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러너스

2022년 3월 달리기, 자기 수양이란 하기 싫은 때조차 할 일을 하는 것

지구빵집 2022. 4. 1.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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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수는 교수대로 바쁜 계절이 왔다. 준비는 철저히 하고 상황에 들어서면 흐름을 탄다. 어떤 상황도 생각대로 흐르거나 무엇을 남길 것이라고 조금도 예측하지 말고 일상을 직면한다. 꽉 움켜쥔 손을 놓아야만, 마음이든 생각이든 자리를 비워야만 다시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한 순간도 나에게서 사라지거나 선명함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 비우기 전에는 절대 내 자리를 채우리라고 상상도 할 수 없던 것들, 받아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을 때 나에게 들어오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것들이 조금씩 자리를 비우자마자, 미처 눈에 들어오지 못해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다. 그것들이 조금씩 차오르는 그대로 무심히 지켜본다.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다. 어차피 나와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전구의 모양이나, 차의 색깔, 발 사이즈처럼 말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온전한 형태 그대로 만나는 일이다. 판단이나 평가, 비난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2월에 과천마라톤 팀의 쟁쟁한 러너들과 함께 한 훈련이 피로가 누적이 되었는지 꼼짝도 하기 싫어서 한 주간 쉬었다. 전 주 토요 훈련 끝나고 술을 많이 마셨는지 허리가 조금 아픈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약해지고 사기가 저하되고 애쓰면서 달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달리니 모든 찌꺼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너진 마음을 잡아주는 것은 어쨌든 결국엔 몸의 근육이다. 행동으로 마음을 잡을 수 있지, 정신이 행동을 잡는 일은 도저히 육체마저 고갈되었을 때 정신의 힘을 빌어다 쓰는 경우다. 마음은 우리의 육체를 구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쓸데없는 일에 금방 소모시킨다.

 

진정한 부단함은 남은 것이 부단함 밖에 없을 때 나타난다. 늘 멈추느라 갖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일도, 연애도, 사업도, 가족도, 사회적 관계도 마찬가지로 멈추면 안 되었던 것들을 지레 포기하므로 잃어버렸다. 부단함이란 인내와 같아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도 부단함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3월 8일. 화. 맑음. 관문 운동장 트랙 30회전 12.5km, 1시간 18분, 페이스 6분 18초

 

어쩌다 보니 3월의 처음 달리기다. 본격적으로 봄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몸은 무겁다.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건지? 내가 잘 버티고 감당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누구나 두려움을 포함해 자신에 대한 의심이나 목표에 대한 회의는 늘 가지고 있다. 오전 5시에 일어난다는 목표가 3개월 흐르고 마음이 조금 풀어졌을 때 "아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5시에 일어나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물론 넘어서기도 하고 피곤하면 한 시간 정도 더 자기도 한다. 그런 특별한 것이 목적이라면 벌써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고, 오늘보다 나은 모습,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라서 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 달랑 3명이 나왔다. 과천팀에 상갓집이 두 군데가 있어 참석자가 없었다. 조깅으로 시작해 30바퀴를 가속 주로 달리는 훈련을 하기로 한다. 이렇게 겨울 달리기는 끝나고 봄날 달리기를 시작한다. 눈 쌓인 주로를 달리는 일, 바니 모자 양 옆에 매달린 고드름과 서리가 내린 흰 눈썹을 보는 일, 땀에 젖은 버프에 물기가 얼어 꾸덕해지는 것, 장거리 달리기가 겁이 나서 항상 체온 유지에 신경 쓰는 일도 모두 지났다.  

 

"I no longer force things. What flows, flows, what crashes, crashes. I only have space and energy for things that are meant for me."

 

"The biggest lesson I've learned this year is not to force anything; conversations, friendships, relationships, attention, love. Anything forced is just not worth fighting for, whatever flows flows, what crashes crashes. It is what it is."

 

3월 10일. 목. 관문 운동장 5km 질주 훈련. 9.5km

 

간단하게 준비운동을 마치고 8바퀴 조깅, 100미터 질주 4개를 늘 하던 대로 달린다. 왜 그런지 늘 해도 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순간순간 버티면서 끝까지 해낸다는 생각만 든다. 400미터 트랙을 110초에 달리는 빠르기로 트랙 12바퀴 반, 5km를 달리기로 한다. 과천팀 잘 달리는 분은 2-3번 트랙을 달리고 거북이 같이 달리는 나는 1번 트랙에서 달린다. 10바퀴 잘 달리고 힘이 빠져서 점점 뒤로 처진다. 결국 마지막 바퀴에는 반 바퀴 차이가 났지만 완주는 했다. '무지막지한 훈련이 나에게 무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만 달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삶에서 특별히 즐거운 시간은 달리는 시간뿐이라서 그만두고 싶지 않다. 

 

3월 12일. 토. 오후에 비 소식. 낮은 구름. 따뜻함. 15km 1시간 25분 페이스 5분 39초 

 

코로나 상황은 정점을 향해 오르느라 나름 바쁘다. 어쨌든 생명 아닌가. 영동 1교에 모여 번개 달리기로 진행한다. 과천 방향으로 양재천을 달린다. 겨울 가뭄이 극심해 물은 줄었지만 양재천은 조용히 흐르고, 백로, 황새, 두루미가 긴 다리를 뽐내며 먹이를 찾고, 청둥오리와 새끼들이 몰려다닌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난 뒤라 그런지 움직임이 가볍다. 양재천 주로 변 곳곳에 있는 꽃밭에는 마른풀들을 전부 다듬고 어느새 깨끗하게 갈아놓았다. 꽃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고 꽃들은 또 몇 계절을 환하게 필 것이다. 러너들은 그 길을 또 분주히 달릴 것이다.  

 

관문 운동장까지 올라가 잠깐 쉬고 다시 영동 1교로 돌아가면 정확히 12.5km 거리다. 식자 선배가 오랜만에 나와서 관문 운동장으로 올라가지 않고 과천 중심에 있는 중앙공원까지 달리자고 한다. 거리는 15km가 된다. 돌아올 때 속도를 높여 달린다. 영동 1교를 1km 정도 앞두고 식자 선배가 지쳤는지 점점 느려진다. 잽싸게 추월을 하고 현자하고는 100미터 정도 뒤에서 골인한다. 밥 먹는데 "진짜 늘 열심히 훈련하는 사람은 이길 수가 없네. 실력이 꾸준히 늘고 있네. 이젠 못 따라가겠어." 한다.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선배 뒤꽁무니만 열심히 쫓아 달리면 어느새 목표한 훈련을 채우고 싶은데. 선배는 한참 앞서 달리다가 내가 가쁜 호흡과 지친 모습을 보이면 천천히 달리면서 옆에 오면 힘내라고 격려하고 함께 달려주는 선배를 또 잃어버린다는 생각으로 복잡하다. 매 순간을 느끼고 살아가는 일은 어렵다. 오만가지 생각이 얽혀 춤을 추는 데 빠져나갈 구석은 없다. 

 

3월 15일. 화요일 훈련. 관문운동장. 14.7km. 야소 800-400, 110초-3분, 8회전

 

힘들게 훈련한 날은 회복이 점점 늦어지는 느낌이 든다. 느낌을 사실로 인식하는 인간의 비합리적인 본능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그 느낌을 넘어서든가 굴복하는 일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Yasoo 800 훈련을 매주 화요일마다 한다. 800미터를 약 3분에 달리고 400미터를 3분에 달린다. 8번 반복하면 훈련이 끝난다. 어째서 매번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인지. 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다. 끝나고 과천 팀 훈련 코치와 렬자, 국자와 막걸리 한 잔 하고 헤어졌다. 근성이 좋다고 했다. 근성이 있었다면 다른 일에서도 성과를 거두는 게 맞는데 나에게 그러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3월 17일. 목요 훈련. 영동 1교 왕복. 

 

육체적인 피로 누적이고, 스피드가 높아지면 부상은 필수라고 하던데 오른쪽 햄스트링이 약간 당기고 몸이 많이 힘들어보여서 조깅으로 달렸다. 다른 사람의 일정에 따라 루틴이나 계획을 변경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7시에 하는 훈련을 5시 30분에 하자고 했고, 시간 맟춰 운동장에 가니 한 명이 6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다. 결국 훈련을 마치니 다른 날과 같다. 3차 접종을 이제서야 하는 사람부터,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드믈고 여하튼 사람은 모두가 다르다. 무언가를 지키며 산다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고 한다.  

 

3월 19일. 비와 눈이 겹쳐서 내린 날. 관문 운동장 왕복 12.5km. 우중주, 설중주. 

 

날씨가 고르지 못해 신입이고 아주 잘 달리는 수자와 둘이 달렸다. 수자에게 달리기가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말을 해주었다. 마음의 평화와 가족, 사랑, 막대한 부, 여러 관계, 함께 달리는 일들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좋은 자세란 자기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자세고 속도가 빠르다면 원하는 자세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말했다. 가끔 필요없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람마다 공감하는 방식과 받아들이는 이해의 정도가 달라 함부로 가르치거나 범위를 벗어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버릇인가 보다.   

 

3월 22일. 화요일 훈련. 찬바람. 조깅 8회전 100미터 질주 4개, 5분 주 20회전. 12.3km 1시간 7분 40초 pace 5분 30초

 

달리기 뿐만 아니라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행동이라도 speed가 느껴진다면 상처와 부상은 피할 수 없다. 상처 없이 빠르게 달성하고 원하는 것을 단기간에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드믈다. 달리는 일이 지겹다. 달리는 일을 반복해야 삶이 지탱하는 과정도 지겹다. 5개월 째 아침 5시에 일어나는 일도 벌써 지겹다. 일찍 일어나면서 일주일에 6일 정도를 술 안 마시는 일도 지겹다. 매일 자기전에 일어날 때마다 할 일 목록을 적는 일도 지겹다. 아침마다 명상도 지겹다. 경제 신문을 읽는 일도 지겹다. 달리기 속도를 높힐 때마다 묵직한 근육과 찌질한 부상을 겪는 일도 지겹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는 일도, 참는 일도 지겹다. 세상은 지겨운 곳이다.

 

3월 24일. 목요일. 영동 1교 왕복. 12.2km

 

스스로 정한 한계를 넘지 못하고 항상 주저하고 일찍 포기했던 습관때문에 안된 것이다. 

 

"엔지니어가 영업이나 마케팅에 대해 멀 알아?"

"멀 그리 애쓰면서 할 필요가 있어?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원래부터 난 악착같이 애쓰는 사람이 아니었어. 앞으로도 그럴꺼야."

 

마음이 정한 경계는 허상이다. 모르는 것, 경험이 없는 것을 남들 앞에서 이야기 할 정도로 멍청한 짓인 줄 몰랐다. 부족한 것은 인내와 끈기뿐만 아니라 기개도 없었다. 앞으로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

 

3월 26일. 토요일 번개 달리기. 우중주. 13km. 1시간 17분. pace 6분 2초.

비방울이 약해졌지만 부슬부슬 내린다. 순자 선배가 나와 둘이 달렸다. 잠실 철교까지 하프를 달리는 게 목표였지만 목요일 훈련이 아직 풀리지 않아 한강 합수부까지 달린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비를 두 번 맞지 않는다. 변화를 표현하는 통찰이 있는 말들은 보통 말을 달리해도 잘 들어맞는다. 변화의 요체란 얼마나 심오한가? 한강 합수부 넓은 공터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빗줄기가 약해지기를 기다리다 돌아왔다. 끝까지 순자 선배에게 힘내라고 하며 달렸다.

 

3월 29일. 화요일 훈련. 관문 체육공원 13.6km, 1시간 16분, pace 5:36

짧은 타이즈를 입고 달리는 첫 날이다. 긴 옷을 빨리가 힘들어서 되도록 빨리 짧은 옷으로 갈아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짧게 존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낡아지고, 녹슬고, 헤지고, 진득진득해지고, 잊히고, 사라진다. 연연하지 말고 지금 순간을 즐긴다. 최대한 느끼는 데에 집중한다. 3월 훈련이 단 하루 남았다. 빠지지 말자.

 

지금 즉시 읽고, 쓰고, 따라하고, 만들고, 포스팅하고, 실행하지 않을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처다보지도, 듣지도, 보지도. 찾지도 마라. 

 

3월 31일. 목요일 훈련. 3월 마지막 훈련. 

잘 달렸다. 트랙 12바퀴 반인 5km를 22분 30초에 달렸다. 아주 잘했다. 인간의 삶을 생로병사라면 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통에 가깝다. 그러니까 생로병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 말고도 더 좋은 것, 즐거운 것들이 충분히 존재한다. 단지 아름답고 사랑하는 것들은 일찍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

 

3월에도 많이 잘 달렸다. 한가지 흠이라면 운동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리듬, 질서, 조화, 균형, 반복을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 즉시 시작한다. 삶에는 순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어떤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시작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모든 일을 부단히 열심히 한다. 볼 수 없고, 감춰진 것으로는 무엇도 알 수 없기에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평가 받을 때까지 열심히 한다. 누구나 결국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한다.  

 

3월 8일. 12.5km

3월 10일. 9.5km

3월 12일. 15km

3월 15일. 14.7km

3월 17일. 12.5km

3월 19일. 12.5km

3월 22일. 12.5km

3월 24일. 12.2km

3월 26일. 13km

3월 29일. 13.6km

3월 31일. 9km.

 

 

푸른 검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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