관련 미술 작업을 할 예정이다. 요 며칠 인형 만들기로 산더미 같은 일들을 많이 도와주신다. 못하는 게 없으시다. 케이블 작업, 수축튜브, 자르고, 프로그램하고, 교육까지 하신다. 오늘 장난감 드론을 두 번째라면서 운전을 잘 하신다. 언제 한 번 밥을 먹기로 했는데 선생님은 소프트웨어 교육 일정으로 시간이 잘 나지 않는다. 밥 잘 사주는 그냥 누나면 좋겠다. 

 

관계가 늘어날 수록 우리의 의식은 점점 바로 서기가 힘들어진다. 심지어 오직 선의로만 베푼 관계조차도 방향이 어떻게 될지 몰라 옛 성현들도 아무렇게나 선의를 베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쏟지 않아도 될 곳에 신경을 쓰게 된다. 굳게 디딘 땅에서 조금은 들떠 지내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하는 관계는 얼마나 피곤한가.

 

요즈음 나의 생각은 많이 줄었다. 목표는 단 하나다. 모니터 앞으로 모기는 아니고 하루살이 보다는 오래사는 날모기같은 게 날아오더니 모니터 면에 앉는다. 누를까 하다가 모기가 아니라서 이내 그만둔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도 많이 줄었다. 결국 날모기가 팔에 앉았는데 손으로 탁 쳐서 잡아버렸다. 결국 아주 잠깐 죽는 시간을 연장한 것 뿐이다. 그게 어장관리라는 생각이 들어서든, 아님 생각하는 데 지쳐서든, 아니면 떠날 준비를 하고 독하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든, 아님 막 시작한 사업에 집중하기 때문이든 모두 다 분명한 이유가 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방법을 생각한다.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내가 그사람 곁에 없는 것을 남자가 두렵게 느끼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남자가 다른 누구와도 구분되지 않는 똑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남자는 더 이상 나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이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그런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조금이나마 힘든 시간들을 모면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일이다.

 

 

마음이 외롭고 답답할 때가 가끔 생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좋은 글들은 여러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여러번 옮겨도 누구나 다 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말없이 수긍할 수 있는 일은 몽땅 그대로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되도록이면 그 모습이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켜) 소설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이야기의 일부로 쏟아 붓기 위해 노력해왔다.

 

달리는 것에는 몇 가지 큰 이점이 있다. 우선 첫째로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다.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달리기에 적합한 운동화가 있고, 그럭저럭 도로가 있으면 마음 내킬 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전력을 다해서 매달리고, 그래도 잘 되지 않으면 단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중간하게 하다가 실패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이다.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이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적인 소설가가 된 이래 지금까지, 내가 몸소 절실하게 느껴온 것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 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그래서 마라톤 단련은 전혀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매일매일 집필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지탱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끝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선 한 단락을 짓는다는 것뿐으로, 실제로는 대단한 의미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사물의 의미를 편의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또 그 유한성의 에두른 비유로서, 어딘가의 지점에 다른 일은 젖혀놓고 우선 종착점이 설정되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꽤 철학적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이 철학적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말이 아닌 오직 신체를 통한 실감으로서, 말하자면 포괄적으로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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