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생각 바른 글

여름의 모퉁이를 돌아가면 확실히 가을을 만난다.

지구빵집 2019. 9. 2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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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하고 뜨거운 여름날을 능소화, 배롱나무 꽃, 주황으로 채웠다.

 

  봄의 한가운데서 청계산 자락인 옛골 건너편 상적동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서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 누구도 못 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보통 호사스러운 날을 보낸 게 아니다. 소소한 흉계를 꾸며 노는 일도 많았고, 여유 있는 시간도 많았고, 일하지 않고 보내도 부담이 없는 날을 보냈다. 사실은 집중하지 못하는 날들을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다.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논리와 이성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이고, 디지털의 비밀을 탐구하는 공학자는 아름다운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습하고 뜨거운 날들을 능소화, 배롱나무 꽃, 주황으로 채웠다. 자신을 아끼는 방법 중에 하나가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든, 짧은 거리를 달리든, 밥을 한 끼 먹더라도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에 정성을 다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게 살아야 짧은 인생을 길게 살수 있다. 

 

  다른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남자는 여름 내내 매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매미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을 적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날을 적는 남자는 기록하는 일을 멈춘다. 그런 일마저도 익숙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적지 않았다. 남자는 무엇이 불만인지 익숙한 일들을 자꾸 떼어놓으려고 한다. 무엇을 놓고 가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애쓰는 중이라는 것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참는 일을 잘하려 하고, 마음이 한쪽으로 기우는 일을 놓으려 하고 있다. 더 많이 가져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무모하게 굴었던 남자는 무엇인가 포기할 때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기적이고 팔자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매미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귀뚜라미가 울고 바람이 선선하니 벌써 가을이 왔다고 했다. 남자는 일기예보상으로 일평균 기온이 20도로 내려간 뒤 다시 올라오지 않는 첫날부터 가을이 시작되니 아직은 아니라고 했다. 계절과 온도의 변화, 날씨처럼 사람의 마음이 의존하는 자연현상도 없지 싶다. 누구나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계절을 세분한다고 해도 같은 순간이 없듯이 마음은 고요히 머무르지 않는다. 마음이 시시각각 다르니 생각이 달라질 테고, 생각이 다르니 행동도 다르다.

 

  남자는 가을의 색을 보라색으로 정한다. 매 계절에 색을 붙여주는 일은 참 좋은 일 같다. 무채색으로 살던 삶이 총천연색으로 변하는 느낌이다. 아직은 색깔만 정하기로 한다. 다른 것은 정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그가 채우고 싶다고 해서 채워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채워주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얼마나 위험하고 아름다운지.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좋아한다. 설사 다른 사람 말을 잘 듣고 있는 경우란 말하는 사람이 자기를 대변하고 있는 대화일 경우가 많다.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도 마치 이해하는 투로 받아들이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의 공허함을 채워주려 말을 많이 들어주거나, 자기가 말하는 시간에도 화두나 주제가 그의 일인 경우는 더욱 위험하다. 누구를 위한 대화만 하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대화한 모든 얘기들이 그의 일, 그의 애완동물, 그의 책, 가족, 그를 둘러싼 관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면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見河-

 

 

  다시 만났구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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