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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는 일

지구빵집 2021. 2. 2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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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하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날씨는 겨울에는 아무리 눈이 오는 날이라도 밖이나 집 안이 건조하고, 여름엔 온종일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라도 실내외가 습한 날씨가 특징이다. 이런 개념을 그대로 실내와 실외에 적용해도 문제는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날에도 실내보다 실외가 건조하고, 여름에는 햇볕이 강하게 쬐는 뜨거운 날에도 실내보다 실외가 더 습하다. 여름보다 겨울에 베란다에서 말리는 빨래가 더 잘 마른다. 겨울에 방 안의 온도로 실내에서 말리면 고스란히 습기가 방 안에 있지만 추운 날씨에 밖으로 금방 빠져나가는 그것도 상관은 없다. 여름에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다면 밖에서 말리는 빨래도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뽀송뽀송하고 바싹 마른 부드러운 빨래 말리는 이야기는 봄가을에나 그렇지 한겨울이나 여름에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는 데 아무 쓸모없지만, 건조기, 습기제거기, 결로 제거 시스템, 에어컨, 냉동기와 같은 제품 원리-원리라고 해봤자 온도, 습도, 대류, 공기, 압력 정도지만-에 대해 관심 두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다. 어떤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무서운 이유다. 깊게 알고 있으니 그 분야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단점은 밖에서 바라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얕고 넓게 아는 사람은 매사가 시끄럽다. 안 해 본 게 없고,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옆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좋고.

 

일주일 전부터 아침마다 밖에 나가보면 '비가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만 해도 비가 온 듯 촉촉한 땅이 저녁이 되어 기온이 살짝 내려가면 건조한 관계로 땅이 말라 있다. 우리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싶다. 사실 운명이란 것은 없고, 우연이란 게 놀라운 거다. 지구 위의 생명을 봐도 그렇고, 우주라든가 아니면 단순하게 물을 보아도 우연이 아니고선 설명할 방법은 없다. 세월이 가는 것, 점차 나이 먹어 가는 것도 우연으로 보게 된다. 남자는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생각한다.

 

무엇이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며, 싫어하는 이유를 찾거나, 좋은 일을 즐기기 위해 탐닉하면 안 되는 나이, 마음에 드는 무엇인가를 위해 '어디 한 번 해볼까' 하면서 돌진한다거나 밤을 새운다거나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도할 수 없는 나이, 너무 뜨거운 것이나 너무 차가운 것을 좇았고, 폭폭 한 것들을 참지 못하고 한참 헤매느라 입은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나이, 나이 들어 혼자 이마트나 시장으로 바구니를 들고 장 보러 다니는 게 사실은 쿨한 게 아니라 불쌍하게 보이고, 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무엇을 사든 관심이 하나도 없는 나이,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되고, 사람에 대한 환상은 이미 걷어치웠고, 사람의 단면을 좀 더 선명히 보는 눈을 가졌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눈이 먼 나이, 예전과 같은 것은 없고 자신과 외부 세상은 늘 변하므로 기억 속의 시간을 더듬고, 그 공간, 가보았던 곳, 먹었던 음식, 본 영화가 좋아지는 나이, 멀리 있는 것을 갖고 싶다거나,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행복에 속는 일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서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마음을 거두는 나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도 힘껏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서 적당한 수준에 이르기만을 바라는 나이, 의무적으로 부양한 건 아니지만 돌보는 가족과 나이 든 부모 말고도 손위 누님이라든가 앞가림 못 하는 동생 중 누군가를 일부는 부양해야 할 책임이 느껴지는 그런 나이, 다 귀찮은 나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아니라서 남자는 무엇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새롭다고 말할 수 없지만 늘 미련이 있던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몇 번이나 사업을 시작했다가도 크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금방 포기해 버리는 남자는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가 실패한 이유는 매번 일찍 포기해서다. 앞일은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좀 살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임에 틀림없는 다투거나 빼앗기는 일로 관계가 어그러진 경험이 있는 남자는 용기가 없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주여, 용기를 주소서' 혼자 말한다. 혼잣말이 많아지는 현상은 나이 들어 늙어가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 중의 하나라고 한다. 잘못하면 버릇된다. 옆에 사람이라도 있다면 거의 최악이다.

 

남자는 윗몸 일으키기를 150번 하고, 잠시 명상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나이 드는 일이 꼭 처량하거나 슬픈일이거나 눈을 붉히면서 어깨를 들썩일 일은 아니다. 욕심이 사라지니 집착을 덜고, 욕정이 없어지니 사물을 더 선명히 볼 수 있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좀 더 사려깊고 생각이 깊어지고 빨리 배우는 나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서두르지 않고 잘 참는 힘으로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좋은 나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보다 너 넓은 마음으로 관대하고 포용할 줄 알며, 존엄이 어떤 의미인지 판단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이 마저도 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연필을 꼭 칼로 깍는 남자에겐 엄마의 날렵한 솜씨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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