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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그 집, 박경리 작가의 마지막 詩

지구빵집 2023. 2. 1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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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작가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턱 걸린다. 버릴 것만 남아서도 안 되고 아예 버릴 것이 없는 삶을 살자고 다짐한다. 

 

서버실 공사가 끝나면 자리를 또 옮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관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먼저다. 사무실을 옮길 때마다 짐을 나르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짐을 내가 옮기면서 이사하지 않을 때가 올까? 그렇게 기분 나쁜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닌 게 변화는 언제나 환영할만한 일이다. 또 얼마동안은 지겨움이나 지루함, 권태, 무기력,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줄 테니까 말이다.

 

희망을 갖는다. 마당이 넓고 햇살이 잘 드는 그렇게 넓지 않은 집, 아주 긴 싱크대와 요리 도구들이 즐비한 사각 식탁이 있고, 건물 한편엔 작업실이 있어서 언제든 나무를 만지고 전자 공작을 하기 위해 납땜을 하고 쉴 수도 있는 큰 작업실을 꿈꾼다.  

 

박경리 작가는 '삶이 불행하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글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기분일 때 나오기는 힘들다. 오죽하면 그러지 않기 위해 마라톤을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달리는 이유를 불안하고 퇴폐적인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을까. 특히 여성의 글은 피해자의 글이다. 언제나 어둡고 축축한 습기가 배어있는 지하실의 글이다. 그게 어쩔 수 없다. 그 강물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인간이 다른 강물의 이야기를 쓰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느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지...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글 참고

27년 만에 찾은 고향의 봄 1/9 박경리와 악양 최참판 

 

 

 

박경리 작가

 

박경리 작가
박경리 작가

 

박경리 작가
박경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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