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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테두리에서 견딜 만큼 정답고 따뜻한 느낌이길 바랐다.

지구빵집 2019. 9. 2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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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테두리에서 견딜 만큼 정답고 따뜻한 느낌이길 바랐다.

 

갑자기 온몸에 열이 조금 나면서 감기가 찾아온 느낌이다. 특별한 일은 없는데 현기증이 나고 왼쪽 머리에 두통이 약간 있다. 한동안 피지 않던 담배를 갑자기 많이 피워서 그런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몸에서 무엇인가 훅 하고 빠져나가거나 세차게 몸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마음이 깊은 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숨 가쁜 상태를 지나고 나서 약간은 앓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늦은 것뿐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둘러댄다. 봄에 시작해 두 계절을 함께 작업한 일을 거의 마무리한 기념으로 쫑파티 비슷하게 저녁을 먹었다. 운전하느라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낮에 하고 싶은 일중에 하나가 낮술이다. 햇살이 쨍쨍 쏟아지는 대낮에 공원 벤치에서 양복 입고 술 마시는 일이다. 왠지 퇴폐적이면서 멋진 일이다.

 

남자가 아는 커피가게를 간다. 마당이 넓고 실내는 약간 어둡다. 클래식한 건지, 모던한 건지, 둘 다 섞여 있다. 대부분의 탁자 옆에는 책꽂이가 있고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주인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으로 보인다. 만화, 미술, 경영, 자기 계발 등 여러 가지 책이 골고루 꽂혀있다. 얼마전에 커피를 마시고 '권력의 법칙' 책을 빌렸다. 추석 전까지 가져다 주기로 했는데 아직 첫 페이지도 넘기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정말 좋은 책, 남들이 읽으면 안 될 정도로 좋은 책은 전혀 엉뚱한 곳에 꽂아놓고 도서관 사서가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도서관에 오면 자기만 볼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사소한 일탈이다. 못된 짓이었다. 커피가 맛있는 나름 유명한 카페다. 탁자 사이가 넓어서 다니기에 편하다. 정문 입구 옆으로 흡연하는 데가 있는데 의자가 여러 개 놓여있다. 테이블이 의자 3개마다 하나씩 있다. 테이블 위로 재떨이가 놓여있다. 동그란 테이블 위로 천정에서 내려온 전선에 매달려 주황색 등이 하나씩 켜져 있다.

 

남자는 집에 들어와 혼자 술을 마시고, 늦게 잠을 잔 게 이유라고 생각해버린다. 이런 생각마저 선택하고 결정하기가 힘든 사람이다. 요번 주 일요일은 공주백제 풀코스 마라톤 대회가 있는 날이다. 장거리다운 장거리를 한 번도 뛰지 않아서 이번엔 꼭 완주를 하고 싶었다. 천천히라도 풀코스를 뛰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또 걱정인가. 늘 걱정만 하다 인생 그만둘 건지 답답하다. 두려움을 숭배하라. 그러면 사라진다.

 

남자가 원한 것은 뜨거움이 아니라 애틋함이었다. 연민이라고 부르기엔 삶이 훨씬 무거웠다.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완화시키거나 줄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다. 연민이 감정이입보다 더 강렬한 이유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늘 연민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통을 덜어줄 만한 일은 없었다.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드는 일이 전부였다.

 

말로는 열정이었고, 화상을 입을까봐 근처에도 못 가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사실 우리가 원한 것은 각자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테두리에서 견딜 만큼 정답고, 따뜻하고, 반짝반짝한 느낌을 갖길 원했다. 일방적인 방향으로 정서를 쏟아붓지 않았으면 했다. 무엇인가 시적이고 우아하고 로맨틱하길 원했다. 아무 때고 만나자는 이야기를 '詩•읽•어•줄•래•?•' 하고 말하고, 하늘이 쾌청하고 맑은 날은 가게 전면이 통유리로 된 카페가 생각났다. 그러다가 정신이 퍼뜩 들어도 '아, 여기가 우리가 있던 자리구나. 다행이다. 아직도 여기니까.' 하길 바랐다. 멀리 간다고 쳐도 중간중간 떨어뜨린 조약돌을 보고 돌아갈 수 있으면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소할 수밖에 없는 연민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믿음이 훼손되지 않길 바랐다. 아마도 우리가 지혜롭다면 잘 지킬 것이고, 우리가 포기한다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속으로 어서 무너지길 바랐다. 아니, 무너지는 게 더 오래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상투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구태의연하고 유치하길 바랐다. 고귀한 것을 찾는 데는 천박한 것을 반드시 거쳐 가야한다고 믿었다. 바른 길은 반드시 옳지 않은 길을 거쳐가야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허물없는 성인은 없고, 미래가 없는 죄인도 없다. 처음부터 바른 길을 걷지 않는 사도(邪道)는 아무리 큰 능력을 얻더라도 결국 정도(正道)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정도 나쁜 기운을 걷어내야 좋은 기운이 올라오는 법이다.

 

모든 꽃은 핀다. 꽃이 피어야 질 수 있으니 피기만 해도 행복한 꽃이다. 곧이어 시든다. 모든 청춘도 시든다. 생명은 모두 나이에 굴복한다. 삶의 단계, 지혜, 도덕도 각기 피어나야 하는 순간에 맞게 피어날 뿐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는 게 본성이다.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 나태주의 시집을 꺼낸다. 인터넷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를 모은 시집이다. 어디나 읽어도 참 좋다. 한 편 한 편 읽는 목소리가 바람처럼 흐른다. 책을 읽어주는 그의 목소리가 좋다며 웃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를 본다. -見河- 

 

 

 

아끼지 마세요/나태주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 있으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은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은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꽃 · 1/나태주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

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안부/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봉숭아 물들이려고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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